디지털 똘레랑스
상태바
디지털 똘레랑스
  • 양혜승 시빅뉴스 편집위원
  • 승인 2013.09.16 09:0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똘레랑스. 우리말로 ‘관용’이라고 번역되기도 하는 프랑스어다. 홍세화 씨가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라는 책을 통해 거론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타인이 나와 다름을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개개인이 지닌 다양한 차이를 인정하는 것, 그 ‘다름’을 ‘틀림’으로 인식하지 않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정보 전달과 공유의 속도가 날로 빨라지는 요즘, 새로운 유형의 똘레랑스를 떠올려 본다. 이른바 ‘디지털 똘레랑스’다. 사람마다 보폭이 다르듯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의 수용도 제각각이다. 어떤 이는 의도적으로 수용을 거부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수용하고 싶어도 사정상 그러지 못하기도 한다. 따라서 모든 개인들이 같은 수준의 테크놀로지를 수용하리라고 인식하는 것은 똘레랑스의 부재에 다름 아니다.

얼마 전 일이다. 그 날 오전 11시에 어떤 분의 사무실을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 약속은 일주일 전에 정해진 것이었다. 약속 시각 11시에 다다를 무렵 사무실에 들어섰다. 그런데 비서가 황당한 듯 쳐다보며 말했다. 약속 시간을 미룬다는 이메일을 보냈는데 확인하지 않았느냐는 것이었다. 약간 퉁명스런 분위기마저 느껴졌다. 어제 밤늦게 이메일을 확인했지만 그런 연락을 받은 기억은 없었다. 상대방은 황당한 듯했지만, 나는 당황스러웠다. 미안하다며 자리를 떴다.

집에 돌아와 얼른 이메일을 확인했다. 비서의 말대로 이메일이 와 있었다. 그런데 이메일을 보낸 시각은 그날 오전 9시 30분이었다. 약속시각이 11시를 1시간 30분 앞두고 보낸 이메일이었다. 씁쓸했다. 1시간 30분을 앞두고 약속을 변경한 쪽보다는 변경 내용을 확인하지 않은 사람이 오히려 미안해하는 상황이.

물론 스마트폰만 있었더라면 실시간으로 이메일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러면 그 비서의 황당한 눈초리를 받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미안하다며 뒤돌아 나오는 뻘쭘함도 없었을 것이다. 1시간 30분을 앞두고 약속을 변경한 사람이라면 상대방이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는 상황을 가정하고 있었을 것이 뻔하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지니고 있을 거라는 가정은 과연 어디에서 비롯된 용감한 가정인가.

그 용감한 가정에 당황하고 있던 그날 저녁, 공교롭게 낮의 ‘약속 사건’을 상기시키는 뉴스 기사를 접했다. 요즘 학교에서 생활 지도 사항이나 급한 공지 사항 등을 카카오톡 단체 채팅방을 만들어 알리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해당 기사는 이것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었다. 스마트폰이 없는 학부모의 경우 카카오톡을 이용할 수 없기 때문에 학교와의 소통에서 철저하게 소외된다는 점이었다.

새로운 테크놀로지 세계에 편입하지 않는 개인이 갈수록 소외되는 것이 현실이다. 위의 사례들처럼 실생활에서의 불이익으로까지 이어지는 경우마저 있다. ‘대세’를 따르지 않는 개인은 그만큼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고 혹자는 주장할지 모른다. 하지만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를 ‘닥치고 수용’하는 것이 과연 능사인지는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의 진화가 사회적으로 늘 옳은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개개인의 심리학적 웰빙(well-being)에 긍정적인 기여를 하는지에 대해서도 선뜻 대답하기 힘들다.

예를 들어 최근의 한 연구에 따르면, 페이스북의 이용이 개인들의 외로움 극복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한다. 오히려 페이스북을 통한 커뮤니케이션은 개인의 기대와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해 자존감(self-esteem)의 상실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한다. 사람들 사이의 유대 강화를 위해 고안된 소셜미디어가 사실은 그러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 심지어는 개인의 정서에 역기능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은 아이러니다.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에는 늘 빛과 어둠이 함께 존재한다. 빛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현명하게 수용하면 된다. 그림자를 걱정하는 사람은 다소간의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수용을 거부하면 될 일이다. 사람들에게 새로운 기술을 이용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는 것처럼 이용을 거부하고자 하는 욕구도 있음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그 거부가 불편함을 넘어 불이익으로 귀결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유비쿼터스’하게 ‘ON’하지 못한다고 해서 압박이나 불이익이 있어서는 안 된다.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 수용을 사회적으로 강제하는 것, 그것은 사회적인 폭력이다. 디지털 전체주의는 바람직하지 않다. ‘디지털 똘레랑스’를 진지하게 실천할 시기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