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말할 수 있다...내가 겪은 1212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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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말할 수 있다...내가 겪은 1212사태
  • 발행인 정태철
  • 승인 2016.12.11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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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행인 정태철
발행인 정태철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되고, 헌법재판소가 탄핵심판에 착수했다. 탄핵안 국회 가결 바로 다음날에도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라는 구호와 함께 축제 같은 촛불집회가 광화문 광장을 들썩였다. TV는 광화문, 청운동, 효자동 등 청와대 주변을 연신 비추고 있다. 나는 1979년 12월 12일 당시 요즘 TV 화면의 핫스팟인 그곳 청와대 근처에 있었다. 37년 전 나는 수경사(현 수방사) 30경비단 상황병이었다.

수경사는 사령부가 있는 서울 필동에 33경비단 등 예하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지만, 30경비단만은 청와대 경호 부대로서 경복궁 향원정 서쪽 모퉁이 청와대 바로 길 건너 맞은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지금 그곳이 어찌 되었는지 가본 지 오래되어 모르지만, 부대는 어디론가 철수했을 것이고, 경복궁 복원 사업에 의해 당시 부대 부지는 말끔히 원래 문화재로 복원되었을 것이다.

1980년 2월 말 제대를 앞 둔 내 눈에 1979년 후반기는 박정희 정권의 말기적 현상이 연속된 시기였다. 1979년 8월엔 YH라는 가발수출회사에서 노동을 착취당한 여공들이 당시 야당인 신민당 당사로 쫓겨와 농성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강제 진압한 경찰을 거세게 비난한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결국 박정희 정권에 밉보여 10월 4일 국회에서 제명된 후 가택연금됐다. 이게 기폭제가 되어 김영삼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과 마산 지역에서 10월 15일부터 “유신철폐와 야당탄압 중지”를 외치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발생했다. 정부는 10월 18일부터 이 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군대와 장갑차를 출동시켜 시위를 강제 진압했다.

일설에 의하면,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재규는 부산에 가서 대학생은 물론 시민들까지 들고 일어난 시위 현장을 보고 독재 종식을 위한 무언가 비장한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확인할 길은 없다. 그리고 1주일 뒤인 10월 26일, 김재규는 경호실장 차지철, 비서실장 김계원과 박정희 대통령을 모시고 청와대 인근 궁정동 안가에서 연회를 가졌다. 이날 김재규는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을 권총으로 사살했다. 당시 연회장 근처에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대기시키고 모종의 ‘거사’를 계획한 듯했던 김재규의 준비는 치밀하지 못했고, 그날 새벽 그는 체포됐다. 이날 궁정동에서 직선거리로 불과 100m 정도 떨어진 그 부대의 상황병인 나는 긴박한 전군(全軍)의 움직임에 따라 우리 부대에 비상을 하달하는 등 정신없는 밤을 보냈다. 그러면서도 왜 전군 비상이 발령되는지 알지 못했다. 우리 상황병들은 다음날에야 "대통령 유고"라는 대문짝만한 신문 제목과 함께 전날 밤 소동이 대통령 시해 사건 때문이었음을 알게 됐고, 경악해 마지않았다.

그날부터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계엄사령관에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임명됐다. 11월 언제부터는 김재규에 대한 재판이 진행됐다. 대통령 시해가 경호실장 차지철과의 충성 경쟁에 따른 우발적 범행이었다는 설도 있었고, 장기 독재를 종식시키려는 김재규의 민주화 거사였다는 설도 있었다. 김재규는 결국 사형이 선고됐고, 이듬해 1980년 5월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러나 1979년 12월 초, 시중에 떠도는 여론에서 김재규가 “민주투사,” “민주화 영웅”이라는 표현이 들리는 등 김재규 재판이 심상치 않은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 와중에 국정 공백을 매우기 위해 12월 6일에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 간선제였던 당시 유신헌법에 따라서 국무총리였던 최규하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드디어 1979년 12월 12일 운명의 날이 왔다. 그날도 공교롭게 내가 상황당번이었다. 저녁 식사 직후, 부대 CP 2층 상황실로 들어가 자리에 앉자마자, 정문, 후문에서 굵직한 직책의 별자리들이 우리 부대로 들어왔다는 보고가 속속 올라왔다. 부대에 들어온 장군들은 상황실 옆에 있는 단장실로 들어가고, 그들의 부관들은 상황실로 모여 들었다. 그런데 그 부관들 복장이 권총, 탄띠, 헬멧으로 구성된 단독군장 상태였다. 왜 이들이 모인단 말인가? 대통령 취임 직후니까 군 장성들이 모여서 청와대로 대통령께 인사드리러 가나? 근데 부관들은 왜 단독군장이야?

