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에서 인권보호로...탈권위주의 시대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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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질에서 인권보호로...탈권위주의 시대의 조건
  • 편집위원 양혜승
  • 승인 2017.09.04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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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위원 양혜승
편집위원 양혜승

아침 등굣길에 나섰던 딸아이가 헐레벌떡 현관문을 다시 열고 들어온다. 책상 위에 두었던 명찰을 가슴에 달고 부리나케 다시 현관문을 나선다. 자주 반복되다보니 이젠 몹시 익숙해진 아침 풍경이다. 아마 중고생을 둔 다른 가정들에서도 그리 생소하지 않을 모습이다.

명찰 혹은 이름표. 중고생이라면 당연히 착용해야 하는 그것. 딸아이의 설명을 들으니 명찰을 착용하지 않거나 지각을 하면 교문 앞에서 이름이 적힌다고 한다. 그런 식으로 이름이 세 번 적히면 토요일에 학교에 나와 정신교육을 받고 학교 대청소를 해야 한다고 한다. 학생 인권이 강조되는 요즘에야 정신교육에서 끝나지만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오리걸음과 같은 극기훈련까지 받았다고도 한다. 물론 학교마다 처벌의 수준은 다를 테지만 우리 사회에서 중고생의 명찰 착용은 강력한 의무가 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명찰은 이름을 인식하고 부르기 위한 도구다. 따라서 교사가 학생들의 이름을 외우게 되면 명찰의 기능은 사라진다고 봐야 한다. 물론 한 교사가 전교 모든 학생의 이름을 다 외울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명찰은 교사가 학생의 이름을 부르는 데 도움을 주는 도구로 기능할 수 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중고등학생의 명찰 부착 필요성을 그런 이유에서 찾는다. 명찰 착용이 뭐 그리 어려운 일이냐고, 중고생 시절은 그런 정도의 의무를 감당하는 것이 마땅한 시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볼 일이다. 학생을 호명하는 데 도움을 주는 도구를 착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학생을 처벌하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지. 교사가 학생들의 이름을 다 외우지 못했다면, 그래서 학생들의 이름을 부를 수 없다면, 이름을 불러주지 못한 학생들에게 미안해해야 마땅한 일이다. 돌려 말하자면 이름을 기꺼이 밝히고 명찰을 착용해준 학생들에게 고마워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도 그 고마워해야 마땅한 일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벌을 가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감시와 처벌>이라는 책에서 현대사회의 규율이 어떻게 인간을 통제하고 지배하는지를 통찰했다. 군대나 감옥 뿐만 아니라 학교나 공장 등의 공간이 이른바 도덕과 상식이라는 논리를 바탕으로 이에 따르지 않는 개인들을 처벌하고 배제하는 구조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미셸 푸코의 통찰력은 병영식 전체주의 문화와 권위주의 문화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는 더욱 큰 시사점을 던진다. 어쩌면 중고생의 명찰은 통제의 편의성과 획일화를 우선시하는 병영식 전체주의의 잔재일 수 있다. 윗사람과 아랫사람을 구분하고 명령과 복종을 당연시하는 권위주의 문화의 발현일 수도 있다. 윗사람의 아랫사람에 대한 배려는 칭송받아 마땅한 것이 되고, 아랫사람의 윗사람에 대한 배려는 당연한 의무가 되는 문화 말이다.

미국이나 유럽의 중고생들이 명찰을 차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우리 사회의 중고생들이 명찰을 차고 있어서 우리의 교육이 그들보다 더 나은 점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다. 명찰의 부착이 교육적 차원에서 훨씬 더 나은 결과를 낳는다면 초등학생에게까지 확대하지 않는 이유는 또 무언인지도 알 길이 없다.

다행히 우리 사회에서 권위주의 타파 혹은 탈권위주의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시대적인 흐름이고 바람직한 변화다. 사회의 전 영역에서 ‘갑질’에 대한 각성과 손질이 뒤따르고 있는 것도 궤를 같이하는 일이다. ‘강한 자’가 ‘높은 자’가 되고 ‘약한 자’가 ‘낮은 자’가 되는, 그래서 전자가 후자를 무시하고 착취하는 갑질이야말로 권위주의의 가장 비열하고 졸렬한 발로일 테니 말이다.

중고생들에게 명찰을 달게 하는 것마저도 갑질이라는 비약은 아니다. 그저 학생들의 가슴에 부착된 명찰이 우리 사회 권위주의 문화의 일면이 아닐까 하는 단상일 뿐이다. 탈권위주의 시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듯 여겨져 온 도덕과 상식에 대한 점검에서부터 비롯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감시와 처벌>에서 미셸 푸코가 던지는 궁극적인 질문은 우리가 도덕이나 상식이라고 믿는 것들이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구축된 것인가 하는 회의일 것이다. 중고생의 명찰은 우리가 한 번쯤 시도해보아야 할 비판적 고민의 작은 사례일 뿐이다.

너무나 익숙해진 도덕과 상식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기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탈권위주의 시대는 현실에 대한 비판적 고민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그리고 그 비판적 고민은 인권이라는 진리를 근간으로 해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그 보편타당한 진리.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성과 권리에 있어서 평등하다’고 규정한 세계인권선언의 첫 번째 조항은 그 보편타당한 진리를 그저 거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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