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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와 MBC의 일그러진 자화상...‘공범자들’ 오욕 벗나

기사승인 2017.08.29  21: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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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투리시사인문⑨ KBS·MBC 총파업으로 되돌아보는 언론 투쟁의 역사

편집국장 강동수

1.

요즘 <공범자들>이란 영화가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미처 보지 않아서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서 자행된 방송 장악 과정을 다룬 다큐 영화라고 들었다. 그 영화는 정권의 방송 장악에 저항하다 좌천당하고 해직당한 기자와 PD들의 삶, 좌절하고 상처 입은 언론인들의 자화상도 담고 있다고 한다.

이 영화는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 보도로 MB 정부가 큰 타격을 입은 후 본격적인 언론 장악이 시작된 과정을 고발하고 있다고. 첫 타깃이 된 KBS가 권력에 의해 점차 무너지고, 2010년 ‘4대강 사업’의 실체를 고발한 MBC도 점령당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결국 '방송 검열'이라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으면서, 더 이상 공영방송이 아닌 권력의 홍보 기지로 전락한 KBS와 MBC의 처참한 모습도 그려낸다고 한다. 뿐만이 아니다. 2014년 세월호 참사의 오보와 2016년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의 진실마저 은폐하려 한 과정도 드러내고 있다고.

다큐멘터리 영화임에도 엊그제 15만 관객을 넘어섰다고 한다. 이 영화를 만든 최승호 감독은 한때 MBC의 간판 고발 시사 프로그램이었던 <PD수첩>을 제작하면서 ‘황우석 사건’을 터트렸고 이른바 ‘광우병 파동’으로 해직당한 후 한국 언론의 일그러진 모습을 꾸준히 취재 보도하거나 영화로 만들어 온 사람이다.

그런데 그 영화의 내용이 지금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다. KBS와 MBC 사원들이 지금 지난 시대의 방송 적폐를 청산하자며 제작 거부 투쟁을 벌이고 있다.

KBS와 MBC 노조가 경영진 퇴진을 요구하며 다음 달 초 총파업에 나서겠다고 밝히고 있다. 양대 공영방송 노조의 연대 총파업 사태가 벌어지게 된 것은 2012년 이후 5년 만이다. KBS노조원들은 공정 방송 쟁취와 고대영 사장, 이인호 이사장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고 한다. MBC 노조도 김장겸 사장 등 경영진 교체를 요구하며 총파업 찬반 투표를 거친 결과 압도적으로 가결됐다. MBC 기자·PD·아나운서 등 350여 명이 ‘블랙리스트’와 제작 자율성 침해에 항의하며 제작 거부에 나선 상태다. 벌써 일부 방송이 차질을 빚기도 했다.

글쎄, KBS와 MBC 노조원들의 파업 투쟁을 둘러싸고 이런 저런 논란이 있기는 하다. 일부 보수세력은 이게 문재인 정권의 우회적 방송 장악 시도가 아니냐고 의구심에 찬 시선을 보내고 있다. 어떤 이들은 “그동안 가만있다가 정권이 바뀌니까 이제야 투쟁을 벌이느냐”고 탐탁찮아 하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이를테면, 광복되고 나서 3·1 운동 벌이는 격이 아니냐는 것. 하지만 이명박, 박근혜 정권을 거치면서 방송 장악 논란이 끊임없이 일었고, 거기에 저항하던 언론인들이 숱하게 해직·좌천당했고 보면, 해당 방송의 언론인들만 탓할 노릇도 못 된다.

 

2.

언제나 그랬듯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언론의 역사부터 먼저 되짚어 보기로 하자.

신문이라는 형식이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건 서양에선 이미 로마시대였다고 한다. 로마공화국시대(기원전 510∼31)의 ‘악타 푸블리카(Acta Publica)’라는 관보 성격의 필사신문(筆寫新聞)이 그것. 로마 제정시대(기원전 30∼서기 395)에도 국정 전반에 대한 결의사항 등을 석고판에 문자로 새겨 시민들에게 읽히게 했던 ‘악타 세나투스(Acta Senatus)’나 ‘악타 듀르나 포풀리 로마니(Acta Diurna Populi Romani)’가 성행했다고.