이런 속삭임을 상황병들끼리 주고받고 있던 찰나, 후에 전두환 대통령 경호실장과 안기부장을 지내게 되는 우리 부대 30경비단장 장세동 대령이 다급하게 상황실로 뛰어 들더니 1개 중대 출동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출동 중대장에게 수경사 33경비단장의 뒤를 쫓아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지시 후 상황실을 나가면서, 장세동이 어리둥절하고 있는 상황장교와 상황병들에게 던진 말이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별 것 아냐. 김재규 잔당 잡으러 가는 거야.” 지금은 다들 아는 사실이지만, 경호실 병력 일부가, 10월 26일 당시 김재규 초청으로 청와대 인근에 와서 대기 중이었던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김재규와 공범 혐의가 있다며 수사하기 위해 체포하려 갔고, 우리 부대 중대 병력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일종의 계엄사령관 체포조 후원 병력인 셈이었다.

나중의 기록은 이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우리 부대에 모였던 사람들은 육사 정규 1기인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중심으로 사조직 ‘하나회’ 멤버들인 9사단장 노태우, 수경사 30단장 장세동, 수경사 33단장 김진영 등과, 하나회를 후원하고 이날 반란에 동조한 1군단장 황영시(후에 육군참모총장, 감사원장 역임), 국방부 군수차관보 유학성(후에 안기부장, 국회의원 역임) 등이었다. 이들은 후에 소위 신군부 실세들로서 두 명의 대통령을 배출하는 등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다. 이들 반란군 일당이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체포해 놓고 대통령의 사후 재가를 받기 위해 최 대통령을 위협했고, 최 대통령은 노재현 국방부 장관 말을 들은 후에 재가하겠다고 버티고 있었다고 한다. 노재현 국방장관은 쿠데타를 직감하고 어디론가 피신한 상태였고, 최 대통령은 노재현 국방장관이 나타날 때까지 재가를 미루고 버텼다고 한다. 최 대통령은 당시 어떤 위협을 당했는지 끝까지 함구하다가 2006년 그 모든 것을 무덤까지 안고 돌아가셨다.

초저녁 한바탕 중대 병력 출동과 귀대 상황이 끝난 후, 상황실은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나는 상황장교의 양해를 얻어 1층 화장실에 다녀 올 수 있었다. 볼일을 보고 2층 계단으로 오르는 순간, 계단을 내려오는 일단의 검은 가죽점퍼를 입은 사람들과 마주쳤는데, 군대 예절에 따라서 나는 계단 왼쪽 벽에 몸을 밀착하고 정면을 응시했다. 곁눈질로 본 그 광경은 전두환과 개머리판 없는 소총을 든 3-4명으로 기억되는 경호원들이었다. 아마도 그 순간이 정승화 계엄사령관 신병을 확보한 뒤 전두환 일행이 청와대로 최 대통령을 만나러 가는 길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그날 나는 그렇게 전두환을 보았다.

그리고 조용하게 밤이 깊어가고 있을 무렵, 갑자기 상황이 돌변했다. 장세동 단장이 상황실 문을 박차고 뛰어 들더니 부대 정문과 후문을 탱크와 105mm 포로 막고 사령부 차가 나타나면 무조건 발포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전 병력에 실탄과 수류탄을 지급하고 전투태세로 배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나는 군 생활 3년 중 처음으로 비상벨 함을 열고 중대별 비상벨을 눌렀다. 상황병 3명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순간 이게 무슨 일인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사령부 차만 보면 발포하라니?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의무반 졸병이 전화를 했다. 자기들은 무얼 해야 하냐고.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부상자 치료 준비해!”라고. 나는 무슨 쿠데타 같은 것이 진행되고 있음을 직감했다.

