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화 시대의 한글 사랑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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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화 시대의 한글 사랑법
  • 발행인 정태철
  • 승인 2016.10.09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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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행인 정태철
발행인 정태철

영어 알파벳, 한자, 일본 가나 등 전 세계에는 각양각색의 글자가 있지만, 글자를 만든 이유, 만든 사람, 글자 만든 원리가 <훈민정음 해례본>과 같은 공식 문서로 남아 있는 언어는 이 세상에 한글밖에 없다. 내가 만난 외국인들에게 이런 한글 역사를 들려주면 그들은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세상에 그런 일이?"라고 놀라며 경이와 감탄을 금치 못했다. 10월 9일 한글날은 우리뿐 아니라 전 세계가 국제적 기념일로 기려야 한다. 그래서 한글이 세계문화유산이다. 다만, 국제화 시대에 우리가 이점을 적절히 홍보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한글날이 되면, 언론은 한글 오남용과 외래어 침공 세태를 개탄하느라 바쁘다. 그 사이에 SNS가 주도하는 ‘듣보잡(들어도, 본 적도 없는 잡X)’ 어휘는 날로 늘어나고 있다. 이제 ‘얼짱,’ ‘엄친아, ‘ㅇㅋ(오케이),’ ‘ㄱㅅ(감사)’ 등의 신조어는 어른들도 제법 사용빈도가 높으니, 사전 등재가 임박할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직업상 20대 대학생들의 기사 문장을 20년 넘게 하루에 수십 쪽, 1주일에 100쪽 이상을 보아 왔다. 그랬더니, 언론이 늘 지적하는 사이버 상의 언어 혼란 말고도 젊은이들의 언어 습관에 녹아 있는 소소한 변화를 감지하게 됐다. 최근, 젊은이들은 ‘연구하다’보다는 ‘연구를 하다’는 식의 표현을 선호한다. 영어는 ‘do a study’나 ‘do a homework’처럼 명사 앞에 do(하다)를 써서 동사형으로 만드는 규칙이 있으니, ‘연구를 하다’는 영어식이고, ‘연구하다’가 더 한국적인 표현일 듯하다. 이런 영어식 동사형의 선호현상이 ‘앞날을 예측 하다,’ ‘지방을 축적 시키다,’ ‘벌점이 누적 되었다’와 같은 띄어쓰기의 오류로 이어진다. 요즘 젊은이들이 가장 자주 틀리는 띄어쓰기 오류가 바로 이것이다. 대학생들이 영어식 ‘예측을 하다’로 표현하는 데 익숙하다보니, ‘예측하다’를 ‘예측 하다’와 같이 두 단어로 인식하는 버릇이 생긴 게 아닐까. 이것들은 ‘예측하다,’ ‘축적시키다,’ ‘누적되었다’처럼 붙여 써야 한다. 이를 바로 잡으려는 나와 학생과의 실랑이가 벌써 수년째 학기 내내 벌어지고 있다. TV 자막에도 이 오류는 셀 수 없이 많이 나온다. 자막 만드는 방송국 직원도 내내 우리 학생들과 같은 또래이기 때문일 것이다.

‘커피 나오셨어요,’ ‘영수증 여기 있으세요’와 같은 사물 존칭어나 과잉 존칭어는 학생들 말과 글을 점령하고 있다. 중앙 방송 아나운서도 “그 어르신은 날마다 운동하시면서 열심히 사세요”라고 표현한다. 존칭어는 한 문장에서 주된 곳에 한 번만 쓰면 된다. 위 표현은 “운동하면서 열심히 사세요”라고 해야 한다. 이는 자본주의적 세태 변화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sir(남자를 높여 부르는 말), maam(여자를 높여 부르는 말)과 같은 영어의 높임말은 미국에서도 계급 사회인 군대를 제외하고는 맥도날드, 은행, 가게 같은 서비스 업소에서 주로 쓰이기 때문이다.

외래어 남용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도를 넘고 있다. 한국철도공사보다는 ‘Korail’이 익숙하고, 외교부의 북한 급변사태 대비계획을 ‘컨틴전시(contingency, 우발 사태) 플랜’이라고 부르며, 요새 한창 외국 관광객을 불러 모으고 있는 국가적 세일 행사는 ‘코리아 세일 페스타(festa, 스페인 어원의 축제)’라는 이름이 붙었다. 시골 사는 시어머니가 아들 집 찾아 서울 올라와도 집 못 찾아 다시 시골로 돌아가게 하려고 며느리가 일부러 ‘캐슬,’ ‘힐스테이트’와 같이 꼬부랑 외래어 이름을 가진 아파트를 선호한다는 개그도 있었다. ‘파리바게트,’ ‘CGV,’ ‘홈플러스,’ ‘투썸플레이스’ 등은 이제 국민 브랜드가 됐다. 외래어 범람은 국제화 시대에 따른 언어 표현의 다양성이란 차원에서 용인될 수도 있지만, 어느 정도의 절제는 필요하다. 

