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현대인물을 찾아서, 가마골향토역사연구원장 주영택 편] ‘부산 바로 알기’ 발품 60년...부산을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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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현대인물을 찾아서, 가마골향토역사연구원장 주영택 편] ‘부산 바로 알기’ 발품 60년...부산을 기록하다
  • 편집국장 차용범
  • 승인 2019.03.08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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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사 연구가 주영택에게 부산 지방사의 길을 묻다 / 편집국장 차용범
이 글은 인터뷰 시점이 2014년인 까닭에 일부 내용은 현 시점에서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부산 해운대에서 나고 자라 역사학을 전공했다. 대학 졸업과 함께 교직에 투신, 40년 동안 청소년 역사교육에 헌신했다. '부산 바로 알기'에의 뜨거운 열정과 끊임없는 발품으로, 지난 60년 부산 전역을 보고, 이해하고, 해석했다. 문헌과 현장을 잇는 역사복원 작업과 함께, 오직 확실한 사료(史料)를 바탕으로, <우리 고장 역사의 발자취> <가마골 역사 이야기> <해운대 역사와 문화를 만나다> <부산의 속살 명소를 탐하다> <발로 찾은 부산의 전설 보따리> 같은, 온 세대가 함께 할 역작들을 저술했다. 가마골향토역사연구원 주영택(朱永澤, 82, 2019년 기준) 원장의 평생 스토리다.

향토역사연구가 주영택 선생은 '부산 바로 알기'에의 뜨거운 열정과 끊임없는 발품으로, 지난 60년 부산 전역을 보고, 이해하고, 해석해 온 특출한 삶을 살고 있다(사진: 차용범 제공).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그 준엄한 경고에도 역사인식은 크게 부족하다. 일본은 날로 역사왜곡의 깊이를 더하며 우리 역사를 흔들어대고 있다. 이 시대, 척박한 연구환경 속에서 평생을 향토사 연구에 매달려 온 그 저력은 어디서 나오는가? 전체 역사의 맥락 속에서 부산향토사가 갖는 위상과 의미는 어떠한가? 도시화의 열풍 속에서, 부산사람들이 알아야 할 역사는 무엇인가? 부산의 정체성을 올바르게 세울 주제는 또 무엇인가? 향토사 연구가의 특출한 삶 속에서 그 답을 찾는다.

[약력]

1938년 부산 해운대 출생. 부산대 사학과, 경성대 교육대학원 역사교육 전공. 2000년 동백중학교 교장 퇴임. 부산시사 편찬위원, 부산시 지명위원, 부산100경 자문위원, 부산시 동상∙기념비 및 조형물 건립 심의위원 역임. 현 가마골향토역사연구원장, 국사편찬위원회 부산사료조사위원, 부산교통공사 도시철도역명 심의위원, 녹조근정훈장(2000), 해운대구민 애향대상(2004). 저서 <우리 고장 역사의 발자취>(1998) <가마골 역사 이야기>(2000) <해운대 역사와 문화를 만나다>(2010) <부산의 속살 명소를 탐하다> <부산의 자연마을> <부산지명총람>(공동집필) <주영택이 발로 찾은 부산의 전설 보따리>(2013) 등.

부산 향토사 대가의 ‘부산 뿌리찾기’ 한 평생

'철길 따라 해운대 80년 역사 속으로 들어가다'-동해남부선 스토리텔링 걷기. 부산 한 유력신문의 최근 '주말&엔' 섹션 특집 제목이다. 동해남부선 폐선부지 활용방안을 둘러싸고 부산시장 선거 출마자들이 두루 뜨거운 설전을 벌일 즈음, 이 신문은 그 폐선부지의 속 깊은 역사에 주목한 것이다. 지역언론이 오늘의 '현상'을 좇으면서 과거의 '역사'에 마음먹고 주목했다? 정말 반갑지 않은가?

이 특집 현장에서, 향토사학자 주영택 원장이 해설을 맡았다. 담당기자에게 궁금한 바를 물었다. 어떻게 선생을 모셨냐고. 기자는 명쾌하게 대답한다. 해운대구청에 '해설을 할 만한 분'을 추천해 달라고 했더니 "향토사를 잘 알고 계신 분, 해운대에서 나고 자라 해운대 역사 책까지 내신 분"이 있다고 추천하더라. 해당 구청이 언론사에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는 향토사학자가 있다. 또한 자랑스럽지 아니한가?

Q. '철길 따라 해운대 80년 역사 속으로 들어가다', 그 신문특집은 부산사람에게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기사였다. 동해남부선 우동-송정 구간, 지난 해 12월 열차 운행을 멈췄다. 우선 이 철길의 역사적 가치부터 더듬어 달라.

