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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 농촌진흥청 방문: 유엔 FAO의 우리나라 초창기 토지 비옥도 사업 실무를 담당하다

기사승인 2017.09.12  22: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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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부 보람 찾는 언론학 교수] / 장원호 박사

(16)-2에서 계속:

유엔 FAO의 토양 비옥도 사업의 첫번째 업무는 사업에 필요한 차량을 수입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때 수입된 차량은 관리자 용으로 1963년식 토요다 크라운 왜건, 지방 출장용으로 토요다 랜드 크루셔라는 차 2대, 그리고 지역에 나누어 줄 90cc짜리 혼다 오토바이를 50대였습니다.

연식 미상의 토요다 크라운 왜건(구글 무료 이미지)
연식 미상의 토요다 랜드 크루셔(구글 무료 이미지)

1963년 봄은 나에게는 유엔 사업으로 너무도 바쁜 생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때 마침 우리 내외의 첫 아기인 혜경이가 태어났습니다. 3월 21일 수원의 한 산부인과에서 아내가 순산을 했는데, 어머님이 수원으로 오셔서 아내를 돌보았고, 나는 유엔 사업을 막 시작할 무렵이어서 아내외 갓 태어난 딸을 자주 보지 못했습니다. 

수입된 오토바이 50대 중 1호차는 내 전용 배정되어서 나는 오토바이로 출퇴근을 했고, 급하면 서울에도 오토바이를 타고 출장을 갔습니다. 나는 이 때 이미 2종 운전면허증을 가지고 있어서 지방 출장시는 유엔 표식이 그려진 준외교관 번호판을 단 자동차를 타고 갔습니다.

내가 직접 차를 몰고 업무를 보는 기간 동안 아슬아슬하게 자동차 사고를 면한 적이 많았습니다. 우리 사무실에 근무하는 외국인들도 크고 작은 자동차 사고를 여러 번 겪었습니다만, 1964년 12월에는 UN 행정관이 엄청 큰 교통사고를 내기도 했습니다.   

1964년 아가르왈라는 FAO 본부로 돌아가고 후임으로 스페인 계통 베세라 로렌스라는 행정관이 왔습니다. 그는 인정도 많고 능력 있는 행정가여서 같이 일하는 데 비교적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당시 유엔 사업운영계획서에 따르면, 우리는 사무장 1명, 사무직원 4명, 운전기사 4명을 채용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사무직원으로 서무, 경리, 용도(물품 담당) 관리 분야에 각 한 명 씩을 썼고, 운전기사는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을 썼습니다. 서무에는 오왕근 과장이 추천한 중앙대 출신 이모 씨, 경리에는 서울대 농대 경제학과를 나온 조경철, 그리고 용도에는 고대 경제과를 나보다 1년 먼저 나온 김모 씨를 시험을 거쳐 채용했습니다. 운전기사는 대한항공의 전신인 KNA의 사장 기사였던 이모 씨와 광주 비행장 건설 당시 전기 업무를 맡았던 3명을 채용해서 모든 스탭이 채워졌습니다. 나는 관리직으로서 베세라와 사무실을 옆에 두고 타자수, 비서 등을 데리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각 지방별로 토양 비옥도 조사를 위해 토양 샘플과 비료 시험을 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각 도 농사원에 많은 자금과 기자재를 내려보내고, 지방 농사원은 보고서를 작성해서 우리에게 보내면, 우리가 취합해서 이를 유엔에 제출했습니다. 모든 서류를 영어로 작성해야 해서 사무가 제법 복잡했습니만, 그런 대로 재미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외국인과 매일매일 같이 일을 하는 덕에 나의 영어 실력은 급속도로 발전하여 한미 연석회의의 공식 통역을 몇 번이나 맡을 정도가 됐습니다. 

