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돈 천 달러로 85일간 미 대륙 6000km 사이클 횡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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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돈 천 달러로 85일간 미 대륙 6000km 사이클 횡단
  • 취재기자 임동균
  • 승인 2015.08.31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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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세 라이더 김준학 씨 등의 '무도'...록키산맥 폭설등 고난의 고비 넘고넘어
▲ 미국 그랜드 캐니언에서 힘찬 포즈를 취하고 있는 김준학 씨(왼쪽)와 김동완 씨(오른쪽) (사진: 김동완 씨 제공).

“Shut up, the lag(닥쳐! 이 다리야)!” 세계적 사이클리스트 ‘옌스 보이트’가 사이클 경기 중 다리가 찢어질 것 같이 힘들 때 입버릇처럼 했다고 알려진 말이다. 올해 마흔 다섯인 보이트는 이 시대 가장 무모한 사이클 선수로 대중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그의 주 종목 펠로톤(peloton)은 하루 동안 도로에서 자전거를 타고 달리며 경주하는 스포츠 경기다. 때문에 30대를 넘어선 선수는 펠로톤 선수 생활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그는 40대의 나이임에도 30대보다 더 패기 있고 무모하다. 특히, 그는 바람이 강하게 부는 경기 날이면, 사이클리스 대열에서 홀로 뛰쳐나가 바람과 맞서며 결승점까지 질주하는 무모함을 보여준다. 바람 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해 커다란 그룹으로 뭉쳐 달리는 것이 사이클 선수의 전형적인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 85일 간 김동완, 김준학 씨의 미국 자전거 횡단로(사진: 김동완 씨 제공).

한국에도 보이트만큼이나 무모하게 페달을 밟은 청년들이 있다. 바로 김준학(24, 대전시 서구) 씨와 김동완(24, 대전시 서구) 씨다. 그들은 2014년 10월 2일 단돈 100만 원씩 200만 원만 들고 미국 뉴욕으로 떠나, 나이아가라 폭포, 미주리, 로키산맥을 거쳐 로스앤젤레스까지 약 85일 동안 미국 11개 주를 거쳐, 5,800km를 달려 미국을 가로지르는 데 성공했다.

그들의 무모한 미국 횡단 자전거 모험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 드넓은 미국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계절과 온도에 적응하는 것은 좀처럼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더구나 100만 원씩만 들고 간 그들에게 굶주림은 최악의 시련이었다.

조수석에서 피어난 꼬마의 꿈

무모한 미국 대륙 횡단의 시작은 김준학 씨의 어릴 적 꿈에서 시작됐다. 그는 어렸을 적에 전국을 돌며 트럭 운전을 하는 아버지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시간이 많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주말마다 아버지 트럭에 올라타 아버지와 시간을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처음엔 아버지와의 시간이 좋아서 아버지 트럭에 동승했지만, 나중에는 낯선 지역의 차창 밖 세상을 보는 것이 너무나 좋아졌다. 그는 아버지 트럭 조수석에 타는 것을 주말마다 간곡히 기다렸다. 트럭을 타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다른 동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 재밌었다. 김준학 씨는 “그때부터 나중에 어른이 되면 낯선 곳을 찾아 모험을 떠나보고 싶은 꿈을 가지게 됐다”고 전했다.

하지만 준학 씨는 고등학교 때부터는 모험의 꿈을 잠시 접어둬야만 했다. 다른 학생들처럼, 책상에 앉아 대입시에 열중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대학교에 진학해서 대학생이 된 그는 비로소 자유를 느낄 수 있었다. 준학 씨는 방학이면 소소한 국내 여행을 떠나면서 어릴 적 꿈의 발판을 밟아나갔다. 하지만 그의 작은 자유 시간이 지속되지 못했다. 대학생이 된 지 1년이 지나, 그는 군에 입대하게 된 것이었다.