“동해남부선은 부산과 경북 포항까지 147.8㎞ 길이의 철도 노선이다. 이 철로의 부산~해운대 구간은 1934년 일제 강점기 때 뚫렸고. 부산 도심에서 동해안 일대를 연결하던 이 철로의 일부, 곧 해운대 노선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거다. 현재 미포~송정역, 춘천 인근까지, 일부 구간을 제외하곤 철로를 걷어내는 상태다. 우선 일반시민들의 걷기 코스로 개방해 둔 거다. 이 구간, 겉으로는 그저 '철길'로만 보일 터이지만, 알고 보면 해운대의 온전한 역사의 현장이다. 지금은 초고층 건물이 빽빽한 해운대 마을, 예전에는 당시의 신시가지이기도, 피란민들의 일터이기도, 인기 관광지이기도, 전쟁의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특히, 해운대 지역은 3만 년 전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산 유적이 있는 곳이다. 부산의 '뿌리'라고나 할까.“

동해남부선 철길, 역경 속 산 선조 역사 오롯이

Q. 해운대에서 나고 살았으니, 해운대 철길에 대한 생생한 기억도 많겠다. 향토사의 맥락에서 그 기억들을 풀어 보면-.

“동해남부선은 당시 부산 도심과 외곽 해운대를 철도로 연결하려 건설한 것이다. 표면적 이유, 1930년대 해운대 지역이 온천, 골프장 같은 관광지로 각광을 받으면서 해운대로 유람 오는 일본인을 수송할 교통수단이 필요해서였다. 실제 동해남부선이 뚫리면서 해운대와 부산 시내로의 교통이 원활해졌고, 해운대는 외곽 유원지가 아닌 부산 생활권에 들게 됐다. 하지만 국내 철도의 탄생이 그러하듯, 동해남부선 역시 일제의 자원수탈을 위한 거다. 어렸을 적(일제강점기) 어머니랑 동해남부선을 탈 때면 쌀 같은 귀한 곡물은 꼭꼭 숨겨야 했다. 곡식이고 광물이고, 닥치는 대로 빼앗겼으니.

그런 역경 속을 산 선조의 역사, 동해남부선과 함께 오롯이 남아있다. 학생에게는 통학열차로, 보따리 상인에게는 수확한 곡식이나 어산물을 시내 장에 내다 파는 이동수단으로, 시내 공장으로 출근하는 직장인에게는 통근열차로, 관광객에게는 해운대 해안선과 해, 달을 보기 위한 관광열차로.... 우린 이 80년의 역사를 기억하고 되새겨야 한다.“

최근 한 신문의 '철길 따라 해운대 80년 역사 속으로 들어가다' 특집에서 현장 설명을 하고 있는 주영택 원장. 그는 지금 기차가 다니지 않는 우동-송정 구간 역시, 일제 자원수탈기 속의 역경 속을 산 선조의 역사가 오롯이 남아있다고 강조한다(사진: 차용범 제공).

주 원장은 신문특집 취재 때 해운대 우동 올림픽 교차로-청사포 8㎞의 '스토리텔링 걷기' 구간을 걸었다. 그 기찻길 일원의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를 얘기하면서. 예전의 승당(僧堂)마을(지금 동부아파트∙경동아파트 자리)에서부터, 운촌(雲村)마을(부산기계공고 앞 오션타워 일원)-해운대 온천마을(해운대구청 일원)-와우산(臥牛山)(달맞이언덕 일원)을 두루 거쳐 가며. 그 철길 중 미포 끝에 터널 하나가 있다. 고두백이(고두말) 지점이다. 이 구간의 해운대 해수욕장 해안선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아름답다.

승당, 운촌, 별장마을, 와우산..., 지금은 잊혀지는 이름이지만, 이 이름들은 글쓴이에겐 아직 생생하다. 1980년대 일선 신문기자 때 이 지역을 매일같이 쏘다니며 오늘처럼 변천하는 과정을 눈여겨 본 것이다. 지금 부산의 현대적 번영을 상징하는 마린시티 역시 1988년 서울올림픽 때 요트경기장을 건설하며 매립, 조성한 지역이다. 그 한 세대 전의 풍경을 벌써 ‘역사’로 얘기하는 것이니, 역사의 망각은 또 얼마나 성급한 것인가.

이 동해남부선 폐선부지 개발방향을 둘러싸고, 논란이 많았다. '특정세력 개발참여설'이며 '참 나쁜 후보'며 하는 입씨름을 벌였다. 이 폐선부지가 산책로와 자전거길 같은 모습으로 온전히 부산시민의 품으로 돌아갈지, 상업적 개발이 끼어들지, 그것은 뜨거운 정책대결의 주제이기도 했다.

“향토 역사 책 만들 터” 소년 적 다짐 실천

Q. 해운대의 지역사를 알차게 담은 <해운대 뿌리찾기-역사와 문화를 만나다>라는 책을 발간했다. 어떤 내용으로, 어떤 뜻을 강조하고 싶었나?

“해운대의 역사, 문화, 지명까지 여섯 분야에 68개 주제를 다룬 책이다. 해운대, 급격한 도시화, 산업사회로의 전환과정에서 향토 역사와 문화, 환경을 많이 잃지 않았나. 과거 발생한 사건의 현상과 자취를 보며, 구전(口傳) 또는 기술(記述)을 바탕으로 내가 직접 보고 듣고 기록한 것, 나아가 금석문, 탁본 같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통해 엄밀하게 고증하며 저술했다. 이 책으로 나는 나를 키워준 해운대 지역사회에 나름 보답했다.”

