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나의 조국 한국과의 인연: 언론인 해외 연수와 한국 유학생 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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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나의 조국 한국과의 인연: 언론인 해외 연수와 한국 유학생 유치
  • 미주리대 명예교수 장원호 박사
  • 승인 2017.07.30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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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보람 찾는 언론학 교수] 한국 유학생과 한국 언론인을 미주리로 부르다 / 장원호

미주리 언론대학이 국제 기자 연수 프로그램을 시작한 것은 1920년대였습니다. 당시 학장으로 있었던 월터 윌리엄스 교수가 1920년 초에 중국의 북경, 남경, 상해와 일본을 두 번이나 여행한 것이 인연이 돼, 중국 언론계의 대부이며 1990년 작고할 때까지 대만에서 후학들을 보살핀 언론인 마성야(馬星野) 등이 1920년대에 미주리에 와서 공부하기 시작했던 것이 국제 연수 프로그램의 시초였습니다. 그러나 정식 외국 기자 연수 프로그램을 시작한 것은 2차 대전이 끝난 후부터였습니다.

1955년 미국 국무성의 기자 교환 교육 계획에 의해 18명의 외국인 방송 기자가 6개월 간 미주리대학에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 프로그램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자, 2차로 1957년 1월에 외국인 신문 관계자 10명을 다시 미주리에서 교육시키게 되었는데, 그 중에는 한국 언론인이 7명으로 가장 많았고, 파키스탄, 대만, 그리고 이란 기자들이 각각 한 명씩 선발되었습니다.

미주리 언론대학은 이 프로그램을 관장하기 위해, 캔자스 주 토피가(Topeka)에 있는 '캐피탈' 지의 일요판 편집장을 담당하던 뉴톤 타운센드를 조교수로 채용하여 이 프로그램을 전담 운영토록 했습니다.

타운센트 교수는 1948년에 미주리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마치고 토피카에 있는 위시번(Wishburn) 대학의 강사 겸 홍보실장 직을 수행하다가 그곳 캐피탈 지의 일요 편집장으로 옮겨 일하고 있었습니다. 타운센드 교수가 운영한 1957년 프로그램은 6개월 기간(24주)으로 진행됐으며, 첫 8주는 특수 학생으로 언론대학에 등록하여 정규 대학 강의를 듣게 했고, 다음 8주는 미국 중부 지역 신문사로 파견되어 실제로 신문 제작에 참여하게 했으며, 나머지 8주는 각자 미국 여행을 다니도록 짜여 있었습니다.

외국 언론인 연수를 일찍부터 시작한 미주리 대학은 1908년 언론대학 창설과 동시에 '컬럼비아 미주리언(Columbia Missourian)'이란 상업적 일간 신문을 창간했습니다.

컬럼비아 미주리언의 지면. 미주리언이 1908년부터 200년 동안 언론인을 양성하여 미국 언론계로 진출시켰기 때문에, 현재 뉴욕 타임즈, 워싱턴 포스트, ABC, CNN 등 미국의 모든 언론사에 미주리 출신이 없는 곳이 없다. 그래서 미주리 출신 언론인들은 '미주리 마피아'라고 불린다(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이 신문은 학생들을 위한 학교 신문이 아니라 컬럼비아 시민을 상대로 하는 상업적 지방 신문으로서 지금까지 발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주리 대학이 이 신문의 소유주는 아니며, 졸업생 지방 유지들로 구성된 이사회가 있고, 언론대학 학장이 발행인으로 되어있습니다. 편집국장을 비롯한 각 부장들은 언론대학 교수들이며, 학생들은 기자로 일하지만, 보수는 받지 않습니다. 다만 교육 과정에 따라 부여된 학점을 받습니다.

신문과 잡지를 전공하는 학생들은 이 신문사에서 기사 작성, 편집 등의 업무에 투입되고, 그 업무 성과 결과로 취득한 실습 학점을 얻지 않고서는 졸업이 아예 되지 않도록 이 대학 교육과정이 짜여 있습니다. 이와 같은 전통은 1908년 언론대학 창설 이후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습니다.

