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선생 밀랍인형 앞에서 오늘의 대한민국 갈 길을 묻다
상태바
김구 선생 밀랍인형 앞에서 오늘의 대한민국 갈 길을 묻다
  • 취재기자 손은주
  • 승인 2017.01.25 21:01
  • 댓글 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역사의 현장 상해 임시정부 참관기...어지러운 정국 탓인듯, 한국 젊은이들 줄이어 / 손은주 기자

“엄마, 여기 왜 왔어?” “여긴 꼭 와봐야 하는 곳이야.” 

중국 땅인 이곳에서 한국인 모자(母子)의 대화가 들린다. 한국인 애국심의 뿌리인 이곳은 중국 상해시 노만구 마당로 306롱 4호(上海市 盧灣區 马当路 306弄 4号)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다. 이곳은 상해의 신천지란 지역에 있다.

신천지(Xintiandi)는 중국판 가로수 길로 유명하다. 지하철 10호선과 13호선이 만나는 신천지역 1번 출구로 나오면 임시정부로 향하는 길이 있다. 1번 출구를 등지고 앞으로 걷다 보면 길 건너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란 간판이 보인다. 간판이 작아서 눈을 크게 뜨지 않으면 무심코 지나칠 수 있어 유의해야 한다.

상해 지하철 신천지역 1번 출구로 나오면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를 방문할 수 있다. 임정 유적지는 골목 입구의 문을 들어가면 골목 오른쪽 건물에 자리잡고 있다(사진: 구글 지도를 바탕으로 본지 제작).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 간판. 그 옆이 골목 입구이고 그 안쪽으로 들어가면 임정 건물이 오른쪽에 있다(사진: 취재기자 손은주)

간판이 보이는 이곳은 안내실인데, 임시정부 유료 입장권을 판매한다. 입장권은 20위안, 한국 돈으로 3,400원 정도다. 관람객 김연수(25, 대구 수성구) 씨는 “상해 여행을 검색하면 필수 방문 코스로 임시정부가 나온다. 그래서 당연히 들러야겠다는 마음으로 왔다”고 말했다.

입장권은 골목입구 임정 유적지 안내실에서 판매한다. 가격은 20위안(한화 3,400원 정도)이다(사진: 취재기자 손은주).

안내실을 나와 오른쪽 골목으로 꺾어 들어가면 골목 입구에 임시정부 유적지로 들어가는 문이 나온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로 들어 가는 문처럼 생긴 골목 입구. 이 입구를 지나면 골목이 나타나고, 이 골목 오른쪽 건물이 임정 유적지다(사진: 취재기자 손은주).
임시정부로 가는 골목 입구에서 보이는 골목 안 모습. 이 골목 오른쪽에 임정 건물이 있다(사진: 취재기자 손은주).

임시정부 유적지는 입구를 지나 골목으로 접어든 후 바로 나오는 오른쪽 건물이다. 이 건물은 1번부터 5번까지의 번호가 매겨져 있는 다섯 개의 문을 가지고 있다. 1, 2번 문은 사용 용도를 알 수 없이 굳게 닫혀 있고, 3, 4, 5번 문은 개방돼 있다.

3번 문 안으로 들어가면 단체 영상실이 나타난다. 이곳에서 상영하는 영상물은 유적지 관람 전 기초 지식을 알려준다. 단체 영상실 벽면에는 이곳을 방문한 역대 한국 대통령의 사진이 전시돼 있다. 1990년 임시정부 유적지 개관 이후, 1992년 노태우 대통령을 시작으로 2015년 박근혜 대통령의 방문 장면이 담겨 있다. 

관광객들은 3번 문 영상실을 보고 나와서 4번 문으로 입장하면 임정 유적들을 자세히 보게 되고, 5번 문으로 퇴장하는 형식으로 관람하도록 돼있다. 4번 문은 유료 입장권이 있어야 입장할 수 있다. 입장권을 내고 안으로 들어서면, 김구 선생의 흉상이 관람객을 맞는다. 흉상 뒤로는 대형 태극기가 걸려 있다. 그 옆으로 조금은 위태로워 보이는 가파른 계단이 있다.