새로운 설렘

세월과 더불어 국방부 시계도 흘러, 군인이란 틀 속에서 갇혀 지낸 군에서 제대한 그는 평소의 모험기가 몸속에서 꿈틀거려, 학교에 돌아가지 않고 성이 찰 때까지 여행만 다니기로 다짐했다. 그렇게 준학 씨는 23세의 건장한 청년이 됐다. 그는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의 다짐대로 그는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몇 달 간 일을 한 돈으로 동해안을 자전거로 질주하는 여행을 떠나고, 돌아와 또다시 돈을 벌어 여행을 가고, 이러한 생활을 반복하며 모험가의 삶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그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도전이 될 기회를 맞이하게 됐다. 바로 자전거로 미국을 횡단한 사람의 블로그를 우연히 보게 된 것이다. 그는 여행지를 찾기 위해 블로그를 찾고 있던 중 미국을 자전거로 횡단했다는 블로그를 보게 됐다. 미국 횡단은 그에게 “왜 나는 여태 국내만 생각했을까?”라는 자탄과 함께, 그는 블로그의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리고 주저 없이 마음먹었다. 3개월 동안 돈을 모아 미국을 가로질러보겠노라고.

가장 마음이 편한 친구

미국 정복을 마음먹기 시작함과 동시에, 그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스쳐 지나갔다. 바로 어릴 적부터 같이 자라난 친구 김동완이었다. 준학 씨는 동완 씨를 미국이라는 타국에서 가장 의지할 수 있고 가장 마음이 편한 친구라 생각했다. 더군다나 동완 씨는 영어도 조금은 할 줄 알기 때문에 영어에 발목이 잡힌 준학 씨와 동행하기에 최적의 친구임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준학 씨는 며칠씩이나 주저했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지만 갑작스레 미국 자전거 횡단의 모험길에 동행을 제안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며칠 동안 고민의 끝에 동완 씨에게 미국행을 어렵사리 꺼냈다. 동완 씨는 친구의 갑작스러운 부탁에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그는 평소 미국을 꼭 한 번 가고 싶었으나, 단지 여행으로 가고 싶었지 자전거로 모험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우정이냐 안전이냐의 갈림길에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동완 씨는 하루의 시간이 필요했다.

다음날, 동완 씨는 어두운 표정으로 준학 씨 앞에 섰다. 준학 씨는 친구의 표정을 보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리고 혼자 모험과 싸울 생각으로 입술을 깨물려는 찰나, 동완 씨의 어두웠던 표정이 환한 웃음으로 바뀌며, 동완 씨는 준학 씨의 손을 덥썩 잡았다. 동완 씨는 “고민은 했지만, 인생에 이런 기회가 더 올 것 같지 않았다”라고 승낙한 이유를 설명했다. 준학 씨는 비록 한 명이지만 천군만마가 생긴 듯 든든하고 날아갈 것만 같았다.

▲ 김준학 씨가 80일간 미국 자전거 횡단을 위해 준비한 물품들(사진: 김준학 씨 제공).

왜 100만 원으로는 안 돼?

준비가 시작됐다. 그들은 횡단하겠다고 약속한 후로 3개월 뒤인 2014년 10월 2일 뉴욕 존 케네디 공항에 도착하는 항공권을 끊기로 마음먹었다. 돈을 버는 대로 필요한 것들을 구매하기 시작했다. 비행기 왕복 표, 조립식 자전거, 랜턴, 텐트, 의류, 비상용품 등을 하나하나 점검하며 구입하기 시작했다. 준비하는 데 들인 비용만 400만 원을 훌쩍 넘겼다.

미국 횡단한 사람들은 기본으로 1인당 기준으로 200만 원은 들고 가야 한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준학 씨는 문득 ‘100만 원으로는 안 될까?’라는 생각을 했다. 조금은 무모하지만, 무작정 미국의 아무 교회나 마을을 찾아가 텐트 칠 장소를 달라고 해서 숙박비를 줄이고, 끼니를 조금씩만 먹어 식비를 아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렇게 그들은 각자 지갑에 100만 원씩만 챙긴 채 험난한 여정에 올라섰다. 준학 씨는 “사실은 말이 100만 원이지, 동완이만 100만 원을 들고 갔고, 나는 그마저 70만 원만 들고 갔다”며 웃음을 자아냈다.

▲ 인천공항에서 미국으로 출발하기 직전의 조립식 자전거와 짐(사진: 김준학 씨 제공).

복병은 본드

준비하는 3개월은 돈 버느라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출발하는 당일, 그들은 기대와 설렘이 가득 차 한걸음에 뉴욕에 갈 것만 같았지만, 여정은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공항 수화물 검사대에서 그들의 짐을 통과시킬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짐 속에 들어 있던 본드였다. 그들이 자전거 수리에 필요할까 챙겨놓은 본드가 검사대에서 위험물질로 걸린 것이었다. 공항 직원들은 그들에게 본드만 빼면 다른 짐은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본드를 빼는 일이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전거부터 텐트, 여타 짐까지 모두 테이핑을 해놓은 상태였다. 본드 하나를 빼기 위해, 그들은 공항 한 복판에 앉아 박스 테이핑을 뜯어내고 다시 테이핑 작업을 거쳐야 했다. 준학 씨는 “그때 공항에서 테이프를 뜯어내는 동안 화가 치밀어 올랐다”며 “빼낸 본드는 바로 집어 던져버렸다”고 말했다.

