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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1 오레곤 대학교 언론학 학사 / 장원호

기사승인 2017.07.12  05:5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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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부 고학하는 유학생]백화점 청소부로 학비를 벌다

4개월의 농장 일을 마치고 오레곤 대학교가 있는 유진(Eugene) 시에 도착한 것은 가을 학기가 시작되기 나흘 전인 1966년 8월 17일이었습니다.

등록이 시작되는 날부터 기숙사에 입주가 가능해서, 나는 유진에 도착하자마자 등록부터 하고 즉시 빈 홀(Bean Hall)이라는 대학원생 전용 기숙사에 들어 갔습니다.

미국 대학의 학기는 대개 두 가지가 있는데, 그 하나는 우리나라처럼 2학기로 나눠지는 것입니다. 2학기제는 가을 학기(9월-12월)와 겨울 학기(1월-5월)로 나뉩니다. 또 한 가지는 오레곤 대학이 시행하는 쿼터제가 있습니다. 이는 봄, 여름, 가을, 겨울 4개 학기가 있다고 하여 쿼터제로 불리며, 매 학기가 매우 빠르게 진행되어 적응하기기 쉽지 않습니다. 쿼터제는 학기가 시작했나 싶으면 벌써 기말 고사를 봐야 할 만큼 정신없이 빨리 지나 가는 제도였습니다.

오레곤 대학 시절의 장원호 박사(사진: 장원호 박사 제공)

농장에서 일한 돈으로 첫 학기 등록과 기숙사비 한 학기분을 내고 나니, 남는 돈이 몇 푼 안 되었습니다. 한국에서라면 우리 집 돈이 떨어지면 마지 못해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급전을 부탁이라도 해 볼 수 있지만, 일가붙이라고는 하나 없는 낯선 곳에서 혼자 살아가는 사람에게 빈 호주머니처럼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덜컥 병이라도 나면 어쩔 것이며, 굳이 그런 험악한 이유가 아니어도 돈이 없어서 먹고 싶은 것을 제대로 먹지 못할 때에 느끼는 설움은 고향에서 느끼는 그것보다 곱절이나 큰 것이었습니다.

나는 빈 호주머니를 보며 다시 불안에 떨기 시작하였습니다. 다른 한국 유학생들은 적은 방을 월세 20달러에 빌려 여럿이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나만 무턱 대고 훨씬 더 비싼 기숙사에 들어간 것이 여간 후회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이었습니다. 등록하기 위하여 언론대학 학장을 만나 들은 소리에 나는 눈앞이 깜깜해졌습니다. 그의 말이, 우선 한국의 고려대에서는 정치학을 전공했으니 이곳 언론대학에서는 언론학에 관한 기초 과목을 이수해야 하며, 학부 당시 문학에 관한 과목이 부족하니 '20세기 문학' 한 과목을 더 수강해야 하고, 또 제2외국어까지 택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과목을 더 들으라고 하는 것은 그래도 어느 정도 참을 만한데,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입학 조건으로 조교를 약속받고 왔지만, 학장의 말이 내가 그 일을 해내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조교를 하면, 주마다 20시간을 근무하는 조건으로 180달러의 월급을 받게 되어 있었는데, 이 꿈이 허사가 된 것입니다. 조교가 할 일은 학부 학생들이 기사 작성 시간에 쓴 기사를 손봐주는 것인데 학장은 내가 미국 학생들의 영어 원고를 고쳐주는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나의 어려운 경제 사정을 이해한 학장은 자기 친구인 정치학과 교수가 조교가 필요하다고 하니 정치학과로 옮겨볼 생각이 없느냐고까지 물어 보았습니다.

유진 시의 오레곤 대학교(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언론 경험이라고는 고대 신문사에서 수습기자로 한 학기를 보낸 것 뿐이었지만, 언론학에 대한 매력이 너무도 커서 정치학과로 옮기지 않았습니다.

첫 학기를 17학점씩이나 등록해놓고 보니 학기가 시작하자마자 시험과 과제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습니다. 특히 내가 조교를 한다고 했던 기사작성 시간에는 매주 2개의 기사를 타자로 쳐내야 했는데, 내가 쓴 기사보다 빨간 펜으로 고친 것이 더 많았습니다. 처음 몇 번 쓴 것은 커다란 글자로 'F'를 받기도 했습니다. 교수는 자기 방으로 나를 불러 동정스러운 조언을 몇 번 해주면서 미국 신문을 많이 읽으라고 했습니다. 기사 작성 시간의 조교 노릇은커녕 내 학점도 제대로 얻지 못할 형국이었습니다. 나는 난감하기만 했고, 누구에게라도 SOS를 청해야 할 순간이었습니다.

