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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박 씨 농장 / 장원호

기사승인 2017.07.10  07: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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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부 고학하는 유학생]농장일로 돈을 벌어 대학에 입학하다

박 씨 농장은 오레곤 주 포틀랜드에서 약27km 떨어 진 그레샴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총면적이 약5만 2000평에 주로 크리스마스 트리를 키우는 농장이었습니다. 그 집에서 살면서 시간당 1달러씩 받기로 했으니, 나로서는 불평할 여지가 없는 좋은 자리였습니다.

오레곤 주는 서북부에 있으나 해양성 기후 탓에 겨울에 그리 춥지 않다(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김 목사 차로 그레샴에 도착한 것은 4월 중순으로 미국 서북부에는 겨울 우기가 막 가실 무렵이었습니다. 인구 2만 명도 안 되는 작은 시가지를 지나서 번지수도 없는 박 씨 농장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3시쯤. 이집 주인인 해리 박이 반갑게 맞아주었으나, 인사를 끝내자마자 이내 바쁜 일손을 놓을 틈이 없다면서 미안하다며 일자리로 돌아갔습니다. 그 탓에 나는 짐을 풀면서 안주인과 그의 어머니로부터 집안 내력을 들었습니다.

그 당시 40대 후반쯤인 해리는 하와이 이민 3세로서 우리 말은 거의 못 하는 편이었고, 안주인은 미국으로 유학 와서 1950년대 초에 박 씨를 만나 결혼하여 아이 셋을 두었고, 남편과는 영어를 쓰지만, 우리말을 잘했습니다. 이 안주인의 친정 어머니인 할머니는 몇 년 전부터 이곳 딸네 집에 와서 사는데, 나에게 친 할머니처럼 다정하게 대해 주셨습니다.

그레샴에는 해리의 형님 가족을 비롯해서 한국계 10여 가구가 인근에 흩어져 살면서 대부분이 농사에 관련된 일을 하고 있었으며, 박 씨 농장이 이들의 집합 장소라는 사실을 안 것은 그곳에 도착한 첫 주 금요일 저녁이었습니다. 해리는 농장일을 하면서 동시에 보험 관계 일을 맡아보고 있어서 한국계 사람들 가족 일을 두루 보살펴주고 있었으며, 금요일 저녁에는 이곳 한국 사람들을 자기 집으로 초청하여 포커를 하면서 주말을 즐겼습니다.

어느 농장이라도 마찬가지지만, 묘목 농장은 사람손이 특히 많이 필요했으며, 모든 중장비가 갖춰져 있었지만 일하는 사람은 해리뿐이고, 부인은 허리를 다쳐서 거의 농장일을 도울 수 없었습니다. 헤리에 의하면, 장모님인 할머니는 일하는 것보다 잔소리가 많았고, 아이들은 어려서 농장일을 돕기 힘들어 나를 고용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내 일이 간단한 것이 아니었고 실제로 점차 일이 버거워져서 나는 해리와 똑같이 고된 노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스코틀랜드 소나무 묘목 농장(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나는 큰아들 톰과 함께 방을 쓰고 있었는데, 새벽 5시 30분이면 일어나 새벽일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이곳은 겨울에 얼지도 않고 눈도 안 오는 지방이지만, 크리스마스가 오면 이곳 사람들은 겨울 분위기가 나는 트리를 만들기 위해 스코틀랜드 산 소나무(Scotch pine)을 사서 거실을 장식하곤 했는데, 이들을 위해 소나무를 길러 파는 게 이곳 농장의 주 수입원이었습니다. 소나무 싹을 온실에서 틔우고 길러서 묘목이 10cm 내외가 되면 기계로 농장에 이식시키는 일이 내 노동 중 하나였습니다. 그 밖에도 아침에는 묘목에 물을 주기 위해 물파이프를 옮기는 작업을 했고, 주문이 오면, 정원수를 캐어 싸가지고 트레일러로 배달하는 일까지 하느라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하루종일 일은 끝나는 법이 없었습니다. 일을 하다 지쳐서 저녁 먹고 침대에 초죽음이 된 몸을 던지면 그것으로 하루 일과가 마치는 거였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해가 뜨면, 또다시 어김없이 새벽에 일어나 농장으로 뛰어 나가야 했습니다.

“펜대만 들고 살던 놈이 남의 나라 와서 이게 무슨 고생이야” 하고 생각하니 한국에 두고 온 가족 생각에 목이 메어 왈칵 눈물이 솟구쳤습니다. 그 뿐이 아니었습니다. 아직 시작도 안한 공부 걱정이 날마다 눈덩이처럼 불어났습니다.