컬럼비아 미주리언은 독립 건물을 가질 정도로 제법 규모가 있으며, 교육과정과 연계하여 체계적으로 전문적인 언론인을 양성하는 미주리 언론대학의 부속 언론사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1957년 7명의 한국 언론인 첫 연수팀은 이 컬럼비아 미주리안 신문에서 두 달 동안 신문 제작을 배운 후, 각각 미국 중서부의 신문사로 파견되어 그곳에서 두 달 동안 기사와 칼럼을 썼습니다. 그들의 생생한 연수 기록이 아직도 이곳 대학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내가 이 대학으로 오기 전 이미 이곳에서 학위를 마친 한국 분이 여러 명 있었습니다. 박사 학위를 받은 분은 한양대에서 오랫동안 강의하다 작고한 장용 박사와 UCF(University of California at Fullerton)에서 교수로 재직하다가 은퇴한 고 선우동훈 박사가 있었습니다.

석사 학위를 받은 사람으로는 경희대의 고 한병구 교수와 서영희 교수, 이화여대의 윤희중 교수 등이며, 유일하게 광고학으로 학사 학위를 받은 사람이 대홍기획 이사와 한국광고협의회장 등을 지낸 국내 광고계의 원로 이병인 씨입니다.

1960년대에 학위를 마친 이들이 공부하는 동안 숱한 일화를 남겼다고 말로만 전해 들었을 뿐이며, 내가 미주리 대학에 부임하기 전의  일이었습니다. 내가 1972년 미주리 대학에 처음 도착했을 때, 나중에 성균관 대학 교수를 지낸 박기순 교수가 석사 과정 학생으로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부임 초기인지라, 나는 아직 석사 학위 학생의 논문을 지도할 수 있는 대학원 지도 교수 임명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샌더스 교수가 박 교수의 지도 교수가 됐고, 나는 심사위원이었습니다.

나는 석사 과정뿐만 아니라 박사 과정 학생을 지도할 수 있는 대학원 지도 교수 임명을 받은 후 한국 유학생을 미주리 언론대학으로 유치해서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뜻을 한국의 여러 대학에 전달했지만 별로 신청자가 없었습니다.

미국에 온 지 10여년 만에 서울에 갈 기회가 생겼습니다. 1974년 미국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미국 대학에서 강의하는 한국인 학자들로 조직된 재미 정치학자들의 학회가 결성되었고, 그 초대 회장에 당시 미주리 대학 정치학과 교수인 조순승 박사(김대중 대통령 시절 평민당 국회의원을 지냈음)가 선출되었습니다.

조 박사는 이 회의 조직 운영을 위해 나중에 한양대에서 교수 하다가 지금은 은퇴한 조창현 교수를 총무로 임명했고, 회원들에게 뉴스레터를 작성해서 배부하는 일을 맡겼습니다. 나는 정치학과 교수는 아니었지만 고대 정치학과 출신이란 점이 인연이 되어 이 학회에 아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 학회에 가입했고, 나중에는 회원 명단과 뉴스레터를 컴퓨터로 작성해서 발행하는 일을 맡기도 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미국에서 인문사회 계통을 공부하고 강의하는 사람들 중에 정치학자가 가장 많았고, 또 이들과 학연이 있는 사람들이 유신 정권 이후에 정부나 학계에서 활약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제1차 한미정치학자 공동회의가 1975년 5월 서울에서 열리게 되었고, 나는 이 학회의 정식 회원은 아니었지만 학회 발전에 기여한 공으로 이 학회의 첫 국제 세미나에 논문 발표자로 선정되어 서울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정치학을 강의하던 원로 교수들 중 강영훈 장군(후에 노태우 대통령 시절에 국무총리를 지냈음), 남창우 교수, 김종림 교수, 길영환 교수, 김유진 교수 등이 당시 국제 세미나에 함께 가게 되었으며, 우리들은 한국 정부의 특별 배려로 새로 지은 타워호텔에서 묵었습니다. 세미나가 끝나자, 정부는 산업 시찰로 전국 일주를 시켜주는 등 우리는 당시 한국 형편으로는 과도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약 1주일 간의 일정을 마치고 각자 개인 시간을 갖게 되었는데, 나는 고려대와 한양대학에서 특강을 했고, 10년 동안 못 만났던 정다운 친구들과 시간가는 줄 모르는 3주를 보내고 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때 서울에 머무르는 동안 아이오와에서 학위를 마치고 귀국한 한양대의 오진환 박사의 소개로 당시 합동통신에 근무하던 박영상 기자를 만났습니다. 나는 미주리 언론대학 유학생 1차 선발 대상자로 박 기자를 미주리로 데려가기로 하고, 수속을 진행했습니다. 그해 1975년 가을 박영상 기자는 합동통신을 그만두고 미주리로 유학을 왔습니다. 박 기자는 아이들이 세 명이나 되는 가장이었고, 별도의 장학금을 받지 못해 미국에 도착한 첫해에는 많은 고생을 했으나, 그 이듬 해부터는 나의 조교로 임명되어, 어렵지만 견딜 수 있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 후 박 기자의 아이들이 미국 학교에 적응을 잘 했고, 부인도 심심찮게 일거리를 얻을 수 있어서, 이 가족은 학위 취득 후 미국에 남아서 살아볼 생각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동양식품점을 인수하여 직접 운영하기도 했으며, 그 영향으로 고생도 많이 했고, 학위도 생각보다 늦게 마치게 되었습니다. 박영상 교수는 1983년에 귀국하여 한양대에서 교수를 하고 지금은 정년퇴직했습니다.