해운대에 보답했다? 사연이 있다. 그는 해운대 온천장(지금 해운대 31번 버스종점 일원)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아버지는 넓은 어장과 어선 5척을 경영한 거부였다. 아버지는 일가친척을 두루 먹이고, 입히고, 재우며 돌봐온 당대의 자선사업가였다. 주 원장이 역사 과목에 흥미를 느낀 것은 초등 6년 때, 담임 선생이 재미있게 들려주는 단군신화와 고주몽 얘기에 푹 빠졌고, 기말시험에서 학급 65명 중 혼자, 만점을 받았다. "역사 하면 주영택!"이란 찬사를 들으며 역사 공부에 달려들 마음을 먹었다. 그러면서 다짐했다, 내 나이 70 즈음 때면 역사 책 한 권을 만들어 고향에 바치리라고. 그 소년 때의 다짐을 정말 나이 70 들어 실천한 것이다.

2004년 해운대구청 ‘해운대신문’ 명예기자 연수교육 때 해운대 일대 유적을 답사하고 동백섬 최치원선생 동상 앞에서 기념촬영(사진: 차용범 제공).

이 책에는 1926년 동래고보 학생들이 일본인 마쓰다 사감을 배척하는 촛불시위를 해운대 장산에서 벌인 사실과 그 장소를 밝힌 얘기가 있다. 해운대 장지마을에서, 6∙25전쟁 때 잠시 머물렀던 순정효황후(조선 마지막 임금 순종의 비)의 유품인 백납병풍을 찾아 부산박물관에 기증토록 주선한 이야기도 담고 있다. 실제, 해운대 장산에는 주 원장의 업적을 공인(?)한 현장이 많다. 폭포사 올라가는 절골 어귀에 '장산항일촛불의거' 장소를 밝힌 안내판이 있다. 장산이 조선 왕실 창덕궁의 소유라는 '이산(李山)' 표석 자리에는 "...주영택 원장이 표석 17개를 발견하였다"는 안내도 덧붙이고 있다.

“역사 잊은 민족에 미래 없다” 역사 제대로 알아야

왜, 지금, 향토사학자를 만나는가? 이쯤에서, 그 연유를 짐작할 터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단재 신채호 선생의 깨우침이다. 우리가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다. 특히 동북아 정세는 지금 격변을 거듭하고 있다. 일본은 하루가 멀다 하고 역사왜곡을 거듭하고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 역시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역사의 근간을 흔들려는 불순한 시도다. 우리나라가 겪은 수난의 역사, 두 번 다시 반복할 순 없지 않나?

우리 청소년의 역사인식? 무지의 걱정을 넘어 심각한 수준이다. 얼마 전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나온 물음이다, "야스쿠니 신사를 아는가?" 한 학생의 대답은 충격적이다, "신사숙녀할 때 신사인 것 같다. 가수 싸이의 노래처럼 '야스쿠니 젠틀맨' 아닌가?" 우리 역사교육의 무책임은 이 정도다. 일본의 역사왜곡이며 중국의 동북공정 역시 큰 원인은 우리의 무관심이다. 우리, 역사를 제대로 알고 대응해야 한다. 우리의 역사와 영토는 우리 스스로 지켜가야 한다.

부산의 역사? 3만 년 전 구석기 시대, 해운대에 사람이 산 흔적이며, 임진왜란, 부산포 개항, 6∙25전쟁 속의 부산을 바로 아는가? 조상들이 대대로 살아왔고 우리가 삶을 영위하는 곳, 우리 '향토'의 역사를 아는가? 최근 각 지방의 향토사 연구는 활발하다. 웬만한 지자체 단위에서 두루 지방사지(地方史誌)를 내고 있다. 부산 역시 향토사에의 관심이 날로 뜨겁다. 부산과 부산사람들이 살아온 발자취, 문화유적, 도시개발 열풍 속의 역사현장에 대한, 많은 부산사람의 관심이다.

Q, 지난해 <부산의 전설보따리>라는 책을 발간했다. 국제신문의 ‘사람&이야기’면에 ‘주영택이 발로 찾은 부산의 전설 보따리’라는 이름으로 연재한 전설 63편을 책으로 만든 것이라고….

“40여 년 동안 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치며, 우리 고장에는 어떤 전설과 문화재가 존재하고 있는지 늘 궁금했다. 주말이면 현장을 찾아 촌로들의 입을 통해 자료를 모아왔다. '범어사 창건' 등 신문에 실린 63편의 전설을 최근 버전으로 보완하고, '원효스님과 미륵암 쌀바위' '운수사의 두꺼비 바위' 등 14편을 추가, 모두 77편을 책으로 묶었다.”

