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진덕호로 태평양을 건너 / 장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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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진덕호로 태평양을 건너 / 장원호
  • 미주리대 명예교수 장원호 박사
  • 승인 2017.07.07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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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고학하는 유학생] 태평양을 건너니, 가족은 그립고, 앞날은 태산 같은 공부 걱정만
장원호 박사의 가족.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둔 장원호 박사는 며느리, 사위, 그리고 손자 손녀를 두고 LA 인근 '레저월드'란 곳에서 행복한 은퇴의 삶을 보내고 있다(사진: 장원호 박사 제공).

1966년 봄 유학 시험에 합격하자마자, 학기는 8월 말에 시작되는데도, 나는 서둘러서 3월 19일 당시 해운공사 소속인 '진덕호'라는 미국행 상선을 부산에서 탔습니다.

일본의 요코하마에 이틀 간 머문 후 태평양을 횡단하는 시속 20노트 정도의 이 배에서 나는 장장 19일 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1만 2000t급 '진덕호'는 부산과 미주를 왕래하는 상선이었지만, 화주와 손님을 맞을 수 있는 방이 몇 개 있었고, 유학생은 당시 문교부에서 추천만 받으면 이 상선을 싸게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8월말 학기가 시작하기까지는 시간도 많았고, 또 뱃삯이 230달러여서 비행기 편의 반값이었습니다. 거기다, 유학 간다고 송별회까지 여러 번 했음에도 나가지 못한 채 자주 만나게 되는 친지들의 눈총도 있고 해서 서둘러 배를 타게 되었습니다.

3월 19일 저녁, 부산까지 기차로 내려가서 조그만 보트로 수백 미터 밖에 정박된 '진덕호'로 갔고, 요코하마에 도착한 것은 그 이튿날이었습니다. 태평양 횡단 항해는 참으로 지겹고 괴로운 여행으로, 날마다 멀미가 나서 욱욱 거렸으며, 끝도 없어 보이는 망망대해를 쳐다보는 것에 지칠 대로 지쳐 미국에 도착 했을 때는 거의 초죽음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진덕호에는 해양대학 3기라고 하는 남 선장이 있었고, 그 밑에는 3명의 항해사, 기관장, 3명의 기관사, 통신원, 그리고 사무장 등 간부들과 33명의 갑판원, 기관원 등 선원들이 있었으며, 나와 두 명의 다른 유학생들은 선장과 함께 식사할 수 있는 특혜를 누렸습니다.

평온하다고 해서 태평양이라 부른다는데, 그게 “순 거짓말이다” 싶을 만큼 파도가 심했고, 나는 며칠 동안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멀미만 죽어라 해댔습니다. 밤과 낮도 뒤죽박죽이 되었지만, 갑자기 태평양 가운데 배를 타고 있다고 생각하니, 온갖 어려운 생각에 잠마저 제대로 잘 수 없었습니다. 학부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는데, 언론학으로 전공을 바꾸어 공부하려니 더럭 겁도 났고, 광화문에서 산 몇 권의 영문 전공 서적이 나의 잠 못 이루는 밤을 달래 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뒤적였지만, 그것마저 쉽지 않았습니다.

배안은 밤마다 향연이었습니다. 싸롱에 근무하는 나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선원들이 벌리는 술잔치와 장기 자랑, 그리고 남자들만의 사교춤으로 보낸 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같이 배를 타고 간 유학생 두 명은 나보다 3~4년쯤 어렸으며, 그 중 한 명인 김모 씨는 보험을 공부하러 오클라호마로 간다고 했고, 다른 한 명인 유모 씨는 동부 어디로 경영학을 공부하러 간다고 했는데 배에서 내려 헤어진 후로는 이제까지 서로 연락한 일이 없습니다.

출렁거리는 배의 흐름에 몸을 적당히 맞출 수 있게 되었을 무렵, 끝내 배는 19일 간의 긴 항해를 마치고 미국 서북부 오리건 주와 워싱턴 주를 가르는 컬럼비아 강의 입구인 아스토리아에 들어섰습니다. 마침내 나는 미국 땅에 첫발을 디딘 것입니다.

미국에 도착한 나의 마음은 안도감이나 기쁨으로 가득차기보다는 망망대해를 보며 느꼈던 끝없는 허망함 같은 것이었습니다. 나도 모진 놈이지, 어쩌다 아내와 아이들을 놔두고 혼자 훌쩍 떠나올 수 있었단 말인가. 공부는 또 어떻게 하고, 생활은 어떻게 꾸려 나가겠다는 말인가. 한국에서 진작 이런 생각을 했었더라면 아예 시작하지 말았어야 된다고 후회도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열아흐레나 걸려 건너온 남의 나라이며, 나는 이제부터 시작되는 바다 저편에 대한 걱정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스스로를 위안해야 했습니다. 내 걱정은 오로지 손에 쥐고 있는 50달러로 한 달에 40달러가 넘는 방값을 치러 가며 공부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처음으로 미국이 무섭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스토리아에서 잠시 쉰 배는 그런 내 두려움은 아랑 곳하지 않은 채 산등성이에 별장처럼 지어진 집들이며 아름다운 컬럼비아 강을 굽이굽이 거쳐 가더니 4월 7일 워싱턴 주의 벤쿠버 항에 도착했습니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태극기를 단 커다란 스테이션 왜건(SUV가 흔하기 전에는 한국의 싼타모 같은 형태의 여행용 승용차를 이렇게 불렀다)이 기다리고 있었으며, 배에서 이미 이야기들은 대로 포틀랜드 한국인 교회의 김관극 목사가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북장로교에 속해 있는 포틀랜드 교회로 가서 모처럼 흔들리지 않는 밥상에 앉아 시큼한 김치와 국과 밥을 먹는데, 그 맛이 하도 좋아 나는 거의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습니다. 김 목사 덕분으로 며칠 간을 포틀랜드에서 잘 지냈습니다.

진덕호는 하역 관계로 그곳에 며칠 동안 정박하고 있었으며, 우리 유학생들은 다음에 갈 곳이 준비될 때까지 배에 돌아와서 잠을 잤습니다. 바다에 떠 있을 때는 그리도 싫고 지겨운 배였건만, 막상 정박한 뒤로 나에게 여전히 잠자리를 제공해 주고 있으니 이 배가 어찌 그리도 포근한 요람 같이 느껴지던지, 나는 나의 쇠삭함을 부끄러워해야 할 지경이었습니다.

배가 떠나고 다른 유학생 두 명도 자기 학교를 찾아 떠난 뒤, 나는 학교가 시작할 때까지 김 목사 곁에 머물면서 그의 주선으로 낚시도 가고 소풍도 가고 하면서 편안한 며칠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가진 이후 연속되던 일의 중압감과 유학 준비로 지친 내 몸을 오래간만에 추스를 수 있게 해 준, 참으로 편안한 일종의 방학이었습니다.

포틀랜드에서 그렇게 4일을 지낸 후, 김 목사의 주선으로 정원수를 주로 키워 파는 박 씨 농장에 일자리를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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