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news_top
default_news_ad1
default_nd_ad1

①50달러 가지고 미국으로 / 장원호

기사승인 2017.07.02  20:45:38

공유
default_news_ad2

- [제1부 고학하는 유학생] 정부 허가 유학 경비 50달러만 딸랑 들고 미국 유학 도전

젊은 시절의 필자

1966년 초, 멀고 먼 미국으로 유학 가는 한국 학생들이 가지고 나갈 수 있는 학비로 한국 정부가 허가한 외화는 딸랑 50달러였습니다. 당시 그 돈은 미국 한 달 방세에 불과 했으니, 이는 우리나라 외환 사정이나 경제 형편이 얼마나 어려 웠던가를 보여 줍니다.

당시 나에게 미국에는 어떤 연고도 없었고, 내 수중엔 저축된 돈도 없었습니다. 나는 처와 아이들을 처가에 맞기고 미국 가는 상선 진덕호를 타고 미국 유학이란 아슬아슬한 모험을 감행한 것이었습니다.

고려대학교에 다니던 첫해부터, 나는 막걸리 맛에 밤이 새는 줄을 모르고 친구들과 어울려 안암동 뒷골목을 헤매고 다녔습니다. 고운 생머리를 찰랑거리고 다니던 한 여학생에 대한 사랑으로 가슴을 졸이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휴전 이후, 어수선한 캠퍼스 분위기에 군복무까지 하면서, 미국에 나가서 좀 더 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내 머리에서 떠 난 적이 없었습니다.

서울 학보병 3기로 군복무를 일찍 마치고 대학을 졸업한 1961년, 나는 국가 공무원 채용 시험에 합격해서 공무원이 됐습니다. 그해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면서, 나는 농촌 진흥청의 전신인 농사원에 당시 5급 공무원으로 근무하게 되었고, 유엔 기금 사업의 사무장으로 발탁되어 유엔산하 국제식량농업기구(FAO) 직원들과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영어를 좋아했던 나는 영어만큼은 자신이 있어서 영어로 사무를 보는 일에 신바람이 났습니다. 그렇게 일에 맛을 들여 열심히 생활하면서, 나는 장가를 들어 딸 하나, 아들 하나를 가진 아비가 되었으며, 때마침 부모가 경영하던 정미소가 여러 사정으로 정리 단계에 들어가, 부모의 재정 지원이 까마득해졌습니다. 당연히 유학의 꿈도 접어야 할 지경에 이르게 됐읍니다. 아내와 함께 맞벌이를 했지만 유학은커녕 서울대학교에 다니던 동생의 학비를 대주는 일마저도 빠듯한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그래도 유학 가려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미국의 여러 대학에 유엔 직원들의 후한 추천장을 첨부한 지원서를 보냈고, 여러 대학으로부터 입학 허가를 받았습니다. 그중에도 오리곤 주 유진(Eugene) 시에 있는 오리곤 대학은 신문학과의 조교까지 할 수 있다는 편지를 해 왔습니다. 더 없이 좋은 기회로 판단한 나는 곧 바로 유학 준비를 했습니다.

드디어 1966년 유학을 떠나게 되면서, 나는 돈을 아끼려고 비행기 대신 배를 타고 미국으로 가는 멀고 어려운 여행을 해야 했습니다. 3월 19일 당시 해운공사 소속인 ‘진덕호’ 라는 미국행 상선을 부산에서 탔습니다.

미주리대 명예교수 장원호 박사 reporter1@civicnews.com

<저작권자 © CIVICnews / 시빅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5
default_side_ad1
default_nd_ad2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ide_ad4
default_nd_ad6
default_news_bottom
default_nd_ad4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