나는 그 농장에서 지내면서 성실한 사람인 체하려고 했던지 몇 가지 큰 실수를 저지르는 바람에 정신적 고생이 배가 되었는데, 그 중 한 가지는 담배를 끊을 작정으로 처음부터 담배를 못 피운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었습니다. 어차피 담배를 한 갑 사려 해도 몇 십 리를 나가야 하는 판이었던지라 “옳다, 이참에 못 피운다” 하고 아예 담배를 끊어 버리자고 했던 말이었는데, 금요일 저녁에 포커를 치러 온 주민들이 피우는 담배 냄새는 내 머리 속을 온통 뒤집어 놓곤 했습니다. 안 피운다 했으니 다시 피운다 할 수도 없고, 내 입만 바짝 바짝 타들어 갔습니다.

문제가 또 있었습니다. 포커도 안한다, 술도 안 마신다고 거짓말을 한 바람에 시원한 맥주를 쭉 들이키면서 하는 포커 놀이에 낄 수도 없었습니다. 나는 그런 자신을 두고 “왜 내가 거짓말을 했을까?” 하면서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릅니다. 담배와 술과 포커 금지는 공연한 거짓말 때문에 내가 겪어야 했던 고통이었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해리는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술을 권하면 “이 친구는 술 못 마셔. 얼마나 성실하다고” 하고 자랑했으며, 속은 쓰렸지만 그 덕분에 나는 건강을 꽤 지킬 수 있게 되었다는 위안을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박 씨 농장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내 생활도 일정한 리듬을 찾아 나갔습니다. 그 중의 한 가지는 할머니를 모시고 개 경주장에 가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는 포커를 할 줄은 알았지만 젊은이들한테 언제나 진다는 것에 불만이 대단하셨습니다. 그런 할머니에게 위안이 되는 것은 주말마다 포틀랜드 경기장에서 벌어지는 개 경주 구경을 가는 것이었고, 나는 할머니 운전수 자격으로 할머니는 따라가게 되어 그 신기한 노름을 은근히 즐길 수 있었습니다.

오레곤 주에는 개 경주가 유명하다. 사진처럼 그레이하운드라는 아주 잘 달리는 개가 이용되며, 우리나라에서는 1970년대에 '그레이하운드'라는 고속버스가 있었다(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개 경주는 경마와 거의 똑같았습니다. ‘그레이 하운드’라는 개들이 그들 앞에서 전기 장치로 달리는 토끼를 잡겠다고 뛰는 것인데, 신문에 개의 이름과 전적이 실리는 것은 물론, 신문의 우승견 예상을 중심으로 하루 저녁에 수백만 달러가 왔다 갔다 하는 노름이었습니다.

신문을 보고 개의 전적을 분석하여 할머니에게 알려드리면, 할머니는 일주일에 한 번 꼭 나를 데리고 경주장에 가셨습니다. 그러는 동안 나도 몇 번 표를 사놓고는 꼭 돈을 딸 것만 같은 기쁨에 젓곤 했지만 재미를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일요일엔 틀림없이 넥타이를 매고 동네 미국인 교회를 갔으며,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포틀랜드 한인교회를 갈 수가 있어서, 그곳 학생들과 탁구도 치면서 저녁 늦게야 돌아오곤 했습니다. 해리와 아이들은 냄새나는 김치나 된장찌개를 싫어했지만, 할머니 덕에 나는 할머니와 함께 아이들 눈치 안 보고 그 맛난 김치와 된장찌개를 맘 놓고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포틀랜드 한인 교회에 갔을 때 한 개에 15센트 하던 맥도날드 햄버거를 한꺼번에 몇 개씩 사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남들은 물려서 먹지 못하는 음식인데도, 나에게 햄버거는 별미 중 별미인 미국 음식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자동차로 2시간쯤 달려 미국 서해안에 가면, 그곳에서 미역과 홍합을 채취할 수 있었습니다. 이곳 한인들은 한 번 그곳에 가면 수십 자루씩 미역과 홍합을 채취해서 가지고 와서, 미역은 말리고 홍합은 냉동하여 두고두고 먹었습니다. 동네 한인들은 가끔 피크닉을 가서 야외 공원에서 통돼지 바비큐를 구웠는데, 그 맛은 다른 음식에 비할 수 없이 맛이 좋았습니다.

