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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농촌진흥청 방문: 첫 직장 농사원(농촌진흥청 전신)에서 평생 배우자를 만나다

기사승인 2017.09.07  18:2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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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부 보람 찾는 언론학 교수] / 장원호 박사

미주리를 떠나 수원에 있는 아주대학의 석좌교수로 잠시 생활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1998년 7월 31일 농촌진흥청의 정무남 청장이 진흥청을 방문해 달라고 초청했습니다. 농촌진흥청은 우리 부부가 미국에 오기 전까지 같이 근무했던 곳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진흥원 정 총장은 미주리대학교 대학원 학생 시절에 우리와 가깝게 지냈던 분인데, 우리 내외가 결혼하고 같이 근무한 농촌진흥청 바로 그 곳의 기관장이 된 것입니다. 진흥청이 내 옛 직장이란 것을 잘 아는 정 총장이 한국에 있는 동안에 옛날을 생각해서 한 번 방문해 달라고 고맙게도 우리 내외를 초청한 것입니다. 

진흥청에 도착하니, 우리 내외가 근무했던 본관 건물은 우리가 떠난 1966년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으며, 내가 마지막 근무했던 식물환경연구소는 농업기술원으로 크게 확대돼 있었습니다. 기술원장은 내 동생 원흥이와 경복고 동기인 이원종 박사였으며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농촌진흥청을 돌아보고 유서 깊은 음식점 '푸른 지대'에 가서 점심 대접을 잘 받았습니다. 그 후 서울로 돌아와서 지난날 이곳에서 일어난 일들을 다시 정리해 보았습니다.

1998년 농촌진흥청 방문 기념 사진(사진: 장원호 박사 제공).

공무원 생활을 처음 시작한 곳은 대구에 있는 경상북도 농사원(農事院, 농촌진흥청의 전신)이었습니다. 이곳에서 5개월 정도 근무하다가 1961년에 수원에 있는 농사원 본부 총무과 인사계 차석인 행정 주사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수원 본부에는 구내식당과 직원들이 하숙할 수 있는 방 몇 개로 구성된 ‘구락부’가 있었습니다. 농사원 총무과에서 오래 근무하다 퇴직한 분이 구락부를 맡아서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수원에서 ‘구락부’ 신세를 지면서 외로운 총각 생활을 하니, 대구에서 보낸 시절이 생각났습니다. 그중에서도 단 한 번 같이 영화를 본 김영숙 양을 다시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 양은 농사원 대구 분원에서 같이 근무하다가 만났습니다. 마침 농사원 본부가 주최하는 4H 경진대회가 열릴 때여서 김 양에게 전화로 경진대회에 오면 만나자고 했고, 결국 경진대회 기간 중 같이 점심을 먹으면서 우리는 아주 친근해졌습니다. 

당시는 동생 원흥이가 군복무를 마치고 서울대에 복학할 무렵이었고, 나도 공무원으로 자리가 잡혀갈 시기였기 때문에, 부모님은 안정된 생활을 위하여 결혼할 것을 독촉하기 시작하면서 여러 군데에서 들어온 선을 보자고 할 때였습니다. 나는 그때까지도 선볼 생각이 별로 없어서 부모님의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나는 미국 유학을 가고 싶다는 오랜 꿈을 꾸고 있었고, 혼자 구락부에 있으니 하루도 빠지는 날이 없이 동료들과 통행금지 시간까지 술집으로만 돌아다니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결혼해서 돈을 좀 벌어야 유학을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부모님 도움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이제는 공무원까지 되었는데, 더 이상 부모님 도움을 받아 유학을 간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이 권하는 결혼을 서서히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만나게 된 게 김 양이었던 것입니다.

1962년 연초에 대구 출장으로 경북 농사원을 들렀다가 그 날 저녁 김 양을 다시 만났습니다. 우리는 저녁을 먹으면서 내가 결혼 안 할거냐고 물었더니 의외로 그쪽도 관심이 컸습니다. 내가 24세였고, 김 양이 나와 동갑이었으니, 나보다 그 쪽이 더 다급한 상황이었고, 결혼에 대해서도 상당히 생각을 많이 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당시 만해도 본인들이 직접 ‘프로포즈’하는 예는 드물었습니다. 대강 두 사람의 마음이 일치돼서 결혼을 염두에 두고 만나고 있다면 그 다음 절차는 부모님께 넘기는 것이 당연한 예의였습니다. 나는 김 양의 결혼 의사를 확인한 대구 출장에서 돌아오자마자 부모님께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부모님은 너무도 반가워 하셨습니다. 

그 다음 달인 추운 2월 어느 날 처가 집에서 대표가 내 부모가 사시는 충북 음성으로 온다고 했고, 내가 음성에 가서 이들을 접견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데, 그만 예정된 그날에 나는 예비병 훈련 소집에 걸렸습니다. 4월 혁명 이후 예비병 소집을 기피하면 공무원은 파면될 정도로 법이 엄격했습니다. 나는 육군 일등병 계급으로 충북 증평에 있는 37사단에 들어가 1주일 동안 고된 훈련을 받고 왔습니다. 그 사이 대구에서 당시 경북여고 교장 부인인 처가 친척 분과 김 양의 어머니가 음성을 다녀갔는데, 양가가 모두 만족스러워했다고 합니다. 수원 구락부 생활에 지친 나는 될 수 있으면 빨리 결혼하자고 제안했고, 양가 어른 상면 3개월 후인 1962년 5월 6일로 결혼 날짜가 잡혔습니다. 그리고 양가가 인륜지대사를 준비하느라 모두 바쁘게 움직였습니다.

형식을 싫어하는 나는 약혼식은 생략하고 대구 처가에서 결혼식 절차를 정해주면 따라 하겠다고 했습니다. 성공회 옆에 살면서 2대째 성공회 신자인 김 양은 성공회에서 식을 올리기를 바랐는데, 내가 성공회 신자가 아닌 것이 문제였습니다. 신자가 되겠다고 해도 교리 공부 등 절차를 남은 3개월 안에 밟을 수도 없었고 그럴 시간도 없었습니다. 내가 성공회 세례를 받을 형편은 못 되자, 결국 옛날 대구 식물원 자리에 있는 제일예식장이란 일반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리게됐습니다.

함은 이제는 고인이 된 친구 권영철이 가지고 갔습니다. 고향이나 서울이 아닌 대구에서 하는 결혼식이라 많은 친구를 초청할 수 없었습니다. 국민학교 친구는 김의식, 중학교 친구는 유만조, 대학 친구는 권영철 등이 결혼식에 참석했으며, '86회' 회원(논산훈련소 8중대 6소대 소속 훈련병 동기들과의 모임) 다섯 명도 결혼식 참석차 대구로 내려왔습니다. 86회 회원들은 당시 교통부에 근무하던 박해용이 주선하여 통일호를 타고 왔으며, 신혼여행은 부산 해운대에 있는 교통부 소속 철도 관광호텔로 갔는데, 86회 회원들은 신혼여행지에까지 따라 와서 짓궂게 놀았습니다. 당시에도 25세 결혼은 매우 빠른 편이었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아직 대학 졸업을 못했거나 군에 가 있을 때였지만, 나는 결혼하고 수원의 고등동에 셋방을 얻어 신혼살림을 차렸습니다. (16)-2에서 계속.

미주리대 명예교수 장원호 박사 reporter1@civicnews.com

<저작권자 © CIVICnews / 시빅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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