그는 책의 출간과 함께, 어린이 전문서점에서 신간발표회를 가졌다. '우리 동네 부산박사 주영택 할아버지와 만남'이란 이름으로. '전설 할아버지'로 어린이들과 대화를 나누는 형식이다. 그는 지금까지 직접 촬영한 '부산 역사' 사진 1만 5000장 중 신문이나 책에 오른 전설의 현장 80여 장도 함께 전시했다. 배고픈 대학시절인 1957년부터 니콘 카메라를 구입, 부산지역 역사의 현장을 발로 뛰고 마을 촌로들로부터 전설을 채록하며 사진을 촬영해온 과정을 들려주면서.

Q. 말 그대로 직접 현장을 찾아 수집 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책을 만들었다. <부산의 전설보따리> 한 권을 완성하는데 어떤 공력을 들였나?

“교직생활 중 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치면서, 비슷한 시기 우리 고장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고, 어떤 문화재와 전설이 존재하고 있는지 그 의문을 풀어간 과정이다. 부산의 경우, 지리적 특성 때문에 1592년 임진왜란, 1876년 부산포 개항, 1950년 6·25전쟁 같은 역사적 전환기에 기인하는 전설도 적지 않다. 이러한 역사 바탕 위에 반평생 부산의 구석구석을 훑으며 전설을 채록했다. 이렇게 모은 전설이 무려 350편. 충·효·예 등 인간의 삶이 묻어나는 생활전설, 지명전설, 외국인과 접촉한 일명 대외전설 등이다.”

그의 전설이 유달리 진정성 있게 다가오는 이유는 바로 발품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로만 그치는 민담이나 신화와 달리, 그의 전설의 종착역에는 장소나 전설의 존재 여부를 입증하는 그 무엇이 반드시 존재한다. 신문 속에 등장하는 사진은 수십 년 전과 지금의 모습을 비교하기 위해 모두 그가 직접 찍은 것이다.

남명학 부산연구원 박태신 연구원장은 이 책의 발간을 높게 상찬했다. "'우리 고장 전설을 낱낱이 파헤친 부산의 산 역사의 기록이다. 역사와 현장을 알려는 이에게 다시없는 훌륭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필자는 '지붕에서 기와를 던지며 왜군에 맞선 아낙네' 편을 쓰면서 충렬사의 의열각을 참배하고 복천동 송공단을 거쳐 수안동 동헌 지붕의 기왓장까지도 살폈다. 발로 찾아가면서 소개한 부산사랑의 그 마음에 뜨거운 찬사를 올린다"고-.

Q. <부산의 전설보따리>가 끝이 아니라, 앞으로 부산의 역사를 책으로 만드는 작업을 계속할 계획이라고…?

“그렇다. 이 책은 '부산의 생활전설' I편이다. 후속 편은 '부산의 지명 전설(Ⅱ)' '부산의 대외 전설(Ⅲ)'이 될 것이다. Ⅱ편에는 부산의 8대(臺), 금정산 8경, 범어사 3기, 수영 8경, 다대포 8경과 고당봉 달음산 등 부산의 산, 낙동강 동천 춘천(봄내) 등 부산의 강과 하천, 모너머고개, 아리랑고개 등 부산의 고개, 섬 등을 소개한다. Ⅲ편에는 임진왜란과 부산포 개항, 그리고 6∙25전쟁 때 동∙서양인들이 들어와서 그들과의 교류 관계를 채록한 대외 전설을 실을 생각이다.”

“과거 없이 지금 있겠나?” 체험론적 진리 설파

Q. <부산의 전설보따리> 전에도, <그 추억을 품은 금정이야기> 4권 전집을 2012년 10년만에 마무리했다.

“사진집 <그 추억을 품은 금정이야기>를 냄으로써 2005년 <전설-그 사연이 숨 쉬는 금정 이야기>, 2006년 <지명-그 터에 얽힌 금정 이야기>, 2009년 <역사-그 역사가 묻힌 금정 이야기>에 이어 전집 4권을 마무리했다. 4권 분량만 해도 1000쪽이 훌쩍 넘는다. 향토사나 지역사는 교과서에도 잘 나오지 않는다. 직접 발품을 팔아 현장의 흔적을 담아냈다. 금정산성의 역사 핵심인 '금정산 관아 터', '해월사지', '정현덕 송덕비' ‘범어사기’ 등을 발견·복원한 일, 조선시대 대표적 교통로인 '황산도'를 찾아낸 것을 잊을 수 없다.”

