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곧 하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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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곧 하늘이다”
  • 편집위원 장동범
  • 승인 2015.11.09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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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말을 듣는 순간 어린 소견에도 잘 믿기지 않았다. 어떻게 땅에 사는 동물인 사람이 저 높고 거룩한 하늘과 같을 수 있는가? 1960년대 중학교 역사 시간, 혁명이 아닌 동학란에 대해 배우면서 동학의 ‘인내천’(人乃天) 사상에 대해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다. 50년도 더 지난 세월이지만 그 선생님의 김, 달자(字), 수자 존함이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나는 이유는 깡마른 몸에 꼬장꼬장할 정도로 또렷하게 동학란이 일어난 배경과 일제의 침략, 수탈, 그리고 우리의 주권을 상실하게 된 과정을 자상하게, 약간은 비장한 어조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또 수나라와 당나라 대군을 물리치고 요동반도와 만리장성, 그리고 저 멀리 북간도까지 세력을 뻗어나간 고구려의 ‘상무(尙武)정신’과, 외세를 끌어들여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의 외교문제까지 늘 거침없이 설명해주시는 선생님의 우리 역사 수업시간만큼은 조금도 지루할 겨를이 없었다.

지난 여름 필자는 집에서 점심을 먹고 KBS 1TV의 한 역사 프로그램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프로그램 이름이 하도 자주 바뀌어 요즘은 별로 탐탁찮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주제가 ‘동학농민혁명’이고,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해 알기 쉽게 풀어나가는 진행방식이 좋아 끝까지 보게 되었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가혹한 세금 수탈과 학정에 분노한 농민들이 들고 일어난 배경에서, 전주성을 점령한 동학군이 조정과 화해하고 전라도를 중심으로 집강소를 설치해 지방 관리들의 폭정 일소와, 신분차별 철폐를 요구하고, 나라를 외세에서부터 구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동학의 ‘보국안민’(輔國安民) 정신을 강조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2차 농민봉기에서부터 우금치 전투에서의 패배에 이르러서는 진행하는 여자 아나운서의 어처구니없어 해 하는 말투가 역력해지더니, 서양에서 도입한 신식 전투 방식과 기관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이 낫과 죽창에 몇 자루의 구식 화승총을 가진 동학농민군을 무자비하게 살육했다는 설명에서 치를 떨었다. 그러다가 탐관오리 조병갑이 처벌받기는커녕 일제에 의해 오히려 고등판사에 임명되어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에게 사형을 언도했다는 부문에 이르러서는 말을 잇지 못하더니, “일제의 식민지 전략 길목에 이렇게 중요한 농민운동이 있었는데 (자신은) 정작 학교에서 제대로 배운 바 없었다”고 한탄하며 말미에 울먹이다가 끝내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엘리트 집단에 속하는 공영방송 아나운서의 이 같은 고백은 우리 학교 현장에서 제대로 된 역사교육이 없었음을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역사는 늘 기록하는 사람들의 시선이나 권력자의 의지에 따라 바뀌기 마련인지라 남자로서 치욕적인 궁형(宮刑)을 받으면서까지 사마천은 엄정하고 객관적 서술인 춘추필법으로 <사기>를 썼다. 우리의 조선왕조실록 또한 역사적 사실을 시대 순에 따른 편년체로 기록해 세계가 인정하는 기록유산이 되었다. 특히 민중들의 저항의 역사는 오늘날 ‘현대의 사관(史官)’이라 할 수 있는 언론인의 시각이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30여 년 언론인 생활을 해온 필자로서는 70년대 유신 정권의 3선 개헌과 긴급조치, 부마항쟁, 80년대 전두환 군사정권의 폭압과 광주 민중학살, 언론 통폐합, 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지는 한국 현대사에서 참으로 부끄러운 언론인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시대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 하더라도 늘 민중들의 항쟁에서는 공권력의 시각에서 기사를 썼고, 자연히 화염병을 든 시위대의 폭력성을 부각시켰다. 또 노동자 대투쟁 때는 그들 주장의 터무니없음과 사용자의 입장을 주로 강조했다.