기사 작성 과목 내용을 먼저 수강했던 학생들에게 알아보니, 교통사고 기사니 교육위원회 기사니 하는 수업 중 과제들은 이미 공개된 과목 스케줄대로 제시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해당 주의 기사 주제에 대비하여 몇 개씩이나 기사를 미리 준비했다가 날짜나 사람 이름만을 제시된 과제에 맞게 잡아 넣어 제출했습니다. 그랬더니 갑자기 성적이 F에서 B로 올랐습니다.

“흐음,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하고 생각한 나는 신이 나서 그 방법으로 매주 기사를 미리 준비했습니다. 한 번은 닉슨이 대통령 후보로 유진에서 유세 연설한 기사를 써야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동안 닉슨이 했던 유세 연설문을 몇 십 개 뽑아서 정리해 놓고 있다가 실제 유진에서한 유세를 참고해서 기사를 작성했습니다. 나는 그 기사로 인해 교수로부터 전에 없던 칭찬을 받았고, 학교 공부에 재미를 붙이게 됐습니다. 공부하는 즐거움은 물론 보람까지 느끼려는 순간, 한 학기가 끝나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학기가 끝나기도 전에 먼저 끝나 버린 것은 내 통장 구좌에 몇 푼 남아 있던 돈이었습니다.

학교에서 일할 자리를 구해보니 학생회관 식당일이 있었습니다. 학교는 시간당 1달러 25센트를 준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릇을 걷어서 설거지하는 일이었습니다. 차마 그일을 한다는 게 내키지 않아서 나는 좀 더 나은 일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그후 동네에서 제일 큰 백화점에서 청소부를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나는 부랴 부랴 달려가 면접을 본 다음 주부터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백화점은 아침 10시에 열고 밤 9시에야 문을 닫았는데, 청소일이란 매일 문 닫는 밤 9시부터 새벽 2시까지 5시간 동안 백화점 내부를 청소하는 것이었으며, 시간당 1달러 75센트에다가 백화점 직원으로서 몇 가지 편의가 주어지는 좋은 조건이었습니다. 단지 매일 밤 2시에 일을 마치고 아침 8시 반 강의에 들어 가야 하는 일이 곤욕스럽긴 했지만 돈이 궁한 데에는 별 수가 없었습니다.

나야 스스로 벌어서 공부하는 당당한 고학생이었지만, 집안에서 장손이 남의 나라에 가서 공부는 안 하고 백화점인지 뭔지 하는 곳의 머슴이 되었다고 하면 경을 칠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청소부가 된 사연을 나는 고향집에는 비밀로 했으며, 내가 일부러 집안에 알릴 일이 아니었습니다.

거지 밥그릇에도 순서가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청소부의 말단으로 들어가 먼저 한 일은 빈 상자와 소각할 수 있는 쓰레기를 태우는 것으로, 냉장고 운반용 상자 같은 나무 상자, 기타 종이 박스 등을 도끼로 부숴 가스 소각로의 작은 구멍에 쑤셔 넣는 것이었습니다.

혼자 5시간을 그곳에서 그 일을 하다보면 땀이 온몸으로 줄줄 흘러내렸습니다. 그러면 소각로 속으로 힐끔 보이는 뻘건 불빛 속에서 아내와 자식들 얼굴이 불현듯이 나타나기도 했고, 그때마다 눈시울이 따끔해졌습니다. 외로움이 밀려 드는 순간이 찾아 오면, 나는 작업 중에 일부러 소리를 내어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복습용 강의 노트를 줄줄 읽기도 하면서 일부러 흥을 돋우려고 노력했습니다. 두어 시간 그렇게 딴 짓을 하면서 작업에 몰두하면 어느덧 외로움은 사라지고 나는 다시 덤덤한 청소부가 되었습니다.