이번 4권에는 금정산, 금정산성, 전통사찰, 자연·역사·고분·문화 유산, 금석문, 자연마을에 관한 사진을 싣고 있다. 지난 1957년부터 55년간 금정 지역에 묻혀 있거나 잘못 이해해 온 역사 문화를 바로잡고 재조명하기 위해 하염없이 셔터를 누른 사진 5000여 장을 추리고 또 추린 것이다. 그는 새삼 강조한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자신이 사는 고장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며 모르고 사는 것 같다고. 그러면서 되묻는다. 과거가 없었다면 지금이 있겠는가고.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현재를 알아야 미래를 내다볼 수 있다는 체험론적 진리이다.

2003년 금정구청 관광안내 도우미 연수교육에서 강의하는 주영택 원장(사진: 차용범 제공).

Q. 2005년과 2009년 발간한 <그 사연이 숨 쉬는 금정 이야기>와 <그 역사가 묻힌 금정이야기>에는 금정구와 관련된 역사 이야기가 가득하다. 금정 역사 책으로는 독보적이다. 그 많은 이야기를 어떻게 모았나?

“600번 이상 금정산을 오른 결과물이다. 지금이야 널리 알려진 '범어 3기'(원효석대·자웅석계·암상금정)와 '금정8경'은 1947년 범어사에서 만든 <선찰대본산 범어사 안내>라는 제법 두꺼운 안내서를 1989년 입수, 2년간 온 산을 뒤져 확인한 것이다. 금정산의 숱한 바위군을 상징하는 '천구만별(千龜萬鼈·천 마리의 거북이와 만 마리의 자라)'이란 용어도 나의 작명이다. 금정산의 차(茶) 군락지 5곳, 금정산의 기우소가 놋정바위라는 사실, 범어사의 경계표시인 범어사기(석표) 10개 발견, 해월사지가 지금의 부산학생교육원 일대라는 사실 등도 밝혀냈다.”

1997년 한창 답사에 바쁠 때 금정산 답사 중(사진: 차용범 제공).

Q. 부산 동래에서 출발, 양산과 밀양을 연결하는 ‘황산도(黃山道)’ 복원도 직접 발로 뛰어 찾아냈다고 들었다. ‘영남대로’의 황산도를 찾아 나선 이유는 뭔가?

“사람들이 황산도를 자꾸 '영남대로'라고 부르지만, 문헌을 보면 사실은 그게 아닌 것 같더라. 엄격히 말해 황산도는 동래 휴산역에서 출발해 양산과 밀양을 연결하는 영남대로의 마지막 노선이다. 그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5년 동안 여름이고 겨울이고, 부산서 밀양까지 구석구석 돌아다녔지. 말 그대로 '비석 찾아 삼만리'를 실행했다. 결국 그 발품 덕분에 황산도 옛길을 이 길은 조상들의 피와 땀이 서려 있는 길이면서 많은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는 역사의 길이기도 하다.”

주 원장은 길을 찾기 위해 먼저 비석부터 찾아나섰다. 비석은 주로 송덕비, 충렬비, 효자비 등으로, 주민들의 충효사상을 고취시키는 교육적 기능을 담당했다. 비석들은 대부분 길을 따라 세워져 결과적으로는 길을 안내하는 표지석의 역할을 했기 때문. 주 원장은 제일 찾기 어려웠던 비석으로 '황산이방최연수애휼역졸비'를 꼽는다. 부산 금정구 선두구동 당산나무 아래 엎어져 있던 비석이다. 그는 "새로운 길이 생기면서 주변이 너무 많이 변했고 마을사람들도 비석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으며, 나무 아래에 버려져 있어서 찾기가 어려웠다"고 설명한다.

Q. 부산 토박이라도 부산 향토사에 관심을 가지기란 쉽지 않다. 주 원장의 경우는 전공·직업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어떤 계기가 있었나?

“부산대 사학과를 나와 1965년부터 부산 경남지역 교육계에서 국사를 가르쳤다. 그것만으로 끝났으면 '향토사'라는 장르와는 담을 쌓고 살았을지도 모르지. 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치며 자연스레 의문이 들더라. 우리 고장의 역사는 어떤가? 아는 게 별로 없더라. 그러니 가르칠 수 있는 것도 별로 없고…, 하는 수 없이 주말이면 아내와 도시락 싸들고 언양 양산 울산의 산들과 유적지들 탐사를 시작했다.”

Q. 직접 발로 뛰며 향토사를 연구하는 일, 육체적, 정신적으로 만만치 않았을 터이다. 대체 부산의 향토사에 어떤 매력이 있기에 평생을 바쳐 연구 하는가?

“향토사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고장의 내력과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숨결이 숨어있는 보물단지다. 하지만 막상 파들어 가면 남아있는 자료가 거의 없다. 어쩔 수 있나. 발로 뛰어 그 흔적들을 찾아내고 어르신들 얘기를 채록하며 얻은 조각그림들을 하나하나 짜맞춰가는, 무슨 퍼즐게임 같은 거다. 아무리 힘들고, 또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부산의 역사를 찾아내고 또 바로 세운다는 일념 하나로 버텨왔다.