▲ 아름다운 뉴욕 야경에 빠진 왼쪽의 김준학 씨와 오른쪽의 김동완 씨(사진: 김준학 씨 제공).

꿈만 같은 미국에서의 첫 페달

우여곡절 끝에 그들은 2014년 10월 1일 20시간 비행기 여행 끝에 뉴욕에 도착했다. 그들이 도착한 미국은 꿈만 같았다.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그들은 자전거부터 조립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행의 피곤함 때문에 근처 모텔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했다.

아침 해가 밝고 드디어 10월 2일 그들의 힘찬 첫 페달질이 시작됐다. 뉴욕은 하늘을 찌를 듯한 빌딩들로 가득 차 있었고 각양각색의 인종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한국과는 다른 뉴욕 시의 공기, 풍경들까지 모든 것이 새롭고 즐겁게만 느껴졌다. 그런 풍경에 심취해 돈이 부족함에 불구하고 시작부터 뉴욕의 햄버거며 핫도그까지 음식을 마구 섭취하며 돈을 썼다. 동완 씨는 “돈도 부족한데 처음부터 너무 뒷일 생각 안하고 돈을 쓴 게 나중에 크게 후회할 일이 되고 말았다”고 말했다.

그들은 어느덧 도심을 지나 옥수수밭과 콩밭이 펼쳐진 뉴욕 주의 시골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풍경은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같았지만, 영화 같다는 기분도 잠시, 달리고 달려도 끝도 없이 펼쳐진 옥수수와 콩밭에 질려버릴 지경이었다. 준학 씨는 “실제로 미국 농촌에 와 보고 나서야 왜 미국에서 비행기로 농약을 치는지 알 것 같았다”고 말했다.

▲ 가장 기억에 남는 나이아가라 폭포에 선 김준학 씨(사진: 김준학 씨 제공).

끝이 없을 것 같던 밭을 지나니 그들의 페달을 멈추게 하는 장관이 나타났다. 바로 캐나다와 미국의 국경이 마주하고 있는 거대한 나이아가라 폭포가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그날은 10월 15일, 그들이 뉴욕 시에서 출발한 지 약 보름 만의 일이었다. 폭포의 모습은 어느 각도로 봐도 멋있었다. 그들은 당장 자전거에 내려 카메라를 들어 한참이나 포토타임을 가졌다. 준학 씨는 “신이 내려준 힐링타임 같았다”며 “미국을 횡단하며 거대한 폭포를 본 것은 잊을 수 없었던 기억이었다”고 말했다.

▲ 도시와는 다르게 붉게 물든 미국 시골 마을 게리의 황혼(사진: 김준학 씨 제공).

게리에서의 3발의 총성

미국은 총기 소지가 허용된 국가다. 미국 사람들은 누구나 총을 소지할 수 있다. 다만 그 총을 거리로 들고 나올 때는 불법이 된다. 그러나 여행 중 위험에 대비해서 총을 차안에 넣고 다니는 미국인들이 있을 수 있다. 그 누가 총기 소지 여부를 알겠는가? 미국 여행에서는 항상 이 점을 유의해야 한다.

준학 씨와 동완 씨는 미국 여행 중 총 때문에 공포에 떨었던 일화를 잊을 수 없다. 10월 25일, 그들은 나이애가라 폭포를 지나 시카고로 향하면서, 오대호 중 하나인 미시간 호수 근처의 ‘게리’라는 마을에 접어들었다. 그 마을에는 교회도 많았고 황혼 장면이 너무 멋져서 그들은 게리에서 하루를 묵기로 마음 먹었다.

준학 씨가 마을 소방서의 뒤뜰에 허락을 맡고 텐트를 치고 있었다. 그리고 동완 씨는 저녁 식사를 위해 편의점에 음식을 사러 갔다. 편의점에서 돌아온 동완 씨가 편의점에서 흑인 한 명이 다가와 “절대 이 마을에서 너 혼자 저녁에 돌아다니지 마라”고 신신당부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잠깐 머뭇거렸지만, 설마 무슨 일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피곤하기도 해서 곧 잠에 골아 떨어졌다.