1975년 미주리 대학의 언론대학 석사 과정 프로그램 중 외국인 학생들을 위한 혁명적인 개혁이 이루어졌습니다. 원래 미주리 언론대학은 실무 교육을 중시했기 때문에 외국 학생들도 미국 학생들과 똑같이 신문, 방송, 잡지 등 매체에 근무하며 학점을 따야 하는 과목들이 필수 과목이었고, 모국어가 영어가 아닌 외국 학생들은 이 실습 과목들을 못 마치고 쫓겨 나기 십상이었으며, 한국 학생들도 그중 몇 명이 있었습니다. 미주리 언론대학의 석사 과정 개혁은 외국 학생들에게 예외적으로 매체에서 실습하는 과목 대신 이론 과목을 택할 수 있게 했고, 졸업 논문 대신에 학점으로 40 학점을 더 이수하면 졸업할 수 있는 문도 열어 놓은 것입니다

석사 과정 학생들이 매체에서 실습하는 일부 과목을 면제받는다는 것은 지금까지 전문직 기자 양성을 목표로 설립된 미주리 대학의 설립 이념에 반하는 일이어서 아무도 감히 입 밖에 내놓기 힘든 문제였습니다. 나는 외국 학생들이 미주리 대학의 언론대학 석사 과정에서 번번이 그 실습 과목 때문에 실패하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프로그램 개정안을 아직 초년병 교수인 내가 앞장설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미국 저널리즘 학계의 원로 중 원로인 존 메릴(John Merrill) 교수(작고)와 랄프 로벤스타인(Ralph Lowenstein) 교수를 앞세워사 밀고 나간 지 6개월만인 1975년 1월 21일 교수회의에서 'Plan C'라고 부르는 새로운 프로그램 개혁안을 통과시켰습니다. 통과와 동시에 메릴 교수가 주임 교수가 되었고, 나와 다른 두 명이 운영위원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고 존 메릴 교수. 메릴 교수는 특히 언론 윤리에 관한 명저를 다수 남겼다. 1977년 미주리 대학을 떠났다가 말년에 다시 미주리 언론대학 석좌교수로 와서 연구하다가 생을 마감했다(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이 프로그램이 시작되면서, 나는 한국 학생들을 좀더 과감히 유치할 수 있게 됐으며, 특히 이 프로그램 창설자였던 메릴 교수가 1977년에 미주리를 떠나자, 내가 그 프로그램의 주임교수가 되었습니다. 나는 이 프로그램이 없어진 1990년까지 주임교수로 활동하면서 한국 학생 뿐만 아니라 전 세계 200여 명 이상의 외국 학생들을 교육시켰습니다. 1990년 새로 개정된 과정에 이제 Plan C라는 프로그램은 없어졌지만,  '국제 언론 과정'이란 이름으로 이 Plan C와 비슷한 과정이 새로 만들어졌으며, 이 과정에서도 미국에서 기자 활동을 목표로 하지 않는 외국인 학생들에게 취재와 편집 등 언론 실무 과정을 면제해 주고 있습니다.