박 씨 농장에서 한 달 이상을 지내자, 나는 마치 그 집 맏아들쯤이나 된 것처럼 그집 가족과 격의 없이 지낼 수 있게 되었으며, 집안 대소 경조사를 함께 의논하고 치를 만큼 그들과 가까운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 덕에 나는 그래도 한국에 있는 집안 식구들에 대한 그리움을 조금 달랠 수 있었으며 외로움도 크게 느끼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여름이 되면 미국 북서부 지역에는 비가 별로 오지 않았고 햇빛이 아주 강했습니다. 이식한 묘목들은 밤이면 전기 장치로 물을 주었는데, 햇볕에 무럭무럭 자라는 나무들이 신기했습니다. 또 자란 나무를 뽑아서 실려 보낸 다음, 끝없이 넓은 농장 고랑을 다시 트랙터로 갈아 엎을 때는 흙냄새에 먼지까지도 싫지가 않 았습니다.

거의 4개월을 이곳에서 보내고, 8월 경 오레곤 대학교가 있는 유진 시로 떠날 때는 마치 고향집을 떠나는 것 같아 서운했으며, 해리는 내가 번 돈보다 훨씬 많은 돈을 주면서 공부 열심히 하라고 부모처럼 격려해 주었습니다.

대학에 등록하고 학기가 시작되었을 때 약 30여 명의 한국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나는 고향이 마치 그레샴인 것처럼, 박 씨를 든든한 부모처럼 생각하고 다른 한국 학생들에게 박 씨 농장 이야기를 했으며, 한국 학생들은 언제 한 번 박 씨 농장에 데려가 홍합찌개며 김치를 실컷 먹게 해달라고 조르곤 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9월 중순 어느 일요일을 택하여 친구 셋과 놀러가겠다고 농장에 전화했더니, 할머니가 “어서 오라”고 야단이었습니다. 내가 보고 싶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지경이라 했습니다. 나는 “아, 참. 할머니는....” 하면서 속으로는 기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학교에서 박 씨 농장까지 가는 데에는 약 두 시간쯤 걸렸습니다. 가는 도중, 친구들은 그동안 내가 하도 자랑해 놓은 탓에 모두 싱글벙글하며 홍합 먹을 생각만 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박 씨 농장에 아침 11시쯤에 도착하니 할머니, 해리 부부, 그리고 아이들이 함박 웃음으로 반겨 주었으며, 나는 마치 고향집에 온 듯이 좋아서 입이 다물어지질 않았고, 부러워하는 친구들에게 한껏 폼을 재며 집안 구경을 시켜 주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폼을 재던 나머지 그 집에서의 내 취할 바를 잊고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뻐끔뻐끔 피워댔습니다.

박 씨 농장을 떠나서 학교에 등록한 뒤 힘든 공부를 핑계로 담배를 다시 피우게 되었고, 무더운 여름에 시원한 맥주를 즐기게 된 것은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만 할머니의 눈물샘을 여지없이 자극하는 꼴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담배를 잘 피우는 사람이 4개월씩이나 참느라고 얼마나 애를 썼을까?” 하면서 할머니가 막 우시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아차 싶었습니다. 예전에 내가 성실한 사람처럼 보인답시고 담배 술 안한다 말했고, 실제로 그렇게 생활한 것을 그만 깜빡 잊고 태연히 담배를 피워 문데다 맥주까지 벌컥벌컥 마셔 버린 것이 할머니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나 봅니다. 할머니는 그런 나를 참고 견디게 했던 것이 가슴 아프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고인이 되셨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할머니의 그 고운 모습과 눈물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낯선 땅에서 처음으로 만나 혈육 같은 사랑과 정을 주셨던 그 할머니를 생각하면, 나는 지금도 코끝이 찡해옵니다.

점심부터 푸짐한 대접을 받았고, 오후에는 그 동네 명소 몇 군데를 둘러 봤으며, 저녁까지 잘 먹고 밤 늦게 캠퍼스로 돌아올 때, 할머니는 자취하는 학생들을 위하여 김치를 병에 가득 담아 주셨습니다.

학기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바쁜 공부에 자주 가지는 못 했지만, 좋고 나쁜 일이 있으면 서로 전화로 기쁨과 슬픔을 같이 나눴으며, 그해 크리스마스 선물로 할머니가 사주신 점퍼는 20여 년을 입어서 닳고 또 닳았어도 나는 내 옷 중에 그 옷을 가장 좋고 귀한 옷으로 여겼습니다.

미주리대 명예교수 장원호 박사 reporter1@civicnews.com

<저작권자 © CIVICnews / 시빅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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