그런데 외래어 중 하나인 한자는 한글전용에 맞서 더 많이 사용하고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우리말 어휘의 60%가 한자 어원을 가지고 있어서 한자를 모르면 어휘 이해력이 낮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한자병용론자들의 주장이다. 최근 SNS에 기상천외한 한자 어휘의 재해석이 인기만발이다. ‘갈수록 미모가 일치얼짱(일취월장)한다,’ ‘에어컨 시래기(실외기),’ ‘오랄(오라)을 받아라,’ ‘인생의 발여자(반려자),’ ‘골이 따분한(고리타분한) 성격,’ ‘동물확대(동물학대),’ ‘바람물질(발암물질),’ ‘사생활 치매(침해)’ 등은 한자세대를 웃기다 못해 허탈하게 만든다.

젊은 세대의 이런 어처구니없는 언어 이해력은 과학적 조사 결과에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국가평생교육진흥원의 ‘2014년 성인 문해 능력 조사 결과에 따르면, 18세 이상 인구 중 생활에 필요한 읽기, 쓰기, 셈하기가 불가능한 인구는 264만 명, ‘생활 활용 미흡’은 248만 명 정도로 추산됐다. 이 수치는 성인 인구의 약 1/4이다.

OECD의 ‘국제 성인 문해 조사’ 결과는 한국의 ‘실질 문맹률’이 75%로 OECD 22개 국가 중 최하위인 것으로 나타났다. 실질 문맹률이란 전문적인 정보기술(IT) 등 첨단정보와 새로운 기술, 직업에 자유자재로 적응할 수 있는 ‘고도의 문서해독 능력’이 없는 사람의 비율을 뜻한다.

이를 뒷받침하듯, 본지의 한글날 특집 10월 8일 자 기사에 따르면, 취업 포털 잡코리아와 알바몬이 한글날을 맞아 대학생, 구직자, 직장인을 대상으로 '국어에 대한 자신감과 공부 필요성'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응답자의 92.6%가 ‘내 스스로 국어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그만큼 국어에 자신이 없다는 얘기다.

이 모두가 국어 교육의 문제로부터 기인한다. 지문 읽고 문제 푸는 건 국어 교육의 한 분야에 불과하다. 학교는 읽기, 쓰기, 듣기, 말하기 등 국민 언어생활에 필요한 모든 요소를 다 가르쳐야 한다. 전 세계 수십만 명이 치르는 영어권 유학용 영어 시험인 토플은 쓰기와 말하기도 채점이 가능하다. 우리 학교 제도 상 쓰기 말하기의 시험 평가가 꼭 필요하다면, 토플의 채점 노하우를 참고하면 된다. 

한글과 한자를 같이 필기하자는 ‘한자병용론’은 국어 교육에 한자 교육을 더한 후 논의해도 늦지 않다. 우리 문자 한글과 한자와의 관계와 유사한 것이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영어들과 라틴어와의 관계다. 영어권 의학용어나 과학용어는 그리스어, 라틴어투성이다. 물의 순수 영어 단어는 ‘water’지만, 라틴어로는 ‘aqua’다. 여기에 방을 뜻하는 라틴어 ‘rium’이 합쳐진 ‘aquarium’은 수족관이 된다. 걷는다는 뜻의 순수 영어는 walk인데, 라틴어는 ‘ped’이며, 여기서 파생된 ‘pediatrician’은 아장아장 걷는 아이를 다루는 소아과 의사이고, ‘pedestrian’은 보행자란 뜻이다. 미국은 학교에서 라틴어 어원을 중요하게 가르친다. 라틴어가 영어 어휘력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든 영어 단어는 영어 알파벳으로만 표기되므로, 외형상 라틴어 어원이 영어 단어에 보이지 않는다. 이게 미국이 라틴어를 더 열심히 가르치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한글전용으로 모든 단어를 표기하는 우리가 한자를 더 열심히 배워야 하는 이유도 바로 영어 알파벳 전용 표기와 숨은 라틴어 어원과의 관계와 유사하다, 한글 전용 세대는 한자를 배워야 한글로 표기된 ‘전후’에 숨은 한자 의미가 ‘전후(前後)’인지 ‘전후(戰後)’인지를 구분하게 된다.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들은 대학 교육을 자국어로 하지 못하고 식민 지배를 받았던 나라의 언어를 빌어쓴다. 철학, 경제학, 물리학, 의학 용어를 표현할 그들의 어휘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일제는 우리 학교에 일본어 사용을 강제했지만, 우리는 해방 당일부터 일본어를 패대기쳤다. 아프리카는 그게 여의치 못했지만, 일본말은 우리 학교 주위에 얼쩡거릴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말로 대학 교육을 하고 있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말해서 우리가 한자를 사용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21세기 세계 강국인 아시아의 한, 중, 일 3국이 한자를 공유한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국제화의 관점에서 보면, 한자를 배우는 일을 우리의 모국어 자존심과 꼭 결부시킬 문제는 아닐 듯하다. 