2010년 용두산공원에서 찾아낸 부산 화재를 예방하기 위한 부적비인 충신비(사진: 차용범 제공).

때때로 퍼즐의 빈 공간을 채울 수 있는 실증자료를 찾아냈을 때의 그 기쁨이란 말로 할 수 없다. 조선시대 금정산성을 방어했던 2개의 사찰 중 기록으로만 전해오던 해월사 자리(지금의 금성동 부산학생교육원 일원)를 찾아낸 것이나 산성 죽전마을에서 금정산성 관아 자리를 발견한 것도 바로 그런 거다. 범어사 토지 경계석들도 그렇게 찾아냈고.“

Q. 반평생을 바친 일인 만큼 지금까지 부산의 역사를 연구하고 조사한 자료들이 상당할 것이다. 지독한 자료 수집가로 소문 났다. 그 양이 어느 정도 되나?

“반평생 채록한 전설을 담은 수첩은 50권, 신문 등 관련 자료를 스크랩한 대학노트는 200권에 이른다. 그것도 '해운대' '동래' '금정산' '문화재' '불교' 등으로 분류해서. 사진자료는 더 풍부하다. 지금까지 사료 1만 5000건 정도를 갖고 있다.”

그의 연구원, 실상 부산 동래구 사직3동 110-17 그의 자택 방 3개 10여 평에 자리 잡고 있다. 방마다 온통 고취스런 자료 무더기여서 발 떼기가 어려울 정도다. 사방 벽도 온통 서가다. 부산고지도, 부산대관(大觀), 테마가 있는 한국문화, 금정산성종합정비계획, 역사의 땅 경주 같은 역사 책에, 한국의 고고학이란 일본서적까지.

향토사, 재야인문학 중 가장 전통 있고 활성화

Q. 올바른 향토사 연구에 가장 필요한 요소는 무엇인가?

“무엇보다 사료의 확보다. 사료는 역사라는 나무를 키우는 땅과 같다. 사료 속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사료로부터 영양소를 공급받지 못하면 쓰러지는 나무처럼 그 향토사 역시 생명력을 갖지 못할 터이다. 사료는 역사해석의 원천적 재료이기 때문이다.”

Q. 부산에선 누가 향토사를 연구하는가?

“부산 향토사, 역시 재야학자가 강세다. 부산에 오래 살면서 부산이 흘러온 삶과 이야기를 소상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학문제도 속 학자가 추상적∙보편적 이론에 머물기 쉬운데 반해, 이들은 지역민이 살아오고 있는 현실 속에서 함께 살면서 가까이서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최해군, 주경업, 홍영철, 이용길 같은 분들이다.”

한 지역지는 연전 재야인문학 찾기의 하나로 향토사 연구의 주소를 짚은 바 있다. 최해군 선생은 국어교사 재직 중 자료를 수집, 부산의 선사-현대 역사를 아우른 역사서 15권을 저술했다. 주경업 선생은 본디 화가였지만 미술, 음악, 문학에도 관심이 많았다. 부산민학회를 창립, 지역 역사와 민속에의 관심을 넓혔다.

홍영철 선생은 한국영화 자료를 수집, 정리하는데 40년, <한국영화자료편람>, <부산근대영화사> 같은 책을 발간했다. 이용길 선생은 50년 동안 지역미술의 자취와 기록을 꼼꼼하게 수집, 부산 미술사를 정립하는 초석을 마련했다. 주영택 원장에 대하여? 이 신문기사는 ‘제도권과 재야를 연결한 향토사가’로, 그의 이력과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Q. 부산의 역사가 다른 지역과 비교해 특별한 점이 있나?

“특별하다. 부산은 우선 ‘사포지향(四包之鄕)’ 아닌가. 예로부터 명향(名鄕)은 명산 명강 명해를 가져야 한다. 부산은 이 삼포(三包)에, 온천까지 가진 고장이다. 금정산 낙동강 동해∙남해에, 동래∙해운대 온천이다. 한 마디로 ‘사람 살기 좋은 곳’의 전형이다. 부산사람이 처음 자리잡은 곳, 곧 금정산과 해운대 장산 기슭에 구석기시대부터 선조가 살았다는 것은 그만큼 먹을 것, 머물 곳, 움직일 교통수단이 많았다는 얘기다. 부산의 해양문화 역시 그런 바탕 위에 자리 잡아 온 거다.