본격적인 임정 유적을 보기 위해서는 4번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사진: 취재기자 손은주).
4번 문과 5번 문 사이에는 중국 인민정부가 1990년 이곳을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 유적지로 공표했다는 팻말이 붙어 있다(사진: 취재기자 손은주).
4번문으로 들어서면 정면에 김구 선생의 흉상이 있다(사진: 취재기자 손은주).

3층까지 이어지는 계단의 가운데는 2층이 있다. 2층에는 작은 공간들이 지난 세월의 흔적을 담고 고스란히 남아 있다. 여기에는 김구 선생의 집무실, 정부 집무실, 요인숙소들이 복원돼 있다. 김구 선생의 집무실에서 대부분 관람객들은 오래 머문다. 실물을 닮은 밀랍 인형이 현장감 있게 복원돼 있기 때문이다. 밀랍 인형이 김구 선생과 똑같다며 놀라는 할머니, 어린 자녀의 질문에 하나하나 답해주는 엄마, 마치 그 시절로 시간여행 온 것 같다는 젊은이들이 줄지어 선 이곳은 바로 역사의 현장이었다.

김구 선생 집무실이 사실적으로 복원돼 있다(사진: 취재기자 손은주).
임정 정부 집무실(사진: 취재기자 손은주).

그 당시 모습을 재현해 놓은 2층과는 달리 3층은 전시실로만 쓰이고 있다. 3층은 시끌벅적한 2층에 비해 비교적 한산했다. 3층 전시실에는 상해 임시정부의 역사를 알려주는 설명문이 있었다. 설명문을 차근차근 읽어본다. 

임시정부 유적지 3층은 임정 역사를 설명하는 전시실이다(사진: 취재기자 손은주).

1919년 3월, 임시정부는 3·1운동 이후 표출된 독립 정신의 영향을 받아 몇몇 뜻 있는 인사들에 의해 수립됐다. 3·1운동의 정신을 이어받는다면 우리나라가 독립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정부를 미리 설립해 놓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시작된 임시정부는 하나가 아니었고, 여러 독립투사들에 의해 상해,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 서울, 평안도, 인천, 만주 일대 등 곳곳에서 수립됐다. ‘일제의 무단통치’가 삼엄했던 상황에서 다양한 독립 세력들이 하나로 뭉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여러 임정 중, 상해, 블라디보스토크, 서울에서 성립된 임시정부만이 삼권 분립 등 일정한 정부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1919년 9월, 우여곡절 끝에 곳곳에서 수립된 임시정부는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로 통합됐다.

임시정부는 상해로 통합되기 전에 블라디보스토크, 상해, 서울 등의 각 지역에서 여러개가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전시물(사진: 취재기자 손은주).

통합된 임시정부는 내정, 교통, 군사, 외교, 교육, 문화, 재정, 사법 등 체계적인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그 이후,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임시정부 활동이 일시적으로 침체됐으며, 1931년 상해에서 임시정부 산하 비밀결사대인 ‘한인애국단’이 조직되면서 다시 활기를 띄게 됐다. 한인애국단이 조직된 이듬해인 1932년, 김구 선생의 지휘 아래 이봉창, 윤봉길 의사는 일제의 탄압에 맞서 의거를 결행했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 의사는 일본 도쿄에서 일왕 히로히토에게 수류탄을 던졌다. 비록 일왕을 처단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임시정부와 한국인의 항일투쟁을 널리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같은 해 4월 29일, 윤봉길 의사는 상해에서 열린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행사’에 참석한 일본군 수뇌부를 향해 물통 폭탄을 투척했다. 의거 결과, 기념행사 단상에 있던 일본 총사령관과 거류민단장 등이 사망하고 다수의 일제 대표 인사들이 중상을 입었다. 이 의거는 당시 중국 장제스 정부의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중국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하는 계기가 됐다.