나는 몇 년 전 외국인에게 일본어를 영어로 평생 가르친 한 일본 노부인과 대화을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녀는 한류 팬이어서 한국에 와서 한 대학의 한국어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웠다. 그녀는 한글이 과학적일지 모르지만 외국인용 한글 교수법은 체계적이지 못하다고 꼬집었다. 그녀는 ㄳ, ㄶ, ㄼ 등의 겹받침이나 ㅙ ㅝ 등의 거듭홀소리를 배울 때부터 외국인들은 한숨을 내쉬기 시작하고, 한글 띄어쓰기를 배우는 단계에 이르면, 외국인들은 '한글의 난해함'에 진땀을 흘리게 된단다. ‘우리나라’를 국립국어원 인터넷 국어대사전에서 찾으면 쉽게 검색된다. 그러나 ‘우리집’은 검색이 안 된다. 왜? ‘우리집’은 한 단어가 아니라 ‘우리 집’으로 띄어 쓰는 두 단어로서 한 단어이어야 하는 사전 표제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영어 글을 사전 찾아가며 해석하듯, 한국 신문을 사전 찾아가며 읽는 외국인들에게 한글 띄어쓰기는 총체적 고통을 준다. 자국인도 지키지 못하는 한글 띄어쓰기는 국제화 시대에 수정보완이 불가피하다.

우리에게는 한글사랑이 나라사랑이란 역사적 전통이 있다. 주시경, 최현배 선생은 일제로부터 우리말을 저항과 투옥으로 지켜냈다. 한자에 대한 국민적 저항감은 아마도 조선의 사대주의에 대한 반감과 일제의 한국어 탄압에 대한 증오심과 관련이 깊다. 그러나 국제화 시대에는 자국 언어에 대한 자존심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타 언어에 대한 수용성도 중요하다. 국어 전공자나 국사 전공자들도 국제화 시대에는 해당 분야에서 적극적인 외국어 활용 방안을 생각해야 한다.

한 캐나다 교수가 한국에 교환교수로 와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을 때, 나에게 한글은 영어 알파벳과 같은 낱글자이므로 가로로 풀어쓸 수 있는데도(근력을 ‘ㄱㅡㄴㄹㅕㄱ’으로 표기하는 식) 왜 한 음절씩 모아 쓰냐고(‘근력’으로 표기하는 식) 질문했다. 나는 국어학자도 아닌 나에게 그가 왜 이런 어려운 질문을 할까를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 캐나다 교수를 가르치는 한국어 선생이 영어를 못 해서 내게 질문한 것이었다. 그제야 나는 영어를 거의 하지 못하는 한국어 교사가 영어권 외국인들에게 한글을 한국어로만 가르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는 한국어 교사에겐 일종의 모국어에 대한 자긍심일지 모르지만, 한국어 초보 입문자에겐 깜깜이 교육이다. 사정은 매년 바뀔 것이므로 지금은 어떨지 모르지만, 한글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외국 교과서에 많이 나온다는 한국사 왜곡 현상을 막으려면, 한국어와 한국사를 외국인에게 영어 등 해당국 언어로 가르칠 수 있는 인력이 많아야 한다.

이제 한글과 한국어도 국제화 틀 속에서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 문법을 외국인 입장에서 되돌아 봐야한다, 우리 한국어 교수법이 외국인에게 잘 먹히는지도 점검해 봐야 한다. 국제화 관점에서 한자도, 외국어도, 심지어는 SNS 신조어도 수용 여부를 전향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실질 문맹률 감소와 쓰고 말하는 국어 교육 도입을 위해, 다른 나라 언어 정책과 국어 교육도 살펴봐야 한다. 국제적 감각으로 국민 언어 생활을 성찰하고, 이로써 국민 실질 문맹률이 줄고, 국민 독서력이 향상됐을 때, 노벨 문학상은 그 과실로 한국인이 수상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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