79년 10월, 대통령 욕만 해도 잡아가는 긴급조치가 발동돼 부산과 마산 시민들의 저항이 갈수록 거세어지자, 부산과 경남 일원에 계엄령과 위수령이 발령되고, 옛 부산시청 앞에는 완전 무장한 군인들과 탱크가 살벌하게 배치되었다. 얼굴에 위장 페인트칠을 하고 착검한 자세로 서있는 근엄한 보초군인들을 보고 지나가던 젊은 여성들이 웃었다며 총 개머리판으로 얼굴을 돌려 쳐 피를 흘리자 이를 본 시민들이 내가 속한 방송국에 제보했으나 그날 뉴스시간에 단 한 줄도 나가지 않았다. 또 밤 10시 통금시간이 조금 지나 부산 남포동의 한 가게 점원이 2층 창살에 말려두었던 운동화 한 짝이 떨어지자 이를 줍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가 지나던 계엄군에게 적발되어 구타를 당하고 길거리에서 팬티만 입은 채 꿇어앉아 있어도 기사 한 줄 쓰지 못했다. 통행증을 가진 우리 일행을 가까운 여관으로 안내했던 한 젊은 장교는 건네준 사제담배 한 개비를 피우며 “공산 게릴라 부대가 부산 일원의 후방을 점령한 줄 알았다”고 쑥스럽게 웃었다.

10.26에 이어 쿠데타를 일으킨 신군부는 언론의 모든 기사를 검열하기 시작했다. 군대 군(軍)자만 들어있어도 원고지에 먹지를 끼어 눌러 쓴 육필기사(2부 복사)에 “검열 필” 도장을 받을 수 없었다. 몇몇 젊은 기자들을 중심으로 아예 잣대에 응하지 말고 검열 받아 텔렉스로 내려오는 통신 기사를 그대로 받아 뉴스를 메꾸자고 제의했지만 데스크 진은 괘씸죄에 걸릴 수 있다며 기사 검열에 충실히 응하도록 했다. 그렇게 해서 신군부가 어느 정도 안정되자 언론 강제 통폐합이 이뤄져 필자는 직장을 KBS로 옮기게 되었다. 이 시기에 이른바 ‘땡전 뉴스’라는 한국 언론사에 씻을 수없는 치부가 드러나게 되었고 수많은 왜곡, 편파보도와 권언 유착의 폐해가 곳곳에서 드러나 마침내 87년 6월 항쟁을 불러오게 되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87년 봄 ‘체육관 대통령’을 뽑는 호헌조치에 반대하는 시위가 부산 광복동과 남포동 등 중심가에서도 연일 벌어지자, 사건기자로 늘 현장에 나가있던 필자는 엄청나게 쏘아대는 최루탄 때문에 눈물 마를 날이 없었다. 하지만 나의 기사 시각은 주로 경찰 진압부대 쪽에서 시위 군중들을 바라보았다. 무자비한 시위 진압으로 악명 높던 경찰 ‘백골부대’의 폭력성에 대해서는 단 한 줄의 기사도 방송에 내지 못했다. 내부 검열을 넘어서 어차피 뉴스에 반영되지 않는 기사 쓰기를 포기하는 자기 검열을 하게 됐고, 시민들의 항의 전화에 짜증이 나 욕설에는 욕설로 대응했다. 당직으로 회사에 있는 날은 일보다 시민들의 항의전화 받는 일이 고역 중에 산 고역이었다. 기자로서의 무력감과, 언론인으로서의 역할과 정체성에 혼란이 일어났음은 물론이다. 이렇게 차츰 현실에 순화되어갔다.

87년 5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에 의해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 조작 사실이 밝혀지자 시국은 걷잡을 수 없이 파행으로 치달았고 시위 열기는 더욱 고조되어 갔다. 87년 6월 이한열 군 최루탄 사망사건으로 민주화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6월 18일 부산역에서 서면으로 이어지는 간선도로는 시위 군중들로 가득 찼다. 나는 이날 서울에서 내려온 낙하산 보도국장의 긴급호출로 회사 옥상에서 비상 대기했다. 취재 대신 시위대가 방송국에 들어 닥치면 소방호스로 물줄기를 쏘아 진압하라는 어처구니없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초량 사옥 옥상에서 내려다 본 시위 행렬은 장관이었다. 그처럼 도도한 사람들의 물결을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제발 엉터리 방송국을 박살내다오! 라고. 시위 행렬은 회사 앞에 이르러 “KBS 각성하라!”는 등 몇 가지 구호를 외치며 굳게 닫힌 철문을 선두에서 몇 번 흔들자마자 마치 종잇장처럼 훌렁 열렸다. 이어서 현관문을 가린 가로 차일도 스르륵 흘러내리며 시위대들이 막 건물 안으로 진입하려는 순간 선두의 한 젊은이가 정문 기둥 위에서 “질서! 질서!”를 외치자 시위대는 주춤하다 물러섰다. 당시 1급 보안시설이었던 방송국 점거는 후유증이 큰 만큼 사태의 심각성을 재빨리 파악한 시위 주도층의 순발력 있는 판단이 이뤄진 셈이었다. 뒤늦게 도착한 경찰 진압 차는 회사 일대에서 최루탄과 방향이 일정하지 않고 이리저리 튄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지랄탄’을 얼마나 쏘아댔는지 저녁 늦게 까지 초량동 고관 일대는 매캐한 연기가 자욱해 우리는 시장 통에서 독한 술로 목구멍을 씻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벌써 30년 가까이 지난 시절의 풍경이지만 나는 그때 시민들의 분노 가득한 저항의 물결이 가지는 위력을 소름끼치도록 바라보았다. 시국의 엄중함과 민중들의 분출하는 희망을 외면한 채 굴종의 언론사 한 가운데 서있는 무력감을 온몸으로 느꼈던 것이다. 이렇게 수많은 민중들의 피땀으로 이룩한 민주화는 독재정권에게 부역했던 온갖 언론사에도 바람이 불어 내부 감시자로 자임하는 노동조합들이 차례로 만들어졌다. 언론의 자유를 언론 스스로 쟁취한 것이 아니라 민중의 힘에 편승해 얻은 것이다. 나도 과거를 반성하는 의미에서 일정기간 언론 민주화운동에 힘을 쏟았고, 90년 4월 방송 민주화 투쟁에 앞장 서 40여 일간 파업도 해봤다. 자연 서있는 위치가 바뀌면서 주위 풍경도 다르게 보였다. 하지만 “기자는 기사로 말한다”라는 명제 앞에는 늘 부끄럽다. 그리고 오늘 날 기성 언론들은 여전히 권력과 자본에 취약하다. 또 상당수 언론들이 여전히 권력의 편에서 민중을 바라보고 있기도 하다.