부산은 해양문화로 흥하기도 하지만 피해도 많았다. 임진왜란을 보라. 조선의 관문 역할을 하다, 당시 동래 지역은 근 100년 젊은이는 다 죽고 늙은이만 연명하는 폐허 시대를 겪었다. 지금 부산사람의 특질이라 할 끈질긴 생명력과 저항성 같은 것은 다른 지역에선 참 찾기 어렵다. 국가∙민족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초개처럼 바치는 그 애국애족 정신 역시 ‘동래 혼(魂)이라 할 만 하다. 우리, 이런 역사를 바로 알고, 향토에 자긍심을 가지며 긍정적 기질을 키워가야 한다.“

Q. 가마골향토연구원을 소개한다면…

“34세 때 10세 연하 처녀를 만나 결혼했다. 당시 역사교사 생활을 하며 휴일마다 유적지며 역사현장을 찾아다닐 때다. 아내가 늘 동행했다. 자가용 시대를 맞아선 운전도 해 주고. 2000년 2월 교직에서 퇴직, 해운대 와우산 기슭에 연구∙저술을 할 공간을 마련했으나 집에서 멀어 불편했다. 아내의 배려로 동래에 연구실을 갖췄다가 7년 전 지금, 자택 공간에 간판을 내걸고 향토사 연구를 하고 있다. 퇴직 전 책 2권을 내고 퇴직 후 10권을 냈으니, 정년 이후 이 연구소 활동에 바쁜 거다. 아직 육신을 놀릴 수 있을 때 더 많이 기록하고, 찾고 해야지. 아직 우리 땅의 기록들이 곳곳에 버려져 있고, 지금 그대로 놔두면 언제 사라질지 모르지 않나?”

학교현장, ‘국사’ 경시에 역사 스토리 나눌 기회 전무

Q. 국사편찬위원회 부산사료조사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최근 학생들의 역사의식에 많은 문제가 있다. 3·1절과 6·25전쟁을 잘 모르거나 잘못 알고 있거나…, 이렇듯 역사에 무심한 현상, 어떻게 생각하나?

“교육제도의 결함 탓이다. 내 교사 시절 학교마다, 추우나 더우나 주례(週例)조례를 했다. 조례, 교장의 훈화를 듣고, 전교생의 질서교육을 가다듬으며, 고학년-저학년이 만나는 소중한 기회다. 교장이 훈화를 하며, 때에 맞는 역사 스토리도 많이 전파했다. 지금, 월례조례도 갖지 않는 학교 많다. 국사도 사회과의 한 부분으로 편성하고 있고, 학생들이 국경일이든, 지역역사든 무슨 역사를 알 수 있겠나?

대학의 역사학 교육체계도 취약하다. 교수마다 전공을 세분화, 다른 전공은 잘 모른다. 지역학 프로젝트 역시 교수가 따서 (다른 지역 출신) 대학원 학생에게 맡긴다. 그들이 고작 촌로들의 경험담 정도 듣고 연구를 수행하니 그 결과에 뭐가 있겠나? 사학과 과목에 향토사도 꼭 넣어야 한다. 지금, 향토사 공부해선 밥벌이를 할 수 없으니 대학에서도 향토사는 뒷전이다. 맥이 끊어질 지경이다.“

Q. 초,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 대한 논란이 많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한 동안 역사에 이념을 투영시켜 좌파역사관을 집중 교육한 탓이다. 내 시절엔 올바른 역사관, 정통 역사관으로 공부했다. 지금, 특정 그룹에서 좌파 역사관을 확산시키고 있지만, 아무도 통제를 못한다. 역사에 왜 이념이 필요한가? 역사교육부터 제 자리를 찾아가야 한다.”

그는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의 역사를 찾으며 평생 ‘부산사람’으로 살았다. 그에게, 부산의 의미는 남다를 것이다. 그는 부산의 역사를 바탕으로, 평소 부산을 ‘살기 좋은 곳’으로 묘사한다. 영남지방에선 가장 먼저 선조가 삶의 뿌리를 내린 곳이니, 그런 역사를 바로 알고 부산을 자랑하며 살아야 한다는 지론이다. 그는 부산의 강점, 또는 부산사람의 특질을 어떻게 볼까?

“부산사람의 특질, 삶의 끈기, 명분 있는 저항, 남에 느긋한 배려정신이다. ‘서울 깍쟁이’란 말을 아는가, 부산의 역사를 더듬으면, 참 끈질긴 생명력에, 역사에 떳떳한 사상에, 남을 먼저 돕고 나를 돌보는 배려정신이 뚜렷하다.”

Q. 과거 부산과 비교한다면 지금의 부산은 얼마나 달라졌나?

“겉으론 세계 속의 선진도시로 성장했음이 확실하다. 속으론 그 자랑스러운 ‘부산정신’을 잊고 있는 것도 분명하다. 참 아쉽고 걱정스러운 일이다. 이 정도만 얘기하자.” 그는 부산의 정치인도, 지역언론도 ‘부산정신’을 망각한 행태를 자주 보인다고 꼬집는다. 필요할 땐 남을 찾고, 정작 남을 부추길 땐 외면하고, 그런 ‘서울 깍쟁이’ 짓을 한다는 것이다.

