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 불상, 600년 만의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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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불상, 600년 만의 귀환
  • 칼럼니스트 박창희
  • 승인 2017.02.01 0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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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니스트 박창희
칼럼니스트 박창희

#새해 벽두의 죽비

무릇 600년 만의 귀환이다. 감격스럽다. 한편으로는 부끄럽다. 후손들이 얼마나 못났으면 조상이 물려준 성보(聖寶) 하나 간수를 못했단 말인가. 불상 하나가 정유년 벽두 우리의 흐리멍텅한 정신에 죽비를 가한다.

일본 대마도 간논지(觀音寺)의 금동관음보살좌상(이하 관음상) 이야기다. 경위가 묻힌 채 대마도의 작은 사찰인 간논지에 보관돼 있다 한국 도둑의 손에 의해 ‘장물’로 돌아온 불상이다.

“장물이니 일본에 돌려줘야 한다.” “왜구가 약탈해간 불상이 적실해 돌려줄 필요가 없다.” 3~4년간 뜨거운 국제적 논란이 일었다. 원래 불상 점유자인 충남 서산의 부석사가 소유권을 주장하며 소송을 걸었고, 설 직전인 지난달 25일 1심 판결이 났다. 재판을 맡은 대전지법은 “그간의 변론과 문화재청의 현장검증 등을 통해 불상이 부석사 소유로 충분히 인정된다. 역사·종교적 가치를 고려할 때 불상 점유자(한국 정부)는 원고(부석사)에게 인도할 의무가 있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근거로 불상의 결연문(結緣文: 불상 발원의 목적을 적어 불상 안에 보관한 문서)에 ‘고려국 서주(서산 지역)’라고 쓰여 있고, 당시 시주자 32명의 이름이 새겨졌다’는 사실을 꼽았다. 절도로 국내 반입한 해외 문화재를 소송으로 돌려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연 주목되는 판결이었다.

#한일 관계 새 변수

한국 법원이 한국의 손을 들어준 셈이지만, 판결의 파장은 만만치 않다. 일본 측은 강하게 반발했다. 일본 정부 대변인인 스가요시히데 관방장관은 “매우 유감”이라고 했고, 일본 외무성 간부는 “한일 관계에 있어 마이너스 점수가 다시 쌓였다”고 말했다. 아사히신문 등은 반발 기류를 여과없이 보도했다. 대마도 간논지의 전 주지 다나카 타카시효 씨는 “있을 수 없는 판결이다. 장물을 돌려주지 않는 것은 국가의 품격 문제”라고 반발했다. 나가사키현 지사는 “매우 놀라운 판결”이라 했고, 쓰시마 시장은 “매우 유감스러워 분노마저 솟는다”고 했다.

한일 관계가 더욱 꼬일 조짐이다. 한일 간에는 지금 독도 문제와 교과서 왜곡, 종군 위안부 합의 문제 등으로 서로 살얼음을 걷고 있다. 대마도 관음상을 끌어안고 울어야 할지, 웃어야할지 판단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관음상이시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하고 기도라도 올려야 할 형국이다.

대마도 간논지(觀音寺)에 보관되어 있다 한국 절도범에 의해 국내 반입된 서산 부석사 금동관음보살좌상(사진: 박창희 씨 제공).

#따스한 천상의 미소

기억이 생생하다. 도난 사건이 나기 1년 전인 2011년, 필자는 취재차 대마도 간논지를 방문했었다. 대마도 이즈하라 항에서 상대마 쪽으로 국도를 따라 1시간 30여분 달리자 ‘고즈나’라는 마을이 나타났다. 인적이 드문 시골 골목을 따라가자, 허름한 목조건물 한 채가 서 있었다. ‘임제종 서정산 관음사(臨濟宗 瑞正山 觀音寺)’라는 현판이 선명했다. 현판이 아니었다면 사찰인지 일반 주택인지 분간이 어려울 정도였다. 알고 보니, 상주 스님이 없는 무인 사찰이었다. 연락을 받고 나타난 마을의 관리자는 “시 교육위원회의 허가가 떨어져야 관람이 가능하며 일반 공개는 불허한다”고 했다. 이나마 구경할 수 있었던 건 지인을 통해 시 교육위원회를 움직였기에 가능했다.

자물쇠가 채워진 사찰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관음상이 일행을 맞았다. 순간 머리가 쭈뼛 섰다. 따스하고 평화로운 천상의 미소였다. ‘백제의 미소’랄까, ‘고려의 염원’이랄까. 지극한 표정에 취해 필자는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만 봐야 했다.

바깥에 세워진 표지판에는 ‘고려국 서주부석사(瑞州浮石寺)’를 충남 서산이 아닌 ‘현재의 경북 영주군’으로 잘못 적고 있었다. 불상의 결연문에 원 소장처가 ‘서산 부석사’로 적시돼 있으니 분명한 오기다. 간논지 관리자는 관음상을 자랑하고 싶어하면서도, 뭔가 캥기는 듯 관람을 빨리 끝냈으면 하는 눈치였다.