잠이 깊게 든 새벽, 몇 시쯤 됐는지 모를 시각에, 텐트에서 50m도 안 되는 거리에서 ‘탕, 탕, 탕’ 하는 3발의 총성이 들렸다. 그들은 갑작스러운 총성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그때부터 그들은 일말의 공포를 느끼며 텐트 안에서 숨을 죽였다. 그들은 “그래도 명색이 군대 갔다온 대한민국 육군 예비역이 총소리에 무서워해서야 되겠나” 하면서 공포를 억누르고 밖을 예의주시했다. 그렇게 해가 밝았다. 아침 일찍 짐을 챙겨 서둘러 마을을 뜨면서, 그들은 마을 한 상점의 창문에 총알 자국이 선명한 모습을 봤다. 무슨 강도 사건이 있었던 듯했다. 준학 씨는 “이 얘기는 정말 무시무시했던 경험이었다”며 “미국을 잘 모르는 덕에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느낌이었다”라고 덧붙였다.

▲ 준학 씨와 동완 씨가 매일 밤잠을 잤던 텐트(사진: 김준학 씨 제공).

‘빌’들이 너무 착해

미국의 아름다운 풍경만큼이나 그들이 만난 미국 사람들의 마음씨도 따뜻했다. 그런 면에서 그들은 사람 복이 있었다. 그들은 미국을 여행하는 동안 많은 미국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고 그중 특이하게도 ‘빌(Bill)’이란 이름을 가진 미국사람들을 여러 명 만났고, 이들 모두 그들에게 친절했다. 빌은 일종의 철수와 같이 흔한 미국 사람 이름인 모양이었다. 아무튼 그들은 “미국의 ‘빌’들은 모두 착하다”는 느낌을 갖게 됐다. 그들이 만난 여러 명의 빌들은 하나같이 그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했고 밥까지 주었다. 텐트를 칠 장소를 찾던 그들에게 먼저 다가와 잠잘 장소가 필요하냐며 자신의 집에서 잠을 자라고 한 빌이 있었다. 그 빌은 근처 한인 슈퍼로 그를 데려가서 한국인 슈퍼 주인에게 인사를 시키며 자신이 그와 친하다는 점을 보여주기도 했다.

동완 씨는 11월 초에 피츠필드라는 도시에서 만난 빌도 기억에 남는다. 당시, 그들은 텐트 칠 장소를 구하기 위해 가정집을 전전하고 있었지만, 뒤뜰을 허락받지 못해 쩔쩔매고 있었다. 그러던 중, 빌이라는 한 집주인이 흔쾌히 자신의 집 창고를 내주었고 그들에게 맛있는 음식도 대접했다.

다음날, 그들이 잠에서 일어나 떠나기전 빌에게 인사를 하려 했지만, 빌은 이미 외출하고 집에 없었다. 그들이 인사조차 못 한 채 아쉬움을 남기고 빌의 집을 출발해서 열심히 자전거 페달을 밟고 있던 중,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차 한 대가 그들 앞에서 섰다. 놀랍게도 그는 빌이었다. 외출에서 돌아온 빌이 인사 못 한 게 아쉽다며 차를 타고 그들을 쫓아온 것이었다. 빌은 차에 내려 그들과 함께 사진 찍고 나서, 다음 동네 아는 가게에 가서 자기 이름을 대고 공짜로 밥을 먹으라고 말했다. 동완 씨는 “그렇게 친절한 빌에게 감동을 받았다. 그 빌을 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 미국 횡단 자전거 여정 중, 8번의 바퀴 펑크가 있었다(사진: 김준학 씨 제공).

미주리에서의 느껴진 시선들

뉴욕 시를 떠나온 지 달포가 지난 11월 6일 쯤, 그들은 미주리의 먼로 카운티를 지나고 있었다. 어느덧 해가 서산을 넘어가고 있는 저녁 시간에, 그들은 저녁거리를 사기 위해 월마트에 갔다. 하지만 그들은 여태까지 받아 보지 못한 뜻밖의 시선을 받았다. 월마트 종업원은 그들을 노숙자를 보는 듯한 협오스런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동완 씨는 “우리가 무슨 동물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분이 나빴다”고 설명했다.

