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현대인물을 찾아서, 최백호 편] "7080 음악은 열정의 결실, 그 열기는 복고 아닌 '꾸준한 흐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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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현대인물을 찾아서, 최백호 편] "7080 음악은 열정의 결실, 그 열기는 복고 아닌 '꾸준한 흐름'이다"
  • 차용범
  • 승인 2019.03.03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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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가객’ 최백호에게 대중가요의 길을 묻다 / 차용범
이 글은 인터뷰 시점이 2014년인 까닭에 일부 내용은 현 시점에서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낭만가객 최백호(69).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음악 스펙트럼으로 나날이 진화하는 음악적 내공. 청량하고 복고적인 감성가요로 중∙장년층과 깊게 교감해 온 싱어송 라이터. 70년대 말 조용필과 함께 한국 가요계를 풍성하게 살찌우다, 침체와 재기를 거쳐 젊은 층에도 어필하는 짙은 감수성으로 제3의 전성기를 구가하는 열정의 대중가수. 그는 아날로그 세대의 열정과 디지털 세대의 감성을 문화의 영역에서 잘 융합시켜 온 가요계의 거장이다.

대한민국 낭만가객 최백호.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음악 스펙트럼으로 나날이 진화하는 음악적 내공. 청량하고 복고적인 감성가요로 중▫장년층과 깊게 교감해 온 싱어송 라이터다(사진: 차용범 제공).

부산 출신 가요계의 레전드(전설) 최백호. 그는 부산에서 태어나고 컸다. 부산에서 가수로 데뷔<내 마음 갈 곳을 잃어>, <입영전야>, <영일만 친구> 같은 사연 많은 가요로 전성기를 구가했다. 가수 인생의 내리막길을 거쳐 <낭만에 대하여>로 화려하게 재기, 60대 들어 재즈음악에 뛰어들고 에코브릿지 <부산에 가면>과 아이유의 <아이야 나랑 걷자> 제작에 참여했다. 젊은 세대와 소통하고 장르적 영역을 무한대로 확장하며 제3의 전성기를 꿈꾼다.

부산출신 가요계의 레전드(전설) 최백호. 그는 부산에서 태어나고 자라나며 가수로 데뷔, 화려한 전성기를 구가한 부산사람이다. 그는 가수인생의 내리막길을 거쳐 '낭만에 대하여'로 재기, 60대 들어 재즈음악에까지 뛰어든 노익장이다(사진: 차용범 제공).

2000년 이후 ‘7080 음악’의 복고현상은 이 시대의 뚜렷한 문화코드다. 그 시대적 흐름 속에서, 그는 송창식, 장사익, 조동진 같은 '7080 뮤지션'의 귀환을 부추긴다. 원로가수의 삶을 기리고 노후가 취약한 음악인을 보살피는 나눔∙후원활동(한국음악발전소)에도 앞장이다. 가수생활 43년, 그 노장의 진화와 변신을 이끄는 힘의 바탕은 무엇인가? '7080 음악', 그 시대 음악∙음악인에 대한 애정▫열망은 어떠한가? '나이가 들수록 더 좋은 노래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 반백의 전설, 그의 꿈과 고뇌는 무엇인가?

[약력]

1950년 부산 출생. 부산 가야고교 졸. 1977년 <내 마음 갈곳을 잃어>로 데뷔, 1977년 MBC 10대 가수 가요제 신인가수상, 1983년 MBC 10대 가수 가요제 10대 가수상, 1996년 <낭만에 대하여>로 KBS 연말가요대상 작사부문 수상, 대한민국영상음반대상 골든디스크부문 본상, 2009년 첫 개인전 화가 데뷔, 2011년 SBS 연예대상 라디오DJ상, 2011년~ 한국음악발전소장, 총 19장 앨범 발매, 2013년 싱글앨범 ‘첫사랑’ 발표

시대∙세대와 통(通)하며 진화하는 ‘낭만가객’

Q. 2000년 이후 되살아난 7080 음악의 열기, 이 시대의 뚜렷한 문화코드다. 아날로그 세대의 열정과 디지털 세대의 감성은 문화의 영역에서 활발하게 융합하고 있다. ‘7080’, 한 시대를 넘어 그 음악과 정서가 다시 각광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질문에 착오가 있다. 아날로그 세대야 말로 감성과 열정의 시대였다. 디지털은 시장의 확장은 가져왔지만 지나친 기계적 상업화로 대중문화 음악을 황폐화시켰다. 아날로그는 인간의 본성과 닿아있다. 그 음악은 ‘7080’을 넘어 꾸준히 이어져 올 따름이다.“

그 넉넉한 표정의 낭만가객 최백호가 첫 질문부터 날카롭게 반응한다. 2010년 ‘세시봉 콘서트’(조영남, 윤형주, 송창식, 김세환)의 인기와, 빅뱅, 동방신기, 티아라..., 많은 아이돌 가수들의 과거 히트곡 리메이크 붐은 이 시대의 뚜렷한 문화코드다. 낭만가객 최백호와 유익종, 남궁옥분, 김도향, 혼성 듀오 `뚜아 에 모아'가 함께 `낭만 콘서트' 전국 투어를 성공시킨 것 역시 눈에 띄는 현실이다. 그 ‘7080 음악’의 열기를, 최백호는 ‘복고적 흐름’ 아닌 ‘꾸준한 흐름’으로 보는 것이다.