나는 지난 6월 ‘6월 항쟁기념사업’의 하나로 기획된 한 학술대회에서 부끄러웠던 나의 언론인 시절을 회상하며 “저항하기 위해 기억해야 하고, 기억하기 위해 저항해야 한다”는 내용을 주제로 발표한 적이 있다. 지난 시절 현역 언론인으로는 내가 유일한 발표자였다. 행사 주최 측에 따르면, 당시 권력의 편에 서서 독재정권에 부역했던 부산지역 신문, 방송사에서 아무도 나오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연 나의 발언에 시선이 집중됐고 ‘KBS 시청료 거부운동’을 폈던 이들을 중심으로 권력에 편승했던 과거 KBS의 보도 행태 뿐 아니라 현재의 문제점에 대해서도 지적과 비난을 쏟아냈다. 나는 부끄러웠다. 하지만 부끄러움을 모르고 여전히 권력 편에 서서 민중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는 기존 언론들과 보수 미디어 문제에 대해 주의를 환기할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한 1894년 한국을 방문한 영국의 여행가이자 지리학자인 이사벨라 비숍 여사는 동학농민군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김개남의 잘린 머리가 서울 한 복판에서 조리돌리고 개에게 물어뜯기며 아이들의 장난질로 모욕당하는 것을 지켜보며, 동학군 지도자들은 너무나 확고하고 이성적인 목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반란자들’이라기보다 ‘무장한 개혁자들’이라고 불렀다. 어느 누구보다 120년 전 한국이 처한 현실과 하층민의 신산한 삶에 대해 따뜻한 시선으로 보고 여행 기록을 남긴 비숍은 ‘한국에 부치는 마지막 글’에서 “한국은 아직도 단지 두 계급, 즉 약탈자와 피약탈자로 구성되어 있다. 면허받은 흡혈귀인 양반계급으로부터 끊임없이 보충되는 관료계급, 그리고 인구의 4/5인 문자 그대로의 ‘하층민’이 그것이다. 후자의 존재 이유는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에게 피를 공급하는 것이다(<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이인화 역, 도서출판 살림, 2012)."

비숍의 표현대로 흡혈귀에게 끊임없이 피를 공급하는 그 농투성이들이 오히려 나라를 걱정해야 할 임금을 비롯한 정치 지도자들을 대신해서 들불처럼 일어나 정의와 평등과 자주의 정신을 드높이 외쳤던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은 그 뒤 일제에 의해 철저하게 무시되고 반란으로 매도되어오다가 100주년인 지난 1994년에야 가까스로 명예회복을 했다. 더구나 친일파들은 오랫동안 동학에 가담했던 사람들과 그 가족들을 탄압했다. 또 고부군수 조병갑을 비롯한 친일파 후손들은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 기세등등하게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 근현대사 굽이굽이마다 불의에 맞서 정의의 강물을 바로 돌린 이들은 정치 지도자도 아니요,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들도 아니요, 내가 기자시절 공권력 쪽에서 마주본 바로 이름 없는 민중들이었다. 그들이야 말로 진정한 이 땅의 하늘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이 곧 하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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