로마 원로원의 의사록인 'Acta Senatus'(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중세시대에도 필사신문이 유행했다가 15세기에 널리 퍼진 인쇄술의 힘을 입어 최초의 부정기 인쇄신문인 독일의 ‘플루크블라트(Flugblatt)’가 나타났다. 16세기엔 인쇄술이 더욱 발달되고 동서의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정기인쇄 신문(주간)이 1536년에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 나왔고, 점차 유럽 각국으로 확산됐다. 17, 18세기에 들어오면서 우편제도가 발달하고 신문기업의 대규모화 및 근대화, 뉴스 전달의 신속성이 이루어지는 한편, 자유·평등사상과 시민사회가 대두함에 따라, 주간신문은 마침내 일간신문으로 바뀌면서 진정한 의미의 근대적 신문이 발간됐다. 세계 최초의 일간신문은 독일의 라이프치히에서 1660년에 창간된 ‘라이프치거 자이퉁 (Leipziger Zeitung)’으로 알려져 있다.

비정기적 인쇄신문의 일종인 Flugblatt(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동양에서도 중국의 한·당 시대부터 중앙과 지방 행정 소통수단으로 ‘저보(邸報)’라는 신문 형태의 인쇄물이 발행됐다.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시대 비슷한 성격의 관보인 ‘조보(朝報’가 발행됐는데, 관리들을 위한 일종의 조간신문이었던 셈. 우리나라의 근대 신문의 효시는 다들 알다시피 1883년(고종 20) 발간한 ‘한성순보(漢城旬報)’이다. 그렇게 보면 우리 근대 언론은 134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후 ‘독립신문’, ‘황성신문’을 비롯한 숱한 언론이 명멸하면서 오늘날 신문 산업의 체계가 다져진 것.

한성순보는 대한제국의 인쇄소에 해당하는 박문국에서 발행했다. 정부가 발행 주체이기 때문에 최초의 신문이 아니라고 보는 시각도 있으나 신문을 만들 수 있는 자본과 기술이 당시로서는 정부밖에 없었기 때문에 관 주도로 신문이 발행되 것이다(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방송는 물론 한참 뒤에 등장했다. 라디오의 발명은 마르코니(Marconi, M.G.)의 무선통신 발명에서 시작됐다고 알려져 있다. 무선통신의 발명을 시작으로, 소리를 전기신호로 바꾸는 마이크로폰 개발에 따라 전파방송의 가능성이 열렸으며 1906년 ‘라디오의 아버지’라 불리는 미국의 드포리스트(Lee DeForest)가 신호를 증폭하고 전송하는 3극 진공관(audion tube)을 발명한 이후부터 라디오 방송이 가능해졌다.

정규 라디오 방송은 1920년 11월 웨스팅하우스사의 KDKA국(피츠버그)이 개국해 제29대 하딩 미국 대통령 선거일을 기해 선거 결과 속보를 방송한 것이 시초라고. 광고방송을 하는 방송국의 시초는 1922년 개국한 WEAF국. 영국 BBC는 1922년에 설립돼 최초의 뉴스 프로그램 방송을 개시했고, 프랑스는 1921년, 독일은 1923년 방송이 개시됐다.

미국 역사 박물관에 전시 중인 세계 최초 방송국 KDKA의 마이크(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우리나라는 1925년 최초의 무선방송시험을 실시했고 최초의 정규 라디오 방송은 1927년 2월 16일 사단법인 경성방송국(JODK)이 출력 1kW, 주파수 690kHz로 개국하면서 시작됐다. 일제 강점기이긴 했지만 미국과 시차가 7년밖에 나지 않았고 세계 6번째의 방송 개시 국가였다니 의외의 대목이다.

일본 도코 방송국의 호출부호가 JOAK였으며, 오사카 방송국이 JOBK, 나고야 방송국이 JOCK, 경성방송국이 JODK였다. 즉 경성방송국은 일본의 4번째 지방 방송국이란 의미였다(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세계 최초로 본격적인 TV 방송을 시작한 나라는 영국이다. 1929년 9월 30일 영국의 BBC 방송이 최초로 실험적인 TV 방송을 했고, 1930년대에 들면서 수상기인 텔레바이저의 보급으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방영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본격적인 텔레비전의 시대가 개막됐다. 세계 최초의 컬러 TV 방송은 1951년에 미국에서 시작됐다.