Q. 부산사람이라면 꼭 알아둬야 할 역사가 있나?

“당연하다. 임진왜란의 역사부터 똑 바로 알아야 한다. 임진왜란 전 기간 동안 줄기차게, 끈기 있게, 민∙관이 함께 저항한 곳은 부산 뿐이다. 일제 강점기 시절 독립자금을 가장 많이 낸 곳도 범어사다. 6∙25전쟁 때 외지 사람을 한껏 포용한 곳, 부산이다. 그런 부산의 끈기와 강단, 배려와 포용의 정신을 ‘부산정신’으로 알고, 오늘을 살며 내일에 대비해야 한다.” 그는 부산이 송상현 선생 동상을 모넘어고개(양정)에 세우는 것도 역사에의 무지 탓으로 본다. 꼭 세우려면 동래 수안동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 그 곳에 세우는가? 아는 사람도 없다는 한탄이다.

“향토사 연구, 밥 되지 않더라도 건강 닿는 한 계속할 것”

부산 향토사가 주영택, 그는 이제 나이가 들어 직접 발로 뛰며 자료를 찾고 해석하고 정리하는 작업도 쉽지 않을 터, 언제까지 부산의 역사를 찾는 일을 계속할 계획일까? 그는 단문으로 대답한다, “건강이 닿는 한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아내는 80세까지만 하라”는 의견이지만, 젊은이들도 ‘밥이 되지 않는 일“로 보고 외면하는 일을 그대로 보고 넘길 순 없다는 것이다.

젊었을 적 역사 유적지 현장답사 중 한 때.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고장의 내력과 조상들의 숨결이 살아있는 그 향토사 연구, 아무리 힘들고, 또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부산의 역사를 찾아내고 또 바로 세운다는 일념 하나로 버텨왔다고 자부한다(사진: 차용범 제공).

Q. 평소 건강은 어떻게 관리하나?

“따로 건강관리랄 게 없다. 난, 젊어서부터 술∙담배를 하지 않는다. 그럴 여유도 없었다. 그저 매일 답사를 다니며 많이 걷고,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니 아플 새도 없다. 요즘도 새벽 5시에 기상, 인근 쇠미산에 올랐다가 사직 보조경기장에서 운동기구 8종 세트를 하고 아침을 먹는다.”

Q. 어떤 사람으로 평가 받고 싶은가?

“더러 내 책을 읽어보고 평가하겠지. 부산에는 향토사에 ‘잘 난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나, 내 책에는 다른 책에는 없는 새로운 내용만 있다. 새로운 사료를 찾고, 해석하고, 기록했다. 그 밖에야 내가 뭐 한 일이 있나?” 그는 그저 겸양을 표현하되, 평생 걸어온 길에 대한 자부만은 확실하다.

Q. 앞으로 할 일은?

“많다. 시간이 모자란다. 마음이 급하다. 우선 <발로 찾은 전설 보따리> 2권을 더 내야지. 그리고 꼭 내가 해야 할 일도 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우리 민족의 많은 부동산이 조선총독부로 넘어간 역사를 정리해야 한다. 일제는 1910년부터 9년 동안 우리 반도에 대한 토지조사사업을 벌였다. 그 결과 주인이 뚜렷하지 않거나 등록대장에 없는 토지는 모두 조선총독부로 넘어갔다. 1918년부터 11년 동안은 임야조사를 했다. 역시 ‘무주공산’ 모두 총독부로 넘어갔다. 해운대 장산, 와우산, 금정산에서, 내가 찾아낸 ‘이산(李山)’ 표석, 금정산에서 찾은 ‘산(山)’ 표석들도 두루 조사, 발굴했다. 그런 역사를 정리해야 한다.”

그는 후세의 향토사 연구를 위한, 후대의 역사인식을 깨우치기 위한 책무를 다할 결심이다. 그는 표현한다. “60대에 시속 60Km로, 70대에 시속 70Km로, 80대엔 시속 80Km로 달려야 하리라”고. 요즘도 그 쾌속으로 진군해야 할 작업들을 수행하느라 하루가 바쁘다고. 그러면서, 덧붙였다. ”‘차용범이 만난 부산사람’이 나를 만나고 기록한다는 얘길 듣고 가슴이 벅차더라“고. ”그 인터뷰 준비를 하느라 우왕좌왕했더니 허리 통증이 오더라“고, ”근데 정말 오늘 인터뷰를 진행하니 그 허리통증도 싹 나은 것 같다“고-.

짐작컨대, 그는 세칭 역사학계의 (제도)밖에서 향토사학자로 활동하며 부산 향토사에 평생을 걸고도, 그 제도권과 주변의 야박한 인식에 서운함이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부산 역사학계에서 ‘재야’가 맡아온 영역이 넓고 깊은 것은 부인하지 못할 터. 그래서, 그는 향토사의 이론과 현장을 잘 융합시켜 온 ‘부산 향토사 연구의 주춧돌을 놓은 이’로 후세에 길이 남으리. 그가 다짐해 온 그 ‘버킷 리스트’ 역시, 그의 평생 열정과 자취를 새삼 확인시켜 주며, 부산사람으로 하여금 부산의 기억들을 나눌 수 있도록 감동을 주는 든든한 바탕일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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