이때, 상상 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광화문 방면에서 탱크소리가 들린다는 보고가 들어 왔다. 순간, 실제로 탱크소리가 들리는지 확인하기 위해 상황실 창문을 열었다. 상황실 모두들 귀를 기울여 그렁그렁 하는 탱크소리를 듣고 있었다. 손에 진땀이 흘렀다. 이제 전투가 벌어지나 보다 하고 생각하니, 숨쉬기조차 곤란할 정도로 입에 침이 말랐다. 잠시 후, 탱크소리가 멀어진다는 보고가 들어 왔다. 안도의 한숨이란 이런 것일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이번에는 북악산 초소에서 북악 스카이웨이 쪽에서 트럭 수십 대가 우리 쪽으로 쳐들어온다는 보고가 들어 왔다. 이때, 김진영 33경비단장이 상황실로 뛰어 들었다. 그 트럭들엔 필동에 있는 그의 지휘부대인 33단 소속 병력이 타고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그는 우리 부대 북악산 소초장에게 전화로 삼청 터널을 바리케이트로 차단하고 병력이 도착하면 인솔자와 자기와 통화하게 해달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얼마 뒤 실제 사령부 병력 인솔자와 김진영 33단장과의 통화가 이뤄졌다. 33단장은 인솔자에게 “상황 판단 잘해라. 사령관 말 듣지 말고 내 말 들어라. 네가 지금 여기로 쳐들어와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돌아가라.” 대강 이런 요지의 말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

나중에 12.12를 그린 TV 드라마를 보니, 이 급박했던 상황의 궁금증이 풀렸다. 12일 밤 늦게 전두환 일당의 반란 소식을 접한 수경사령관 장태완 장군은 반란군 전두환 일당을 잡으러 사령부에 주둔한 탱크와 33경비단 병력을 경복궁으로 출동시킨 것이었다. 드라마에서는 김진영 33단장이 광화문으로 직접 나가 사령부 탱크부대를 설득해서 회군시켰고, 바로 코앞에서 내가 목격한 것처럼, 33경비단 보병부대도 삼청 터널에서 전화 통화로 되돌려 보낸 것이었다. 그 공이 인정되었는지, 김진영 33단장은 나중에 육군참모총장으로 승승장구했다. 반면, 전두환의 회유를 끝까지 거부한 장태완 수경사령관과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반란에 참여한 부하들에 의해 체포되는 하극상을 당해야 했다. 정승화, 장태완, 정병주 장군은 체포 후 이등병으로 강등되는 수모를 당했다가 민주화 이후 복권되었으며, 특히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1989년 자살로 추정되는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되어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이날 12.12 반란은 신군부가 밤늦게 수경사, 특전사, 그리고 육군본부를 완전 장악하면서 상황이 종료되었다.

다시 상황실이 조용해졌다. 대항 세력이 진압되었으니(당시는 몰랐지만), 상황이 조용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때, 장세동 단장이 상황실로 들어 오더니 부단장 호출을 명했다. 부단장이 올라오고, 장세동이 이렇게 지시했다. "부단장은 1개 중대 병력을 이끌고 박물관 정문으로 가라."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은 경복궁 안에 있었으며, 박물관 정문은 국군수도통합병원과 보안사 건물을 길 하나로 마주 보고 있었다. 지시가 이어졌다. "중대병력으로 길을 종대로 차단하고 앉아 쏴 자세를 취하게 하라. 국방장관 차가 나타나면, 차를 세우고 정중하게 보안사령부로 안내해서 보안사령관을 만나게 하라." 아마도 상황이 모두 끝난 후, 국방장관이 연락이 돼서 청와대로 대통령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던 것 같고, 전두환 일당이 그 도중에 국방장관과 보안사령관의 면담을 주선한 듯하다. 그 이상의 디테일이야 알 수 없지만, 최규하 대통령은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임의 연행한 것에 대해 그 이후 사후 재가하게 되고, 신군부는 이렇게 대통령의 계엄사령관 연행 재가를 얻음으로써 그날의 쿠데타를 합법화했고, 그럼으로써 정부를 사실상 장악하게 됐다.   

부단장이 상황실을 나간 후 장세동 단장이 4명의 참모(소령급)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당번병을 시켜 커피를 돌리게 했다. 상황병들에게도 커피 한 잔씩이 주어 졌다. 장세동은 상황실에서 일장 연설을 했다. 요지는 이런 거였다. “우리가 각하(박정희) 돌아가시고 얼마나 설움을 당했냐. 별것 아냐, 김재규 잔당들을 처치한 거야. 헬멧만 쓰면 총알이 빗발쳐도 목숨은 건진다. 너희들은 내 말만 믿고 나만 따르면 돼.”