한국에서는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이자 상업방송인 HLKZ-TV가 1956년 5월 12일에 발족했다. 카메라 2대로 출발한 이 방송은 하루 2시간씩 방송했다. 가시청 지역은 서울을 중심으로 16∼24km였는데, 개국 초에는 시내 주요 상점에서는 가두 텔레비전 수상기를 설치해 행인들이 걸음을 멈추고 목을 빼 방송을 지켜봤다고.

국영방송인 KBS TV(서울텔레비전방송국)가 개국한 것은 1961년 12월 31일. 뒤이어 1964년 12월 7일 민간 상업방송인 TBC TV(동양텔레비전방송주식회사)의 개국과 1969년 8월 8일 MBC TV(한국문화방송주식회사)의 개국으로 한국 텔레비전방송은 삼국시대를 맞았다.

그러다가 1980년 12월 전두환 정권의 언론 통폐합 조치에 따라 공영화(公營化)로 3개 방송사가 통폐합됐다. 컬러시대가 개막한 것도 이때의 일이다. 1991년엔 서울방송(SBS)이 개국했고, 1995년에는 부산·대구·대전·광주·인천 등 5대 광역시에 지역 민간방송이 개설돼 운영되고 있다.

 

3.

언론사를 일별하자니, ‘최초’란 단어가 계속 튀어나와 뭔가 딱딱하고 재미가 없어졌다. 어쨌거나, 언론의 역사만큼이나 권력이 언론을 통제하고 지배하려고 시도한 역사 또한 길다. 역사상 언론 탄압이라면 맨 처음 떠오르는 단어가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일 터다. 글쎄, 그 무렵 유학자의 역할을 요즘의 저널리스트에 그대로 대입하기엔 무리가 있겠지만, ‘예(禮)’와 ‘인(仁)’의 이념을 들이대 당대의 정치 권력을 비판한 삐딱한 존재가 유자라는 무리였것다. 그러니 패자(霸者)인 시황제에겐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을 터다.

시황제 34년(BC 213년) 전국의 유생들이 진나라에서 실시하는 중앙집권적 군현제를 반대하고 봉건제 부활을 주장했다. 승상 이사(李斯)는 차제에 사적인 학문으로 정치를 비판하는 일체의 행동을 근본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꼭 필요한 의약, 복서, 종수(농업)에 관한 책과 진(秦)나라 역사서 외에는 모두 수거하여 불태워 없애 버리라고 진언했다. 시황제가 옳다구나 하고 이를 받아들인 건 당연한 조치. 이를 어기면 관노로 삼고, 현실 정치를 비방한 자는 족형(族刑)에 처한다는 포고령을 내렸다. 족형이란 3족을 멸하는 형벌.

이듬해(BC 212년) 불로장생약(不老長生藥)을 구한다는 노생(盧生)과 후생(侯生)이라는 방사(方士)가 많은 재물을 사취한 뒤 시황제의 부덕을 비난하며 도망을 치자, 시황제는 함양에 있는 유생을 체포해 460여 명을 구덩이에 생매장했다. 이것이 역사상 악명 높은 시황제의 분서갱유다.