1979년 가을, 석사 과정에 박영상, 김경옥, 김정탁, 장원흥 등 4명이 있었고, 경희대 신문방송학과 이광재 교수가 교환교수로 왔습니다. 신문 역사를 전공한 이 교수는 이곳의 윌리엄 태프트 교수와 함께 1년 동안 미국 신문 역사를 연구했습니다.

당시 중앙일보 사회부 차장 이원달(작고) 씨가 중앙일보가 비용을 부담하는 조건으로 1년간 미주리에서 연수를 받게 해달라는 요청을 중앙일보 기자였던 석사 과정 학생 김정탁 교수(후에 성대 교수)를 통하여 받았습니다. 이를 계기로, 1957년 이후 중단되었던 한국 언론인 연수를 다시 시작해 보기로 했습니다.

이원달 기자는 서울 문리대 정치학과를 나온 후 중앙일보 1기로 입사, 사회부에 오래 있었으며 특히 법원 출입기자로 명성이 높았습니다. 그러나 미국 대학에서 처음부터 강의를 들을 만한 영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가을 첫 학기에는 IEP(Intensive English Program)라고 하는 집중 영어 교육 프로그램을 먼저 들어야 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미주리로 연수 온 한국 언론인 대부분이 거쳐야 하는 과정으로 한국 언론인들은 이를 “미주리 영문과”라고 불렀습니다.

이 '미주리 영문과' 과정은 매우 집중적이어서 하루에 5시간씩 강의를 들어야 하고, 또 5시간 이상은 걸려야 겨우 마칠 정도의 많은 양의 숙제를 내주었습니다. 게다가 이 프로그램 강사들은 숙제를 하고 안한 것을 일일이 검사했으며, 혹시 몸이 아파서 숙제를 못 했다고 하면 며칠이 걸리더라도 그 숙제를 마치도록 했습니다. 마치 고등학교가 무색할 정도의 영어 집중 교육이었습니다.

이 IEP의 교수진은 ESL(English as Second Language)이라는 외국인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전문 분야를 전공한 영문과 박사 과정 학생이거나, 또는 이 분야를 전공하고 외국인에게 전문적으로 영어를 가르치는 전문가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10여 년 이상 외국인을 가르친 실무 경험이 있어서, 한국어나 일본어 등 문법이 영어와 아주 다른 외국어의 구조도 잘 알고 있으며, 또 영어를 잘 못하는 외국 사람들과도 대화할 수 있는 언어 전문가들이었습니다. 오랜 세월을 두고 관찰한 내 경험에 비추어 봐도 영어를 짧은 시간에 배우는 길로써 영어 집중 교육이 아주 좋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1년 연수를 온 한국 언론인에게 IEP의 단점이라면, 이 과정이 미국 정식 대학생이 되려는 한국, 중동, 일본 등의 외국인을 가르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어서 한국 언론인들이 원하는 유창한 회화보다는 문법이나 논문 작성법에 중점을 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과정 중에는 미국의 사회 구조와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미국 가정에서 며칠 간을 보내기도 하고 단체로 프로 야구 구경을 가기도 합니다.

미주리 언론대학의 딘 밀스 전 학장이 수년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서울의 한 호텔에서 미주리에서 언론인 연수에 참여했던 많은 한국 언론인들이 모여 기념 사진을 촬영했다(사진: 정원호 제공).

한국 학생들을 많이 받아들이기 시작한 1980년대부터 저널리즘 스쿨에는 박사, 석사 과정 한국 학생들과 연수 온 언론인들을 합치면 항상 10명에서 25명의 한국인들이 있었습니다. 전체 언론대학원생이 240명이고 보면, 이중  한국인이 약 10%를 차지한 셈이었습니다. 

그렇게 한국 학생들이 많아지자 그것을 좋게 보는 교수보다는 이상하다거나 기분 나쁜 내색을 하는 교직원이 많았고, 그래서 나는 자식 많은 부모처럼 항상 발을 쭉 뻗고 자기가 힘들었습니다(9-2. 나의 조국 한국과의 인연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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