유엔의 FAO(세계식량농업기구) 마크(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1964년 가을에 FAO의 국장급인 이그나티브라는 소련계 캐나다 국적의 기술자가 우리나라의 논농사 실태를 조사하기 출장을 와서 우리는 충청남도 논산을 시범 지구로 보여 주기로 했습니다. 김영섭 박사, 오왕근 박사 등이 이그나티프 박사와 통일호를 타고 대전으로 내려가고, 우리는 자동차로 내려가서 대전 역에서 같이 만나기로 일정을 정했습니다.  처음 운전면허를 가지면 자동차를 운전하고 싶은 욕심이 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나는 운전기사를 옆에 앉히고 내가 직접 운전하고 대전으로 향했습니다. 

경부 고속도로가 없던 시절. 서울에서 오산까지는 옛날부터 포장 도로였는데, 비가 조금씩 내리던 그 날 노면이 미끄러워서, 나는 나는 차를 그만 논에다 쑤셔박는 사고를 냈습니다. 다행히 근처 주민들이 삽을 들고 나와서 차를 건져 주었습니다. 나는 논산 출장비를 풀어서 푸짐한 점심값을 동네에 주고 급히 대전으로 향했습니다. 대전에 도착하자마자 세차를 하고 박사 일행을 맞아 소정의 출장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이그나티프 박사는 농업 기술자도 아닌 내가 제법 토양 비료에 대한 전문 지식을 가졌다고 놀라면서 나와 금방 친해졌습니다. 특히 그는 옛날 요정 방석집에서 따뜻하게 데운 정종을 마시는 것을 아주 좋아해서 한국 체류 기간 중 여러 번 자리를 같이 했는데 이일을 두고두고 고마워했습니다.

그가 한국을 떠날 때 비행장으로 내가 차로 모시고 가면서 현재 미국 유학 수속을 하고 있다고 했더니, 이그나티프 박사가 잘 아는 유엔 사무차장급 친구에게 자기가 아주 유능한 한국 청년을 아는데 미국 유학을 가려 한다고 추천장을 잘 써 주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덕에 나는 미국유학 서류에 유엔 사무차장의 '거창한' 추천장을 첨부할 수 있었고, 그것이 미국 대학 입학에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중장 정부 상급기관인 농림부는 별로 우리에게 간섭하는 일이 없었으나, 제일 큰 문제는 정부의 경제기획원으로부터 특별회계 예산에서 국내에 필요한 예산을 확보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초 사업 운영 계획서는 유엔과 경제기획원이 조인했지만, 환율이 변동되면서 처음에 예상했던 예산보다 더 달라는 우리의 요구가 쉽게 먹히지 않게 됐습니다. 강원도 지사를 지냈던 최각규 씨가 경제기획원 과장이고 나중에 국회의원을 지낸 이강두 씨가 그 밑에 주사로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나는 우리 연구소의 김병권 형, 채인식 형 등과 서울 출장을 자주 가서 예산 확보에 최선을 다한 끝에 원하는 만큼의 예산을  확보하게 됐습니다. 나중에 유엔 사업의 한국 대표인 김영섭 박사도 공을 크게 세웠다면서 고맙다고 치하해 주었습니다. 

더구나 김영섭 박사는 내가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는 것을 알고 틈틈이 격려의 말씀을 해 주었고, 막상 미국으로 떠날 때는 술을 좀처럼 마시지 않는 분이 나를 불러 송별 저녁 식사를 사주셨고, 2차로 수원 북문 근처의 맥주집으로 데려가기도 했습니다. 김 박사는 당시 서울농대의 원로 교수인 이충령 박사(국사학자 이병도 박사의 아드님)가 친구인데 이 분을 불러서 함께 술을 하면서 이 박사로부터 50년대 초반의 미국 유학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키가 작은 이충령 박사는 아르바이트를 할 것이 없어서 아이들 보는 베이비시터를 한 얘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베이비시터가 동양인이라 그런지 아이들이 너무 많이 울어서 울음을 달래지 못하고 아이들과 함께 운 적도 있다는 이 박사의 얘기가 가슴을 아프게 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에서 만날 유학생으로서의 고생을 어떻게든 넘겨야겠다는 각오를 굳게 했습니다. 

미주리대 명예교수 장원호 박사 reporter1@civicnews.com

<저작권자 © CIVICnews / 시빅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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