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지도층 인사'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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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지도층 인사' 유감
  • 편집위원 양혜승
  • 승인 2017.07.10 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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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위원 양혜승
편집위원 양혜승

언어는 그 시대와 사회의 거울이다. 사회에 통용되는 언어는 해당 사회의 사고 구조를 드러내어 보여준다. 얼마 전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이 인사청문회 때 국회에 제출한 서면 질의 답변서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사회 지도층, 공인의 경우 성평등 의식과 실천에 있어서도 타인에게 모범이 되어야”하며,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스스로도 성평등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자신을 점검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는 내용이었다.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의 답변으로서 딱히 문제가 될 만한 답변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답변에 눈길이 머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사회 지도층’이라는 표현 때문이었다.

사실 ‘사회 지도층’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언론 보도에는 이 표현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주로 고위 공직자, 고위 법조인, 석학, 대기업 CEO, 유명 연예인 등 주로 부, 권력, 명예를 가진 사람들이 포함된다. 때로는 그 범위가 조금 더 확대되어 소위 ‘사’자가 들어가는 직업군 전반이 포함되기도 한다. 흥미로운 것은 대체로 이 표현이 긍정적인 뉴스보다는 부정적인 뉴스, 특히 준법과 윤리 의식을 강조하는 뉴스에서 빈번하다는 점이다. 부장판사가 성매매 사범으로 적발되었다든지, 고위 공직자가 부정부패를 저질렀다든지, 유명 연예인이 세금을 포탈했다든지 하는 것들이다. 모범을 보여야 할 사회 지도층들이 오히려 일탈을 하고 있어서 문제라는 내용이다.

하지만 ‘사회 지도층’이라는 표현 자체가 몹시 불편하다. 부, 권력, 명예를 가졌다는 것과 사회의 지도자 위치에 있다는 것을 동일시하는 전제 때문이다. 지도를 하는 지도층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건 지도를 받는 피지도층의 존재 또한 인정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민주 사회에서 다른 사람을 지도하는 계층과 다른 사람의 지도를 받는 계층이 따로 존재한다는 전제가 과연 합당한지 생각해볼 일이다. 물론 부, 권력, 명예를 지닌 사람들은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남다를 수 있다.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노출되고 관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향력이 있다고 해서 ‘지도’해야 할 위치에 자동적으로 서게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사회 지도층’이라는 표현이 우리 사회에서 이물감 없이 널리 활용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아직도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서열 구조와 계층 문화를 방증하는 것일지 모른다. 권위주의 문화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필자와 함께 근무하고 있는 캐나다 출신 교수는 우리나라 문화의 가장 큰 특징을 묻자 주저하지 않고 한 단어를 꼽았다. “hierarchy”였다. 여기서 “hierarchy”란 사회나 조직 내의 계급 혹은 계층 등의 위계를 의미한다. 우리 사회는 어떤 위계를 기준으로 사람 자체의 높고 낮음마저 구분하려는 문화가 존재한다. 물론 조직이나 사회에 위계는 있을 수 있다. 부유한 사람이 있으면 가난한 사람이 있고, 회사에서도 높은 직위가 있으면 낮은 직위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위계가 도덕이나 윤리적 측면에서 누군가를 지도해야 할 사람과 지도를 받아야 할 사람을 가르는 기준일 수는 없다.

언어는 그 시대와 사회의 거울이다. 동시에 시대와 사회의 진화를 반영하지 못한 언어는 시대와 사회의 퇴행에 일조한다. 진화되지 못하거나 폐기되지 못한 언어는 구시대적인 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우리를 옭아맬 수도 있다. 최근 들어 적폐를 청산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다. 구시대적인 언어도 적폐라면 적폐다. 언어 중에서도 버릴 건 버려야 한다. ‘사회 지도층’이라는 표현이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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