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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의 대국민 심리전과 뉴미디어 민주주의

기사승인 2017.08.14  21: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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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편집위원 이처문

편집위원 이처문

201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여론 조작에 개입한 국정원 댓글부대의 정체가 드러나면서 국민들이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국정원 적폐 청산 TF가 공개한 내용은 믿기 어려울 정도다. 국정원 심리전단이 운영한 4대 포털과 트위터 담당팀은 2012년 4월 이후 최대 30개에 이른다. 여기에서 활동한 보수 성향의 민간인들은 최대 3500개의 아이디를 사용했다고 한다. 2012년 한 해에만 쓴 돈이 30억 원.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국민들을 상대로 심리전을 펼쳤다는 얘기이니 기가 막힌다. 일부 야권 인사들은 이런 폐단을 밝혀내는 일조차 정치 보복이라고 주장하니 국민들의 정서와는 동떨어진 것 같다.

국민들의 지탄을 받고 있는 국정원의 심리전은 사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책략이다. 2차 세계대전 때 미국 OSS(전략첩보국) 수장을 지낸 윌리엄 조셉 도노반은 “선전이란 적을 관통하는 첫 번째 화살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심리전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다.

<초한지>나 <삼국지>에 등장하는 ‘사면초가(四面楚歌)’나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이겼다’는 이야기도 그렇다. 천하 통일을 도모하던 한나라 유방은 끝까지 저항하는 초나라 항우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심리전을 편다. 항복한 초나라 포로들을 동원해 항우가 농성 중이던 성 근처에서 초나라 노래를 부르게 한다. 사면에서 들려오는 고향의 노래를 들은 초나라 병사들은 고향 생각에 눈물을 흘리며 결국 유방에게 투항하고 만다. 항우는 자신의 부하들이 투항한 것을 알고 자결한다. 칼이나 활을 쓰지 않고 상대를 굴복시킨 심리전의 전형이다.

<삼국지>는 이미 컴퓨터 게임으로 출시됐으며, 그속의 영웅들은 모두 게임의 캐릭터가 됐다(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죽은 제갈량이 사마의를 물리친 이야기도 있다. 죽음이 임박한 촉나라 제갈량은 위나라의 사마의가 자신을 두려워한다는 점을 이용한다. 제갈량이 자신의 죽음을 감추기 위해 자신을 닮은 목각 인형을 만들어 내세운다. 사마의는 제갈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촉나라로 들이닥치지만 제갈량 인형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 퇴각하고 만다.

2차대전 당시 독일의 게슈타포(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여권에서 국정원의 댓글부대를 빗댄 나치의 게슈타포는 2차 세계대전 때 악명을 떨친 비밀 국가 경찰이다. 나치 체제 유지를 위해 국가가 위험이 있다고 판단하는 경우에는 법적 규제를 초월해 지체 없이 수사와 단속을 했다.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탄압, 자유주의자와 교회의 감시, 유대인의 추방과 학살, 지식인, 노동조합 운동가 등의 테러 행위와 강제 수용 등 잔학한 행위를 자행하면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러나 빈틈없는 정보력으로 무장한 이런 비밀 경찰 기구를 두고도 나치 독일은 노르망디에서 연합군의 심리전에 휘말려 패배하고 만다.

2차 세계대전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실제 장면(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연합군의 심리전 수단은 미국 할리우드 영화제작사에 부탁해 만든 풍선 탱크와 풍선 비행기. 연합군은 가짜 탱크를 프랑스 칼레와 가장 가까운 영국 해안에 배치했다. 연합군이 곧 칼레에 상륙할 것이라고 믿게 하려는 거였다. 작전은 적중했다. 가짜 탱크에 속은 히틀러는 독일군 주력 부대를 칼레에 배치한다. 이 틈을 노린 연합군은 노르망디에 대규모 병력을 상륙시킨다. 게다가 노르망디 상륙이 임박했을 때 히틀러는 잠을 자고 있었다. 그 누구도 감히 히틀러를 깨울 엄두를 내지 못해 뻔히 보고도 당했다는 것. 권력의 1인자에게 직언을 못하는 정보기관, 그리고 견제되지 않은 절대 권력의 말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국정원의 댓글부대가 지탄을 받고 있지만 사실 대표적인 뉴미디어인 인터넷과 SNS는 이미 선거운동의 주요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오마바 대통령이 SNS를 선거 캠페인에 잘 활용한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 확인된 도널드 트럼프의 돌풍도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모두 SNS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 처음 인터넷을 활용한 선거는 2002년 대통령 선거, 그리고 SNS가 본격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한 선거는 2010년 지방 선거다. 뉴미디어가 근본적으로 의회와 정당의 기능을 대체할 수는 없겠지만 SNS와 같은 쌍방향·다채널 특성을 잘 활용하면 대의(代議) 민주주의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다.

미국에서는 1998년 제시 벤추라 선거, 2004년 하워드 딘 선거가 뉴미디어를 활용한 선거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다. 벤추라는 프로레슬러로 미네소타주 주지사 선거에 제3당 후보로 출마하고도 인터넷을 통해 사람들을 투표장으로 모으는 데 성공해 당선됐다. 그는 온라인 공간을 통해 유권자들을 움직인 최초의 사례를 보여주었다.

제시 벤츄라는 유명 프로레슬러였다가 정치가로 변신했다(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제시 벤츄라는 유명 프로레슬러였다가 정치가로 변신하여 미네소타 주지사로 당선됐다(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2004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선 하워드 딘은 최초의 온라인 커뮤니티 서비스를 효과적으로 이용한 사례다. 비록 존 케리 후보에게 뒤져 중도하차했지만 딘은 온라인 커뮤니티 ‘미트업(MeetUp.com: 만남을 도와준다는 의미)’에서 유권자들을 효율적으로 모집하고 4000만 달러를 모금해 인터넷의 정치적 영향력을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오마바 대통령 역시 SNS를 선거 캠페인에 잘 활용한 대표적 정치인. 대선 때 오바마의 선거자금 대부분이 인터넷을 통한 소액 기부로 채워진 것만 봐도 그렇다.

하지만 이번에 드러난 국정원 댓글부대처럼 권력이 의도를 갖고 인터넷 여론 조작에 나설 경우 뉴미디어 민주주의는 심각하게 훼손되고 여론 역시 왜곡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의 헌신'이라는 원훈이 보이는 국정원 전경(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중앙정보부 시절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던 국정원은 이명박 정부때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無名)의 헌신’이라는 원훈을 내걸었다. 원훈대로라면 국민을 상대로 여론 조작을 펼친 게 자유와 진리를 향한 헌신이었다는 얘기다.

‘국정원이 왜 그랬을까’ 곰곰 생각해본다. 아마도 정권 교체에 대한 두려움, 또는 기득권 상실에 대한 공포가 작용한 게 아닐까 싶다. 어쩌면 정부와 다른 의견을 말하는 것 자체를 두려워했을지 모른다. 국민들이 한 쪽으로만 생각하고 말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뭉개는 짓이다.

민주주의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이런 식의 여론 조작 시도는 이번 기회에 쓰레기장에 버려야 하겠다. 프랑스 계몽주의를 대표하는 지식인 볼테르가 남긴 말이 떠오른다.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의 말할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내 목숨이라도 내어 놓겠다.”

편집위원 이처문 reporter1@civic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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