내 머리는 혼란스러웠다. 그날밤 이후 내 심장은 스트레스로 인한 부정맥 이상 징후처럼 이따금 뛰다가 멎다가를 반복하면서 나를 괴롭히다가 제대 후 1년쯤 지나서야 나도 모르게 그 증상이 사라졌다.

상황병 교대 지시가 떨어졌다. 새벽 2-3시가 넘은 듯했다. CP를 나와 넓은 연병장을 가로질러 내무반에 들어섰다. 내부반원 전원은 아직도 비상이 풀리지 않아 군장을 착용한 채 한 명도 자지 않고 말똥말똥한 눈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중대장이 우리 내무반으로 뛰어 들었다. “야, 정 병장. 이게 도대체 무슨 사태냐? 어떻게 된 거야?” 나는 내 침상으로 가서 군화만 벗고 양말과 옷은 벗지 않은 채 모포로 머리를 감싸고 돌아누워 버렸다. 중대장이 나를 흔들며 “보고 들은 게 있으면 뭐라 말 좀 해봐.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사태냐”고 다시 다그쳤지만, 우리 군끼리 두 패로 나눠 싸움을 벌이고 있는 상황을 접한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거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실제 상황의 긴박감이 아직도 내 전신에 남아 있어서였는지 대꾸조차 하기 싫었다. 동료 고참병들이 수근거렸다. “얘가 뭘 봤기에 이래?”

다음날 12월 13일, 기상나팔과 함께 눈을 뜨니, 축구장 크기의 연병장에는 수십 대의 탱크로 가득 차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탱크들은 전방에서 북한군 침략에 대비해야 할 노태우 9사단의 탱크였다. 부대옆 경복궁 안 중앙박물관 건물 주위에는 특전사 병력이 우굴우글했다. 신군부는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장군을 연행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우발적 사건이라고 김영삼 정부 시절 재판에서 항변했지만, 12.12는 사전에 치밀하게 모의된 '작심' 쿠데타였다.

박정희의 18년 군부 독재가 그렇게 다시 전두환의 7년 군부 독재로 연장됐다. 전두환은 군인의 권력을 민간인에게 이양할 수 없다는 오만에 투철했고, 박정희 수하 시절, 권력을 잡는 법, 권력을 누리는 법, 그리고 권력을 뺏기지 않는 법을 박정희로부터 군부 독재의 유산으로 물려받은 것이다. 그는 박정희의 검은 수제자였다.

그후 우리나라는 민주화의  흐름을 탔다. 부당하게 권력을 잡은 군부 독재 세력을 처벌했고(전두환 반란죄 처벌),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등 나름대로 한이 쌓인 사람들이 돌아가며 장권을 잡고 한을 풀었다(여야 정권교체, 보수진보 정권교체). 그런데 최순실 게이트,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 가결이 우리나라를 37년 전 오늘인 1979년 12월 12일 못지않게 우리에게 새로운 역사적 과제를 던진 것 같다. 그것은 민주화 이후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우리나라 '시스템의 문제'일 것이다. 차분히 문제를 정의하고 해법을 생각해 보자. 국민이여, 정치권이여, 언론이여, 정치적 사건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말자. 인생이나, 나라나, 역사는 도도(滔滔)하고 유장(悠長)하다. 민주화를 총칼로 막은 37년 전 12.12 군사정변도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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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min 2016-12-12 15:14:28
1대대 OP에 있는 비석 뒤 역대단장 이름에서 전두환, 장세동 이름봤을때도
신기했었지만..., 부대 선배님이 이런 상황을 겪으셨다니.. 거듭 신기합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ggg 2016-12-12 14:10:31
이등병...ㅡ.ㅡ;;; 이병 정승화!!!!

전종택 2016-12-12 12:44:30
그시절나는신당동박정희대통령집위에서공돌이였는대만은시간이흘렇내요

카투어 2016-12-12 12:25:48
정말 잘 읽어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강영규 2016-12-12 11:48:59
저는 12 12사태 때 수경사 56헌병대 근무중에 당시 5분대기조로 참모총장 공관에 처음 투입되어 총격전까지 하였습니다.
당시 수경사 상황에 대해 직접 경험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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