왼쪽부터 한인애국단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사진이다. 의거의 결의가 가득한 이 사진은 임정 실내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사진: 취재기자 손은주).

의거 이후 가중되는 일제의 탄압에 임시정부는 13년을 머물렀던 상해를 떠나 중국 각지로 옮겨 다녀야 했다. 임시정부는 상해(1919), 항저우(1932), 쩐장(1935), 창사(1937), 광저우(1938), 류저우(1938), 치장(1939) 등지로 청사를 옮겨 다니다가, 1940년 9월 17일, 충칭에 정착했다.

임시정부는 충칭에서 머물던 5년여 간 활동을 전개하면서 광복을 준비했다. 1945년 8월, 일제의 항복 이후 임시정부는 중국에서 27년 간의 활동을 끝내고 마침내 조국으로 환국했다. 관람객 정태윤(42, 서울 신림동) 씨는 “사실 14년 전인 2002년에도 상해에 왔었지만, 임시정부 청사를 그냥 지나쳤다. 하지만 최근 촛불집회를 참석하고 나서 상해에 가면 한국의 뿌리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방문 소감을 말했다.

2019년이면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건립 100주년을 맞이한다. 임시정부는 한국 역사상 최초의 민주 공화정부로서 의미가 크다. 또, 임시정부는 광복을 맞이해 환국할 때까지 항일독립운동의 대표기관으로서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일제의 탄압에도 꿋꿋이 자리를 지켜온 임시정부는 관람객의 가슴을 먹먹케 했다. 관람객 이주혜(25, 대전 서구) 씨는 “시국도 안 좋은 상황에 일본 위안부 문제도 겹쳐서 그런지 사실 일본에 반감이 크다”며 “아직도 우리나라에는 일본의 잔재들이 너무 많이 남아있다”고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임시정부 유적지 출구인 5번 문 앞에는 기금 서명처가 마련돼 있다. 이곳에서 기금을 낸 이주혜 씨는 “아직 청산되지 못한 일본의 잔재와 아직 해결되지 못한 한일 간의 과제는 앞으로 젊은 청년들이 해결해 나가야 하는 문제가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임시정부 유적지 관람이 끝나고 5번 문으로 퇴장하기 전, 기금 서명처에 서명하고 기금을 낼 수 있다(사진: 취재기자 손은주).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는 중국 남서부 충칭에도 있다. 충칭에 위치한 청사가 충칭시의 도시개발계획으로 한때 사라질 위기에 처했으나, 국내의 대기업들과 정부가 힘을 모아 복원작업을 시작해 1995년에 일반 대중에게 공개됐다. 충칭에 있는 임시정부는 상해 임시정부 청사의 12배에 달하는 규모로, 김구와 장제스의 회담 자료, 신문이나 광복군 자료 등 많은 사료가 5개의 건물에 나뉘어 전시돼 있다. 중국을 방문하면 상해는 물론 충칭의 임시정부 청사를 찾아 순국선열의 혼을 배우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2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행복한제이 2017-02-04 23:42:46
존경하는 김구 선생의 밀랍인형을 비롯한 당시 사용된 가구와 서적 등 역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신기하네요~~ 상해에 가게 된다면 꼭 들러서 잊어선 안될 우리의 역사를 돌아보며 저도 애국지사들의 독립정신을 느끼고 싶어요!..

뮤지니 2017-02-01 18:07:26
기사에서 기자의 열정이 느껴지네요 기사에 현장의 생생함은 물론 많은 역사의 정보도 담겨있어서 도움이 되는 기사인건같아요 ^^ 저도 기회가된다면 그곳에서 역사의 땀방울을 더욱 가까이서 느껴보고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