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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질된 백인 우월주의, 트럼프의 인종차별 발언은 계산된 언행인가

기사승인 2017.08.21  22: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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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편집위원 이처문

편집위원 이처문

미국 버지니아 주 샬러츠빌에서 발생한 백인 우월주의자들에 의한 유혈 사태를 계기로 인종차별 문제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백인 우월주의자들을 두둔한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이 무덤 속에서 잠자던 인종차별주의를 다시 깨웠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트럼프는 “(백인 우월주의자와 여기에 맞선 시위대) 양쪽 모두 책임이 있다”고 말해 비난 여론을 확산시킨 바 있다.

이 과정에서 트럼프에게 백인 우월주의자들을 심하게 비난하지 말라고 조언한 스티브 배넌 백악관 수석전략가가 결국 해임됐다. 극우 성향 매체 '브레이트바트' 설립자인 배넌은 트럼프 행정부의 대표적인 '백인 우월주의자'로 막후에서 극우·백인 우월주의 정책을 밀어붙인 인물. “대북 군사적 해법은 없다”는 그의 발언이 결정적 해임 사유라고 하지만 인종 문제의 휘발성을 잘 아는 백악관이 서둘러 배넌을 경질함으로써 진화에 나선 듯한 느낌도 든다.

사실 백인 우월주의를 지지하는 듯한 트럼프의 발언은 정치적 도박에 가깝다. 자신의 지지층인 백인들을 의식한 계산된 언행일 수도 있지만 인종차별에 대한 트라우마가 아직 가시지 않은 미국의 현실을 간과한 듯하다. 어쨌거나 트럼프의 발언을 계기로 뿌리 깊은 미국의 인종차별에 대한 경계의 목소리가 다시 힘을 얻고 있다.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인 오바마 대통령 때 흑백 갈등이 더 증폭되었다는 아이러니를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다(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미국의 인종적 편견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오바마 전 대통령의 사례다. 오바마는 케냐 출신 흑인 아버지와 미국 캔자스 주 출신 백인 어머니의 피가 섞인 혼혈인이다. 그런데도 미국인들은 오바마를 흑인이라고 한다. 백인에게 흑인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이면 흑인으로 간주하는 이른바 ‘한 방울의 법칙(one-drop rule)’ 때문.

가수 머라이어 캐리 역시 혼혈 문제로 시달렸다. 어머니는 아일랜드계 백인이고 아버지는 아프리카계 베네수엘라인과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혼혈이기에 자신을 혼혈이라고 했지만, 미국 사회는 ‘백인 아니면 흑인’이라는 양자택일을 요구했다. 결국 그는 자신을 흑인라고 선언함으로써 논쟁에서 스스로를 해방시켰다. 인종주의에 젖은 미국 사회를 향한 조롱도 담은 것이었다.

놀랍게도 ‘한 방울의 법칙’은 20세기에 등장했다. 강준만 교수가 쓴 <미국은 세계를 어떻게 훔쳤는가>에 그 배경이 상세하게 나온다. 1910년 테네시, 루이지애나주를 시작으로 텍사스, 아칸소, 미시시피, 노스캐롤라이나, 버지니아, 앨러바머, 조지아, 오클라호마주 등 10개 주가 1931년까지 한 방울의 법칙을 법으로 명시했다. 이처럼 시대를 역행하는 현상이 확산된 것은 20세기 초 미국을 강타한 ‘우생학 열풍’ 때문이었다.

영국의 유전학자 프랜시스 골턴(1822~1911)이 1865년 탄생시킨 우생학은 미국에서 1880년대에 새로운 과학으로 자리잡기 시작해 20세기 들어 혁신주의 물결을 타고 사회에 실제로 적용됐다. 1907년 인디애나주가 제정한 거세법(단종법)이 규정한 유전적 결함에는 정신박약, 간질, 정신분열, 범죄 성향, 성 문란, 음주벽, 장님까지 포함됐다. 마을에서 따돌림을 당하던 빈민 가정은 언제든 경찰의 갑작스런 방문을 받고 수용소로 보내질 수 있었다. 이런 거세법은 1931년에 30개 주에서 시행된다.

우생학의 신봉자였던 제26대 대통령(1901~1909) 시어도서 루스벨트는 유색인종의 높은 출생률에 주목하면서 산아제한을 옹호하는 중산층이 ‘인종적 자살’을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는 1913년 “언젠가 우리는 좋은 형질을 가진 시민은 자신의 좋은 혈통을 후대 세상에 남기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의무이며, 나쁜 형질을 가진 시민이 후손을 통해 나쁜 혈통을 이어가게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방울의 법칙을 지침으로 삼은 흑백 결혼금지법은 1967년 연방대법원의 위헌 판결로 사라졌지만 아직도 미국 사회에서 그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다.

오늘날 미국에서 인종적 순혈주의를 말한다는 건 우스운 일이다. 퓨 리서치 조사 결과, 2015년 미국에서 결혼한 사람들의 17%가 다른 인종과 결혼했다. 미국인들 가운데 그 누구도 드러내놓고 인종 간 결혼에 반대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2010년 기준으로 미국에서 백인이 아닌 사람과 결혼한 백인 여성의 비율은 전체의 2.1%, 백인 남성은 2.3%에 지나지 않는다. 당위와 현실의 괴리라고나 할까.