청소부 일로 나는 한 달에 200달러의 수입이 생겼는데, 그 돈으로 인해 나는 일약 “형편 좋은” 유학생 축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일단 95달러를 주고 중고차를 한 대 샀습니다. 그런 뒤에는 차가 없는 한국인 유학생들의 이사를 도와주거나 급하게 볼 일을 보러 나가는 사람들의 운전기사가 기꺼이 되어 주었습니다. 오래간만에 남들을 위해 뭔가 좋은 일을 한다는 기분에 나는 어깨까지 우쭐해졌으나, 그들에게 내가 어디에서 돈이 나서 차를 샀는지, 밤만 되면 어디로 사라지는지는 말하지 않았고. 아무도 내가 백화점 청소부 노릇을 하는 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유진에는 오레곤 대학교가 있고, 그곳에서 약 80km 떨어진 코발리스(Corvallis)에는 오레곤 주립대학교가 있는데, 주로 농과 등 자연계열 학과가 중심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코발리스에도 한국 학생이 30여 명쯤 되었는데, 주로 자연과학 계열의 젊은 총각들이 많았고, 유진에는 이화여대 영문과 출신의 처녀들도 몇 명 있었습니다. 두 대학의 한국 유학생들은 가을이 오면 두 도시 간 연례 야구 시합을 가졌고, 야구가 끝나면, 음식을 먹고 춤까지 추면서 즐겁게 놀았습니다..

코발리스에 있는 오레곤 주립대학교 전경(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이상한 것은 그렇게 많은 처녀 총각 유학생들이 있었지만, 그 곳에서 연인 사이로 맺어지는 예는 드물었습니다. 당시 그렇게 만난 유학생들은 모두 형제같이 느껴져서, 지금도 서로 자주 연락하고 틈나는 대로 만나는데, 이제 반은 서울로 돌아갔고, 반은 미국에 있습니다. 우리들은 지금도 가끔 만나면 “어째 그렇게 외롭다 하면서도 우리들은 연애도 한 번 못해 봤는지 몰라” 하며 깔깔 웃곤 합니다.

그해 망년회는 12월 31일 코발리스에서 할 차례였기 때문에 유진 지역 학생들이 그 곳으로 갔습니다. 우리는 포틀랜드에 있는 동양 식료품 가게에 가서 콩나물 두부를 사왔으며, 한국인 교포 가정에 부탁하여 김치, 불고기 갈비 등 푸짐하게 음식을 마련하였습니다.

대부분 젊은 학생들이고 보니, 술도 마시고 또 춤도 추곤 하였습니다. 음료수와 과일 주스를 섞은 것에 보드카를 한 병쯤 부은 것을 마실 때는 달콤한데, 취기가 갑자기 와서 모르고 몇 잔씩 마신 여학생들을 곤혹스럽게 했습니다. 우리들 중에 짓궂은 친구들은 그 일을 즐기느라 보드카를 몇 병씩이나 비싼 돈을 주고 사는 출혈(?)을 했으며, 아무도 그들의 출혈을 막지 않았습니다.

망년회를 마친 후 나는 포틀랜드 한인 교회에서 새해를 맞이해서 김 목사께 세배를 드리려고 다른 유학생 전 씨 형제 두 명과 나의 헌 차로 11시 쯤 코발리스를 출발했습니다. 그곳에서는 포틀랜드까지는 한 시간 정도의 거리였는데, 우리 셋은 모두 거나해져서 소리 내어 유행가를 부르며 즐거운 드라이브를 했습니다.

내 차는 1954년형 시보레였는데 자동차의 엔진오일이 다 떨어진 것도 모르고 신나게 달리다 엔진이 타버려 차를 길가 주유소에 버려야 했습니다. 우리들은 정초 새벽에 김 목사님을 깨워야했고, 차를 가지고 달려온 목사님 댁으로 가서 정초부터 법석을 떤 죄를 사죄드려야 했습니다. 

정신없이 한 학기를 보내고 새해를 맞고 나니 어느새 미국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미국식으로 공부하는 데에도 익숙해졌고, 게다가 우수한 성적으로 등록금도 면제받게 되자, 나의 '생활 형편'이 활짝 피었습니다.

나는 점차 시간도 적절히 나누어 쓸 수 있게 되었으며, 친구들과 함께 주말이면 테니스도 치고 해변에 나가 게도 잡는 여유를 부리기 시작한 것이 그 때부터였습니다(④-2 오레곤 대학교 언론학 학사에서 계속). 

미주리대 명예교수 장원호 박사 reporter1@civicnews.com

<저작권자 © CIVICnews / 시빅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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