우리나라에서도 언론 탄압이 있었다. 세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자신의 옹립에 공이 큰 신하들에게 높은 벼슬과 토지를 상으로 내렸다. 세조의 찬탈을 도운 공신들을 훈구파(勳舊派)라 불렀다는 건 잘 알려진 일이다. 훈구파의 우두머리인 한명회와 신숙주, 정인지 등 공신들이 수백 결의 과전과 수십 구의 노비를 하사받았다. 한명회는 800여 결을 받았다는데 1결이 요즘으로 쳐서 10마지기쯤 된다니, 8000마지기, 160만 평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그 후손들까지 토지를 세습해 떵떵거리자 유교적 이상주의로 무장한 신진 사류들이 이들을 비판하기를 마지않았다. 훈구-사림파의 갈등으로 빚어진 참사가 1498년(연산군 4)의 ‘무오사화(戊午史禍)’다.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다. 사림파의 정신적 지주인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성종 때 춘추관의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 훈구파 이극돈의 비행을 기록했다. 이 일로 이극돈은 깊은 원한을 품게 됐는데, 어느 날 사초에서 김일손이 세조의 왕위 찬탈 때의 일을 기록하면서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함께 실은 것을 발견했다. ‘의제’는 초나라의 마지막 왕으로 항우에게 죽음을 당한 인물. 김종직은 은연 중에 의제를 단종에, 세조를 항우에 비유했던 것. 이 사건을 접한 연산군은 골치 아픈 사림을 제거할 절호의 기회로 받아들여 사림파 김일손·권오복·이목·허반·권경유 등을 죽이는 대대적인 숙청을 펼쳤다. 죽은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했다. 흔히 조선시대의 사관을 요즘의 언론인에 비유하곤 하는데, 사관의 사초가 탄압의 빌미가 된 조선판 언론 탄압이랄까, 필화사건이 바로 무오사화였던 셈이다.

동서양을 통틀어 언론에 대한 탄압은 권력만 자행했던 건 아니었다. 마타도어에 휩쓸린 대중이 때로는 언론에 재갈을 물리려고 했던 적도 많다.

1960년대 초등학교 6학년 국어 교과서에 실린 '펜의 힘'이란 이야기.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런던의 한 광장에서 한 사나이가 "매국신문 데일리 메일을 불사르자!" 고 외치며 신문더미에 불을 붙였다. 군중들은 박수를 쳤다. 정부의 통제로 모든 언론이 불리한 전황에 침묵할 때 이 신문만 영국군의 패퇴 원인을 연일 보도했기 때문. 사장 노드클리프는 국민의 비난에 낙망했지만 진실 보도를 계속했다. 영국 정부는 결국 신문의 보도에 따라 병기를 개선해 승전했다.

하기야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MBC의 <PD수첩>이 황우석의 줄기세포 연구조작 사실을 보도했을 때 온 나라가 벌집 쑤신 듯했지 않았던가. 한쪽에선 그렇게 신뢰했던 한 과학자의 사기(?) 행각에 경악을 금치 못했던가 하면, 다른 쪽에선 언론이 한국 사회의 미래 먹거리를 마련하려고 불철주야, 말 그대로 ‘월화수목금금금’으로 연구 활동에 매진한 순정한 과학자를 중상모략했다고 펄쩍 뛰었고, 진실 공방에 나라 전체가 시끄러웠다. 결국은 <PD수첩>의 보도가 진실에 가까운 것으로 판명 났지만, 잘못된 ‘애국주의’를 신봉한 일부 국민은 음모론을 제기하며 황우석 박사를 낙마시킨 언론에 적대감을 감추지 않았던 터다.

 

4.

권력의 언론 탄압에 언론인들이라고 죽어지내기만 했던 건 아니다.

1970년대 박정희의 유신정권 아래서 언론인들은 보도의 자유를 위해 치열한 투쟁을 벌였다. 박정희 정권은 1971년 10월부터 유신 선언,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 전국비상계엄령 선포, 유신헌법 성립, 대통령긴급조치 1∼9호 발동 등 장기집권을 위한 강권 통치를 계속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회적 갈등이 야기됐고 대학가에서는 반정부, 반 장기집권 데모가 빈발했다. 그러나 언론에 대한 정부의 통제 때문에 이런 사건이 기사화 되지 못했다.

그 가운데 ‘동아일보’가 1974년 10월 24일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생들의 시위를 보도하자 편집국장과 관련 부장이 기관에 연행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동아일보' 기자들은 이에 항의해 외부 간섭 배제, 기관원 출입 거부, 언론인 불법 연행 거부 등을 결의하고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했다. 이를 계기로 정부 권력으로부터 언론자유를 수호하려는 언론계의 움직임이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동아일보'에 재갈을 물리려고 유신 정권이 취했던 수법은 세계 언론사상 희귀한 ‘광고탄압’이었다. 광고주들에게 압력을 가해 줄줄이 광고 해약을 시켰던 것. ‘동아일보’는 광고란을 백지로 둔 채 신문을 발행하면서 정권의 탄압에 맞섰다.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동아일보’에 성금을 내고 격려광고를 내는 등 ‘동아일보 탄압 사태’는 반 정권 투쟁으로 비화했다.