그러던 와중에, 그들은 그 마을에서 한 마음씨 좋은 초등학교 교장을 만날 수 있었다. 그 교장 선생님은 뒤뜰을 내어달라는 그들의 부탁에 환하게 웃으며 뒤뜰대신 모텔을 잡아주고 손에 20달러를 쥐어줬다. 그리곤 다음 날 낮에 학교로 자신을 찾아오라는 말을 남겼다. 다음날, 그들은 교장 선생님의 친절에 감사의 말을 전하기 위해 학교로 가서 건물 문 앞에 섰다. 현관문으로 보이는 유리창에 한 선생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데 다가오던 선생이 갑자기 문을 걸어 잠그고, 아이들을 대피시키더니, 다급한 표정으로 어딘가 전화를 걸었다. 결국, 교장 선생님이 나타나서 낯선 침입자라는 오해는 풀렸지만, 동완 씨는 “월마트의 점원이나 학교 선생과 같은 낯선이에게 심하게 경계하는 미국 사람들도 많아서 여행 중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고 전했다.

▲ 그들은 갑자기 내린 폭우를 피하기 위해 한 집의 처마 신세를 지기도 했다(사진: 김준학 씨 제공).

‘슈퍼 콜드’를 만나다

여행의 막바지에 이르러, 그들은 아름다운 풍경의 로키산맥 입구에 도달했다. 하지만 로키산맥은 자전거로 오르기엔 험난한 곳이었다. 그들은 자전거를 탄 지 약 60일째 되는 12월 초, 어느덧 로키 산맥에 진입했다. 날씨는 점점 흐릿해지고 추워져만 갔다. 그리고 그들은 로키산맥에서 강추위 중에서도 강추위를 뜻하는 ‘슈퍼 콜드’를 만났다. 평균 온도 영하 16도, 밤이 되면 그 온도의 끝을 알 수 없는 날씨 탓에, 그들은 자전거 페달을 멈출 새 없이 밟아야 했다. 가만히 있으면, 몸이 오히려 더 얼어붙어 갔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준학 씨는 “눈알이 얼어버릴 것 같은 기분은 처음이었다”며 “그런 경험은 군대 혹한기랑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추웠다”고 말했다.

단 하루 만에 로키산맥을 넘을 순 없었다. 특히 로키산맥을 넘는 중간에 그들에겐 잠자리가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들을 보고 얼른 남쪽으로 내려가지 않으면 길에서 얼어 죽는다는 말을 해주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들은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준학 씨와 동완 씨는 “그 당시 로키산맥을 넘어야 한다는 생각이 워낙 확고해서, 우리는 추위가 이기나 우리가 이기나 한 번 해보자고 외치면서 계속 달렸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 로키산맥에서 폭설을 만나 그들은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다(사진: 김준학 씨 제공).

로키산맥에서의 천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로키산맥 하늘에서 폭설이 쏟아졌다. 가시거리는 5m도 채 되지 않았다. 그들의 걱정은 폭설처럼 쌓여만 갔다. 정말 동사할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닐지 걱정이 커져만 가고 있을 때, 천운이었을까? 폭설 속에 우뚝 솟은 호텔이 나타났고, 그 호텔의 주인은 뜻밖에 재미교포였다. 그 교포는 그들에게 따뜻한 밥과 잠자리를 제공해주어 그들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다음날, 그들은 강행군을 계속해서 로키산맥을 넘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교포가 폭설 속의 위험한 길로 그들을 절대 보낼 수 없다며 그들을 막아섰다. 재미교포와 한국 청년들은 가겠다, 가면 안된다 하면서 실랑이를 부리다, 결국 교포가 산꼭대기까지만 그들은 태워주는 것으로 타협이 성사됐다. 산꼭대기에서 차에서 내린 그들은 다시 로키산맥을 하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도로 상황은 최악이었다. 눈보라가 치고 있었고, 특히 산을 넘는 ‘우레이’라는 곳은 온통 눈으로 덮여 있었다. 심지어 도로엔 가드레일조차 없어, 잠깐 잘못했다간 200m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준학 씨는 “아직도 그 상황을 생각하면 온몸이 오싹하다”며 “그 교포 분의 은혜를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 로키산맥에서 얼어붙은 그들의 자전거(사진: 김준학 씨 제공).