이 간논지 관음상이 한국 도둑들에 의해 밀반입되어 소유권을 놓고 재판을 벌어졌고, 뜨거운 공방 끝에 원 주인(서산 부석사)에게 돌려주라는 판결이 떨어졌다. 관음상의 간절한 뜻이 그것이었을까.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3가지다. 먼저, 일본의 주장처럼 쓰시마 관음상이 단순한 장물일 뿐인가 하는 것과, 일본에 가 있는 수많은 한국 문화재의 반환 문제, 그리고 일본의 강경대응에 대한 우리의 대응 자세다. 이렇게 볼 때 ‘대마도 관음상’은 단순한 문화재 절도사건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얽히고 설킨 한일관계와 양국간 첨예한 역사갈등을 짚어보는 가늠자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한일 갈등을 읽는 시험지

대마도 관음상? 아니다. 이름을 고쳐부르자. ‘서산 부석사 관음상’으로. 얼마나 부르고 싶었던 이름이던가! 후손들은 그리움만 조용히 간직하고 있었을 뿐, 이국땅에서 정처없이 떠돈 관음상의 고뇌는 헤아리지 못했다. 그 자애로운 마음자락을 쓰다듬기는커녕 도둑의 손에 불시 귀환한 것을 ‘기구한 운명’이니, ‘600년 만의 귀환’이니 흥밋거리로 보지 않았던가. 장물로 문화재청 수장고에 적치된 신세를 누가 한탄해주며 누가 끝내 제자리로 돌려줄 것인가. 부석사 관음상이 이제라도 당당하게 제 이름을 찾아야 하는 이유다.

#민초들의 염원이 담긴 불상

재판 과정에서 부석사 관음상의 기구한 유전(流轉)이 일부 확인된 건 주목할 사실이다. 이 관음상은 출생부터가 남달랐다. 불교를 숭상하던 고려국은 사찰이나 불상을 만들 때 주로 왕실이나 귀족이 주도했다. 그러나 부석사 관음상은 32명의 민초들이 간절한 염원을 담아 ‘영원히 부석사에 봉양’하기를 갈구했다. 이들 민초 중에는 노비도 포함돼 있다. 민중의 힘이 모아진 불사였다.

또 하나의 기적은 이 관음상이 스스로 출생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바로 불상의 복장물(腹藏物)이다. 조형물인 불상이 성보가 되기 위해서는 종교적 의식를 거친다. 의식은 크게 불복장(佛腹藏)과 점안(點眼)의식이 있다. 복장물은 대개 사리, 오곡, 오색실, 경전, 종이, 의복, 다라니, 만다라, 발원문 등이 들어간다. 발원문에는 조성 장소, 시기, 조성 사유, 발원자, 시주자 등이 기록된다. 복장물은 일종의 타임 캡슐이다. 복장의식이 끝나면 점안의식이 이어진다. 이를 통해 불상은 영원한 인격체인 부처님으로 탄생한다.

일본 등 이국에 떠도는 한반도 불상들 중 복장물이 확인된 것은 부석사 관음상이 거의 유일하다고 한다. 1951년 내부에서 발견된 복장유물 중 불상 결연문(結緣文)은 1330년(고려 충숙왕 17년) 서산 부석사에서 제작된 불상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복장물 속에 스스로 기원 내력을 밝힘으로써 환지본처(還之本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으니 가히 기적이다.

#왜구의 노략질 정황

부석사 관음상은 어떻게 대마도로 흘러갔을까. 이 문제는 재판 내내 뜨거운 쟁점이었다. 한국 측은 왜구의 약탈로 본다. 근거가 있다. 1982년에 간행한 <서산군지>에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인용해 고려 공민왕, 우왕 시절 서산 일대에서 11차례에 걸쳐 왜구가 약탈행위를 한 것으로 되어 있다. 부석사 관음상은 이 시기에 약탈됐을 가능성이 높다. 서산 바닷가에는 과거 ‘주사창(舟師倉)’과 ‘왜현리(倭懸里)’ ‘왜현포(倭懸浦)’가 있었다고 한다. ‘왜현리(포)’는 창궐하는 왜구 우두머리의 목을 베어 마을 어귀에 걸었던 곳이란 섬뜩한 뜻을 가진 지명이다. 이는 왜구의 노략질 정황을 말하는 실질적 표현이다.

대마도 등에서 몰려든 왜구들은 서산 근처의 부석사에 불을 지르고 관음상을 약탈해갔을 것이다. 관음상의 손가락과 가사자락 등에 남아 있는 화상 흔적이 그걸 증언해준다. 그 와중에도 복장물을 지킨 것은 관음상의 원력이다. 이 복장물이 호적등본이 되어 대마도의 어느 낯선 절에 흘러들었고, 고려불상이란 가치와 복장물 희귀 사례라는 의미가 인정돼 1973년 나가사키현 지정문화재로 등록됐다.