혼혈 아이들이 낮은 쪽 지위를 물려받는 것을 하이포디센트(hypodescent), 높은 쪽 지위를 물려받는 것을 하이퍼디센트(hyperdescent)라고 한다. 미국이 전자에 해당한다면 브라질은 후자에 해당한다. 브라질 역시 유럽인의 흰 피부를 지향하고 피부색에 따라 보이지 않는 사회적 위계질서가 작동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인종차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고 하겠다.

브라질에 이런 속담이 있다. “브라질 남자에게 지구상의 천국이란 흑인 여성을 하인으로 삼고, 백인 여성과 결혼해, 갈색 피부의 여성을 첩으로 두는 것이다.”

다인종 사회인 브라질의 인종적 스테레오타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속담이다. 브라질에는 높은 계층으로 올라가기 위한 ‘엠브랑케시멘토(embranquecimento)’라는 과정이 있다. 백인을 닮기 위한 이른바 ‘희게 만들기’다.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을 곧게 펴고, 희게 만들기 정식 교육도 받는다. 언어든 언어 외적이든 아프리카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피하고 문화적으로 다듬어 변화를 도모한다. 발음과 억양, 행동도 조심해야 한다.

브라질에는 높은 계층으로 올라가기 위한 ‘엠브랑케시멘토(embranquecimento)’라는 과정이 있다. 백인을 닮기 위한 이른바 ‘희게 만들기’다.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을 곧게 펴고, 희게 만들기 정식교육도 받는다(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피부색에 대한 고정관념은 브라질의 식민지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다. 브라질은 1830년 포르투갈에서 독립했지만 지배층 엘리트는 여전히 유럽인의 정체성을 띠고 있다. 신생국의 문화를 유럽인의 문화와 언어를 공식적으로 채택하면서 유럽적인 게 최상이다. 원주민의 유산과 이미지는 낭만적인 감성으로만 이용될 뿐 열등한 것으로 취급된다. 얼마나 유럽적인가에 따라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가 결정된다.

식민지 시절 포르투갈이 데려온 아프리카 노예의 후예들이나 인디오 원주민은 당연히 가장 낮은 계층에 속한다. 네그로(negro)는 흑인을 지칭하는 모욕적 표현이며, 네그라오(negrao)는 위협적인 흑인 남성을 가리킨다.

멕시코에서도 유럽인과 원주민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은 ‘이성적인 사람(메스티소)’을 뜻한다. ‘모레노’는 피부가 검은 사람이나 흑인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네그로’는 이성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지만 원주민인 인디오는 가능성 없다. 이 때문에 인디오 여성은 원주민보다는 네그로와, 인디오 남성은 원주민보다는 네그로 여성과 결혼하기를 희망한다. 모두가 결혼을 통해 사회적 지위가 올라가길 원하는 것이다.

중남미 유럽 이주민들은 남성이 절대 다수였기 때문에 원주민 인디오 여자와의 성적 접촉이 많았고, 이에 따라 혼혈인 ‘메스티소(mestizo)’가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게 됐다. 스페인어로 ‘혼혈’이라는 뜻을 지닌 메스티소는 오늘날 중남미를 대표하는 인종이다. 모든 혼혈을 통칭해 메스티소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좀 더 세분해 백인과 흑인간의 혼혈인은 ‘물라토(mulato)’, 인디오와 흑인간 혼혈인은 잠보(zambo)라고 한다.

중남미 유럽이주민들은 남성이 절대 다수였기 때문에 원주민 인디오 여자와의 성적 접촉이 많았고, 이에 따라 혼혈인 ‘메스티소(mestizo)’가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게 됐다. 스페인어로 ‘혼혈’이라는 뜻을 지닌 메스티소는 오늘날 중남미를 대표하는 인종이다(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여기서 작동하는 위계질서의 원리는 ‘피부색주의(Pigmentocracy)’. 혼혈이라도 유럽인과 닮았는지 아니면 인디오와 닮았는지에 따라 사회적 위치가 결정된다.

링컨이 미국의 노예해방을 선언한 게 1863년 1월 1일이었다. 이후 1865년 1월 연방의회가 노예제도를 전면 금지하는 수정헌법 13조를 통과시켰다. 적어도 미국에서 법률상으로 노예제도는 그 때부터 공식적인 종말을 고했다.

피부에 따라 사회적 위계질서가 작동하는 원리를 ‘피부색주의(Pigmentocracy)’라고 부른다. 남미에서 혼혈이라도 유럽인과 닮았는지 아니면 인디오와 닮았는지에 따라 사회적 위치가 결정된다(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하지만 그 뿌리가 얼마나 깊고 강한지 150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만하면 인종차별 문제가 고개를 든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인종차별은 인간에 대한 증오 범죄를 부추긴다는 점에서 문명사회가 척결해야할 악의 유산이라 하겠다. 세계를 호령하는 초강대국 미국이 언제쯤 인종차별의 늪에서 헤어날지 궁금하다.

편집위원 이처문 reporter1@civic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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