그 무엇보다 배고픔과의 싸움

하지만 게리에서의 총성도, 로키산맥의 슈퍼 콜드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바로 배고픔이었다. 여행 두 달째가 넘어가면서부터 배고픔은 극에 달했다. 하루 1달러 50센트짜리 통조림 수프로 아침을 버티고, 점심엔 99센트 빵 두 조각, 밤에는 코펠에 지어먹는 주먹만한 쌀밥 한 덩어리로 버텨 나갔으니, 그들의 배고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매일 똑같은 음식에 영양보충 또한 제대로 되지 않았다. 게다가 하루 100km씩 자전거를 타야 하는 상황에서 날이 갈수록 부족한 영양은 체력부담으로 다가왔다. 여행은 점점 더 길어져 갈수록 기운이 빠졌고, 하루 평균 거리를 못 채우는 경우도 많아졌다. 동완 씨는 “배고픔과의 싸움이 시작되자, 100만 원만 들고 오는 것은 너무 무모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눈물보단 아쉬움이 더 큰 마지막 페달

12월 20일, 드디어 뉴욕에서 LA까지 5,800km라는 기나긴 여정의 끝이 눈앞에 보였다. 그들은 횡단하는 내내 LA에 도착하면 눈물이 날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험난한 길을 달려오면서 많은 것이 바뀌었다. 눈물은커녕 더 여행하고 싶다는 마음에 아쉬움이 오히려 더 컸다. 약 80일을 페달을 밟으며 달려왔지만, 그 많은 순간들이 너무나 짧게 느껴졌다.

그들은 이번 미국 자전거 횡단 모험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된 것 같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 사람들이 100만 원으로는 횡단하기 힘들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그들은 보란 듯이 미국 횡단 도전에 성공했다. 준학 씨는 “무모했지만 값진 도전이라 생각한다”며 “남들이 ‘안 돼’라고 해서, 포기한 것들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고 내 인생에 자신감을 가지게 됐다”고 덧붙였다.

동완 씨는 “게리에서의 총성, 로키산맥의 폭설 등 횡단하는 동안의 모든 위험들이 있었지만 보란 듯이 이겨낸 자신이 자랑스럽다”며 “처음에 들었던 걱정과 긴장들이 막상 부딪쳐보니까 나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많이 느꼈고, 인생에 큰 용기를 얻은 것만 같다“고 소감을 말했다.

다시 펜을 잡는다는 것

2014년 12월 25일 새벽, 그들은 고향의 품으로 돌아왔다. 한국으로 귀국한 그들은 일상으로 돌아갔다. 동완 씨는 자전거 횡단으로 얻은 자신감을 간직한 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며 개강을 준비했고, 그동안 못했던 공부를 하며 무모한 라이더가 아닌 평범한 대학생으로 돌아갔다.

준학 씨 또한 3년 만에 연필을 잡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미국 횡단을 계기로 자신감에 가득 차서 모든 일이 잘 풀릴 것만 같았다”며 2015년 3월 2학년 1학기로 복학한 준학 씨는 무언가 생각이 빗나갔음을 느꼈다. 몸 쓰는 일과 머리 쓰는 일은 달랐다. 매일같이 쏟아지는 과제에 굳었던 머리를 사용하느라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는 “한 학기 동안 까먹은 것들을 다시 공부하려니 로크산맥을 넘는 것보다 정말 더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학기가 끝나갈 무렵, 준학 씨는 다시 자전거를 타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해졌다. 그리고 그는 2015년 7월 여름 방학 프로젝트를 세웠다. 이름하여 ‘AROUND KOREA 프로젝트'였다. 그는 남한의 최북단 강원도 고성의 통일 전망대부터 남한의 최남단 마라도까지 총 약 2,500km를 자전거로 종주할 프로젝트를 그렇게 명명했다. 게다가 이 프로젝트는 종주를 하면서 만나는 주민들을 상대로 기금을 모아 좋은 곳에 기부하겠다는 그의 특유한 무모함이 묻어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방학임에도 떠나지 못하고 여름 내내 병상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바로 여름 방학과 동시에 동네에서 자전거를 타다 자동차와 접촉사고가 난 것이다. 그는 병원에서 약 한 달간 입원해야 했다. 준학 씨는 “미국에서 5,800km 길을 무사히 지나왔지만, 한국의 좁은 도로는 더 위험한가 보다”며 웃어 보였다.

하지만 사고는 그에게 잠깐일 뿐이다. 그는 퇴원과 동시에 계획한 대로 자신의 계획을 진행해 나갈 것이다. 그는 “인간은 어려움을 이겨 낼 때 몇 천 배 더 멋지고 값진 경험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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