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만세’와 표현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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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만세’와 표현의 자유
  • 편집위원 신병률
  • 승인 2015.12.21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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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두 장의 사진은 몇 주 전 대학가에서 한바탕 논란이 되었던 대자보들이다. 왼쪽의 "김일성 만세" 대자보가 붙자 그것에 대한 반발로 오른쪽의 "전두환 만세" 대자보가 붙었고, 이들 외에도 "박근혜는 독재자의 딸," "천황폐하 만세" 등의 패러디 대자보도 붙었다고 한다.

최초 대자보인 "김일성 만세"는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 중 한 사람인 김수영이 1960년에 쓴 시의 일부로, 표현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에 대한 시인의 바람이 담긴 시다. 당시 김수영은 발표 후 예상되는 파문에 대한 주변의 우려에, 제목을 <잠꼬대>로 바꾸는 정도로 타협하고 시를 발표하려 했으나 본문까지 수정하자는 출판사의 요구에 결국 출판을 거부했다. 이후 미망인이 보관했던 이 시는 한 문학평론가에 의해 발굴되어 창작 후 거의 반세기가 지난 2008년에야 겨우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번 대자보 논란은 ‘표현의 자유‘의 허용 범위에 대한 시각차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라면 어떤 나라든 표현의 자유를 시민의 기본적 권리로 인정하고 법으로 보호하고 있다. 하지만 민주국가라 하여 표현의 자유를 무제한으로 허용하는 것은 아니고, 전쟁 중과 같은 특별한 경우 이를 제한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따라서 표현의 자유를 허용해야 한다는 것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지만, 어디까지 허용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18세기 초 언론ㆍ출판ㆍ표현의 자유 개념이 최초로 등장한 이래 아직까지도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타인을 비방하고 그의 명예를 훼손해도 되는가?’ ‘저속하고 외설스러워 보이는 표현을 해도 되는가?’ ‘공공의 질서를 파괴하도록 선동해도 되는가?’ 등등 언뜻 보면 당연히 금지해야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누가, 무엇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했느냐에 따라, 표현의 자유로 인정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는 경우들이 많다. 예를 들어 ‘그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다하여 뇌물을 받은 정치인을 비난하는 것을 금지해야 하는가’라고 질문을 살짝 바꾸어 생각해보면 이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다.

이처럼 표현의 자유와 관련해서는 그것을 제한할 수 있는 일률적이고 보편적인 기준이 정립되어 있지 못하고 어쩌면 그것을 정립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표현의 자유와 관련하여 예민하고 애매한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계속 논란이 된다. 하지만 이런 곤란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표현의 자유와 관련하여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거나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것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가해자(혹은 강자)보다는 피해자(혹은 약자)에게 표현의 자유가 훨씬 더 폭넓게 보장되어야 한다는 점이 그렇다. 백인은 흑인을 검둥이라 부르면 안 된다거나, 독일인이 나치를 찬양해서는 안 된다거나, 권력자에 대한 희화화나 비난은 폭넓게 허용되어야 한다거나 하는 등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성숙도를 나타내는 하나의 지표이기도 하다. 민주주의가 성숙한 나라일수록 개인의 표현이 공공의 질서를 파괴할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 그것이 다소 외설적이거나, 명예훼손적이거나, 선동적이라고 해도 그것을 폭넓게 인정하고 있다.

"김일성 만세" 대자보의 경우, 과거 권위주의 시대였다면 분명 공권력에 의해 그 작성자가 체포되고 국가보안법 등으로 기소되었을 테지만, 그러지 않았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과거 권위주의 시대보다는 훨씬 성숙해졌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문민정부 이후 노무현 정부 때까지 지속적으로 확대되어왔던 표현의 자유가 이명박, 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위축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세계 각국의 언론 자유 정도를 매년 평가하여 발표하고 있는 프리덤하우스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언론자유지수는 2006년 31위(노무현 정부)를 기록한 이후 2009년 69위(이명박 정부) , 20014년 57위(박근혜 정부)를 기록했다. 비판적인 언론인들을 해고하거나, 국가권력을 비난한 사람들에게 명예훼손 소송을 거는 등의 행위가 지수하락의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성숙한 민주 국가라면 예술적 표현의 경우에는 그 자유가 훨씬 더 폭넓게 인정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재 소송 등으로 고초를 겪거나 구속 중인 예술인들도 있다.

김수영 시인은 “문학을 하는 처지로서는 '이만하면'이라는 말은 있을 수 없다. 적어도 언론자유에 있어서는 '이만하면'이란 중간사(中間辭)는 도저히 있을 수 없다. … 창작의 자유는 백 퍼센트의 언론자유가 없이는 도저히 되지 않는다. 창작에 있어서는 1퍼센트가 결한 언론자유는 언론자유가 없다는 말과 마찬가지다”라고 했다. 그리고 1960년 10월 6일자 일기에 “한국의 언론자유? Goddamn이다!”라고 적었다.

“나는 당신의 말에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이 그렇게 말할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내 목숨이라도 걸겠다”고 했던 18세기 프랑스 계몽사상가 볼테르의 더 높은 관용의 정신에는 미칠 수 없더라도, 단지 나와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그것을 억압하고 말살하려는 태도는 지양해야 한다. 성숙한 민주사회가 되려면 시민 각자가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고, 자신의 의견과 다른 의견에 대해서도 최대한 관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시민이 그럴 진데 권력을 가진 자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어떤 표현이 ‘피해자(약자)에 대한 가해자(강자)의 공격’이거나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아닌 한 폭넓게 인정하는 것이 더 성숙한 민주 사회로 가는 길임은 분명하다. 이 두 가지 기준을 가지고 이번 대자보 논쟁을 각자 평가해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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