1974년 12월, 광고가 끊어진 상태에서 당시 동아일보는 신문 하단의 광고 지면을 빈 상태에서 자사 신동아 잡지 광고를 실어서 내보냈다(사진: 본지 독자 제공).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는 집으로 배달되던 '동아일보'의 백지 광고 지면과 뒤이어 채워진 국민의 격려 광고를 날마다 유심하게 읽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1974년 동아일보가 광고 단절로 고생하자, 시민들이 격려 문구를 넣은 개인적 광고를 사비로 내는 일이 벌어졌다. 이를 격려광고라 불렀다(사진: 본지 독자 제공).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첫 광고를 시작으로 장준하, 문동환 등 지식인의 지지 광고도 끊이지 않고 계속됐고, 고은 시인은 <동아일보에 붙이는 노래>를 싣기도 했다.

"우리는 알고 있노라 동아가 우리의 것임을/우리나라의 겨울 산 능선과 벌판이/우리의 것임을 알고 있으며/어느 시대의 권좌가 우리의 것이 아닐지라도/동아는 우리의 것임을 알고 있으며/동아가 동아 이상의 것임을 알고 있노라/동아의 취재자는 우리 자신이며/동아의 편집자는 우리 자신이며/동아의 텅 빈 광고야말로 우리 자신의 아우성임을 알고 있노라……"

이런 상황이 오래 끌자 1975년 3월 12일 ‘동아일보’ 기자들은 신문 제작 거부 농성에 들어갔다. 결국 권력에 굴복한 경영진은 3월 17일 보급소 직원 등 폭력배 200여 명을 동원, 농성 중인 기자들을 강제 해산시키고 주도적인 기자 163명을 축출했다. 기자들은 이에 맞서 ‘동아자유언론실행위원회’를 결성했고 강제 축출된 기자 163명 가운데 134명이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를 결성, 언론자유수호운동을 계속해 나갔다.

이 같은 움직임에 ‘조선일보’ 기자들도 동참했다. 1975년 3월 6일 ‘조선일보’ 기자들은 “진실에 투철해야 하는 기자로서의 열과 성을 다해 언론자유에 도전하는 외부 권력과의 투쟁은 물론 언론 내부의 안이한 패배주의와도 감연히 싸우려 한다”는 요지의 선언문을 채택하고 신문제작 거부를 단행하기로 결의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경영진은 3차에 걸쳐 주도적인 기자 33명을 파면 또는 해임(1명은 재입사)시키는 등의 조치를 통해 신문제작 거부 농성을 6일 만에 강제 해산시켰다. 강제 축출된 ‘조선일보’ 기자들도 ‘조선언론자유수호투쟁위원회’(조선투위)를 결성, 지속적인 언론자유수호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글쎄, 한때의 대표적 야당지였던 '동아일보'가 오늘날 대표적인 보수지로 바뀐 것을 지켜보자면 상전벽해랄까, 40년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되는 건 나 혼자 만의 느낌일까.

5공 이후에도 언론의 수난은 계속됐다. 언론 강제 통폐합 조치가 일어났고 언론은 ‘땡전뉴스’를 보도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기도 했다. 길게 이야기하자면 한정이 없지만, 어쨌든 한국 언론의 역사는 피와 눈물과 땀의 투쟁사였던 셈이다.

 

5.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지금 지난 보수 정권 동안 생채기를 입은 한국 언론, 특히 공영 방송의 제 자리 찾기가 바야흐로 시작되고 있다. 공영방송, 특히 MBC에서 일어났던 기막힌 일들도 새 나오고 있다.

숱한 프로그램에서 출연자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출연 통제를 했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다. 세월호 사건이나 박근혜 정권의 국정 농단 사건에 대해서도 보도 통제가 잇따랐다고도 한다. 이를테면 세월호만 해도 청와대의 부실 대응 비판 기사를 빼라거나 실종자 유가족의 시위를 보도하지 말라거나, 단식농성 중인 세월호 유가족을 비난하는 기사를 쓰라거나 했고, 지난해에도 촛불집회를 폄하하고 태극기 집회를 미화하라거나 하는…….