#관음상의 눈물

김경임 전 튀니지 대사는 2015년 펴낸 <부석사 관음상의 눈물>이란 책을 통해 진일보한 견해를 내놓았다. 그는 “여러 기록을 보건대 왜구가 서산을 침탈하였던 1375년 9월부터 1381년 9월 사이에 ‘고노’라는 왜구가 부석사에서 불상을 약탈하여 대마도로 가져가 그의 근거지인 고즈나에 보관해오다, 1526년 그의 후손인 고노 모리치카가 고즈나에 사찰을 열고 부석사 불상을 봉안하며 사찰 이름을 ‘관음사’로 한 것 같다”고 했다. 일본 학자들의 견해는 설득력을 더욱 높인다. 기쿠다케 쥰이치 규슈대학 명예교수는 "대마 미술’에서 ‘간논지는 왜구의 한 집단으로 생각되는 고노 씨가 창건했으며, 이곳의 부석사 불상은 왜구의 일방적 청구(請求)에 의한 것이었음을 추정케 한다"고 기술했다. 일본 미술사가 헤이다 히로시도 "화상으로 파손된 대마도의 조선 불상들은 평상이 아닌 '어떤 사정’에 의해 유출됐다고 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일본 학자들도 불상 유출 경위의 불법성을 시인하고 있는 셈이다.

일본 대마도 가이진(海神) 신사에 있는 신라시대의 동조여래입상. 한국 절도범에 의해 국내 밀반입되었으나 한국 검찰이 일본에 돌려주었다(사진: 박창희 씨 제공).

“역사 정의의 실현”

이번 판결은 국내외 문화재 환수문제의 지평을 확대하고 약탈 문화재 반환의 이정표를 제시한 사건이다. 부석사 관음상 환수 운동을 벌여온 시민단체들은 “역사 정의의 실현”이라고 크게 환영했다. 하지만 “무리한 판결”이란 시각도 여전히 존재한다. 가령, 애국심에 불타는 절도범이 일본에서 또다시 우리 문화재를 밀반입해 올 경우 한국정부가 정의로운 결정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제 논란은 우리가 ‘뺏긴’ 약탈 문화재 전체로 확산되는 분위기다. 현재 일본에는 6만 6,000여 점의 약탈 문화재가 있다고 한다. 대마도에만 130여 기의 한국 불상이 있고, 이 가운데 10여 점은 일본에서 보물 이상의 대접을 받고 있다. 부석사 관음상과 함께 한국 절도단이 훔쳐온 가이진(海神) 신사의 ‘동조여래입상’도 국보급 문화재다. 동조여래입상은 국내에서 소유권을 주장하는 사람이 없어 2015년 7월 가이진 신사로 돌아간 상태. 일본에 있는 대부분의 한국 문화재들은 복장물이 없어 유출 경위를 알기 어렵다. 일본의 선의가 아니면 돌려받기 힘든 구조다.

지금 국제사회는 자국의 문화유산 보호에 비상한 관심을 쏟고 있다. 국제박물관협의회는 문화재 취득 과정의 도덕성을 강조한다. 특히 문화재의 출처나 소유권 내력(provenance)을 중시한다. ‘기원국으로의 반환,’ 즉 문화재는 제자리에 있을 때 빛을 발한다는 명제는 국제사회에서 통용되는 윤리이자 규범이다. 문화재는 공동의 기억을 공간화하고, 공간은 역사로 진화한다. 핵심은 역사적 진실이다. 일본에 이를 요구하는 건 역시 무리한 일일까.

일본을 다시, 제대로 알아야 한다. 루스 베네딕트의 명저 <국화와 칼>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일본인은 죄의 중요성보다 수치의 중요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일본은 수치의 문화이며 치욕을 원동력으로 한다." 정곡을 찌르는 진단이다.

일본인들은 그들의 죄가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나지 않는 한 고민하지 않는다. ‘수치의 문화’인 일본인들에겐 죄의식을 기대할 없고, 따라서 반성도 없다는 말이다. 일제가 아시아를 유린하고, 교과서를 왜곡하며, 위안부 동원 같은 국가 범죄를 저지르고도 사과나 반성이 없는 것도 이런 연유로 이해할 수 있다.

일본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보다 명쾌해지고 지혜로워져야겠다. 한손엔 힘, 한손엔 지혜를 키워야 한다. 일본을 꼼짝 못하게 하는 실력을 가질 때, 일본의 선의는 작동될 것이다. 삼성전자가 일본 소니를 압도하자 한국을 보는 세상의 눈이 달라지지 않았던가. 약탈이든, 기증이든, 유출이든, 문화재 스스로 말하게 하여 역사정의를 바로 세운다는 자세가 필요하다. 부석사 관음상이 던지는 진짜 메시지는 이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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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스바운스 2017-02-12 07:09:37
다시는 진짜 이런 일이 없도록 해야합니다.. 우리 문화재 반환 노력 계속 해주길 정부에 바랍니다..

따스한봄 2017-02-05 00:12:17
반환운동 같은 적법한 절차를 거쳐 환수한게 아니라서 좀 찜찜하긴 하지만
일본에 뺏긴 수많은 약탈 문화재 중에 하나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부분은 참 반갑네요!!^^

ci002 2017-02-04 09:01:19
일본이 우리나라 보물을 가져갔다니 지금이라도
돌아와서 다행이다
다시는 이런일이 없도록 보살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