이에 항의했다는 이유로 수많은 기자들과 PD들이 해고와 좌천을 당했다는 이야기는 앞에서도 했지만, 어떤 기자는 스케이트장 관리 업무가 맡겨지기도 했다고 한다. 가장 압권은 이른바 ‘워터게이트’ 사건. 파업 현장에서 혼자 빠져 나간 후 8시 뉴스 앵커를 맡는 등 경영진의 총애(?)를 받았던 한 여성 아나운서는 화장실에서 물을 틀어놓고 양치질을 하다가 “물을 잠그고 양치질 하라”는 선배 기자의 지적을 받고 고위 간부에게 쪼르르 달려가 고자질했던 모양이다. 선배 기자가 다음날 출근했더니 회사가 난리가 났다고. 이 사건(?)에 대한 경위서를 써야 했고 진상조사단까지 꾸려졌다고 한다. 결국 이 기자는 인사 때 좌천됐다고 한다. 이 기자는 자신의 좌천을 일러 수돗물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 해서 ‘워터게이트’로 불렀다나.

글쎄 이런 일을 보고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기자 생활 30년을 한 나 같은 사람도 온갖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이런 일은 듣도 보도 못했다. 이게 명색 한국 공영방송의 자화상이라니 듣고도 믿기지 않을 정도다.

어쨌든, 방송을 포함한 언론도 새 시대를 맞았으니 자정이 필요할 게다. 고인 물은 흘려보내고 새 물을 담을 때이기도 하다. 적폐를 청산하자면 인적 청산이 당연히 수반돼야 할 일이다. 그동안 권력에 굴종하거나 야합한 간부들은 물러날 일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정권의 향배에 따라 공영방송이 갈대처럼 흔들리지 않도록 제도적 독립성을 강화하는 일이다. 정권의 의사가 반영되는 통로라는 의심을 받아왔던 공영방송 이사회의 독립성 보장, 사장 선임 절차의 민주화를 포함해 공영방송 지배구조를 합리적으로 개선해야 할 터. 필요하다면 야당 추천 이사도 찬성해야 사장을 선출할 수 있는 특별다수제(재적 이사의 2/3 찬성) 도입 등도 적극 검토돼야 할 일이겠다. 방송사의 보도·제작·편성 자율성 확보를 위한 제도적 보완도 시급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일은 정권이 방송을 이용하지 않겠다는 자세를 확실히 보여주는 일이다.

역대 정권이 그랬듯 방송 장악에의 유혹을 뿌리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문재인 정권은 그런 유혹을 뿌리쳐야 할 터이다. 언론 개혁에 정권이 직접 개입하는 것도 극력 삼갈 일이다. 우선 언론인들이 스스로 자정에 나설 수 있도록 지켜보고 공정한 심판 노릇을 할 일이다. 그래야 정권이 바뀔 때마다 언론 개혁 운운 하는 소리가 더는 나오지 않을 게 아니겠는가.

BBC 이야기로 이 글을 마치겠다.

1982년 포클랜드 전쟁이 일어났다. 아르헨티나 갈티에리 군사정권과 마지막 식민지를 지키려는 영국의 공방전. BBC는 영국뿐만 아니라 아르헨티나의 입장도 공평하게 보도했다. 대처 수상은 “영국의 아내와 어머니가 얼마나 많은 남편과 자식을 잃었는데 적국 편을 드느냐”고 노발대발했다. BBC기자들은 대처에게 편지를 보냈다. “영국의 아내와 어머니처럼 아르헨티나의 아내와 어머니도 남편과 자식을 잃었소.”

"집권당은 언제든 그들의 노선을 지지하라고 압력을 넣었으나 이를 거부해 온 게 BBC의 역사였다." 이라크 전쟁 보도를 둘러싼 국익 논쟁이 치열하던 2003년 4월 당시 BBC 사장 그렉 다이크는 이렇게 외쳤다. 영국민이 BBC의 보도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믿는 이유다. 

편집국장 강동수 reporter1@civic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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