Q. KBS <콘서트 7080> 진행자 배철수는 당신을 소개하며 “난, 최백호 형의 노래를 들으면 늘 눈물이 난다”고 얘기했다. 실제 관객들은 최백호의 <봄날은 간다>를 들으며 울고 웃고 하더라. 세대를 가리지 않고, 청중과 깊이 소통하며 많은 이의 가슴을 울리는 그 감성의 힘은 무엇인가?

“서로 같은 가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는 단문으로 잘라 말하지만, 실상 대중들은 “중년이 부를 만한 노래, 그래도 최백호 노래가 있다”고 위안하고 있을 터이다. ‘가수 최백호‘가 불러주는, 그 삶의 느낌이 듬뿍 배어있는 노래와 가슴으로 공감하며 울고 웃는 것이다.

KBS 장수프로그램 ‘콘서트 7080’을 진행하는 음악인 배철수는 “난, 최백호의 노래를 들으면 늘 눈물이 난다”며, 최백호의 감성에 바탕한 청중소통 능력을 높게 평가한다. 그는 미국에 도피(?)중인 최백호를 채근, 한국 컴백을 돕고는 ‘국보가수’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사진: 차용범 제공).

청중 울리는 감성의 힘? ‘같은 가슴’ 때문

Q. 2008년부터 SBS 러브FM에서 <최백호의 낭만시대>를 진행하고 있다. <최백호의 낭만시대>가 장수하는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나?

"첫째는 선곡이라고 생각한다. 세대, 장르 구분 없이 ‘좋은 노래’를 들려드린다는 확실한 기준 ,그리고 유창하지는 못하지만 솔직한 대화의 힘도 크다. TV는 연기를 할 수 있지만 라디오는 거짓말을 못한다. 그리고 여러 가지 ‘운’도 좋았다." 그는 나름의 ‘진행철학’을 말하지만, 청취자는 원고 없이도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는 그의 따뜻함, 그의 경륜에 후한 점수를 준다. 수도권 방송인데도 지방 청취자들이 ‘고릴라’라는 앱으로 프로그램 청취하는 유인력, 그 힘의 바탕이다.

Q. 오랜 기간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느끼는 보람은 어떤가?

"내가 젊은 시절 겪었던 고단했던 시절의 경험들이, 밤늦게 라디오를 듣는 외롭고 여린 분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것, 최고의 보람이다.“

사실 밤 10시 넘어 라디오를 듣는 분들은 힘들고 외로운 경우가 많다. 생계를 위해 운전하는 분, 야간에 아파트나 건물 경비하는 분, 그리고 집에서 듣더라도 외로운 주부들이 많다. 구구절절하고 안타까운 사연을 담은 문자나 편지도 수없이 온다. 그런 분들과 소통하고 음악으로 위로해 줄 수 있다는 게 큰 보람이라는 것이다. 음악적으로, 요즘 트렌드를 끊임없이 접촉하고 공부할 수 있는데다 후배 음악인도 많이 만날 수 있는 것은 덤이다.

노래에 젊고 늙음 없듯 음악은 시∙공간 초월

Q. 2013년 11월 싱글앨범 ‘첫사랑’을 발표했다. 예순이 넘은 나이에 ‘첫사랑’을 노래한 이유는? 그리고 앨범에 <부산에 가면>이라는 곡은 싱어송 라이터 에코브릿지의 곡이던데, 그 노래를 부르며 느낀 감상은?

"첫사랑의 추억에 나이는 전혀 상관이 없다. 늙은 노래, 젊은 노래가 없듯이 음악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것 아닌가. 어릴 적 좋아했던 가곡 <그 집 앞> 을 연상하며 만들었다. 만들고 나서 행복했던 그 느낌이 사라질까봐 이틀 만에 기타리스트 함춘호 씨와 녹음한 노래다. <부산에 가면>은 에코 브릿지가 만들어서 내게 준 곡이다. 녹음할 때 눈물이 났다. 바로 내 이야기더라. 부산의 향기가 진한 노래다.“

새 앨범엔 <첫사랑>과 <부산에 가면> 단 두 곡만 실려 있다. 자작곡 <첫사랑>은 <그집 앞>을 연상시키는 가곡 풍의 멜로디에 "아쉬워 작은 가슴 어쩌지 못해 아팠던, 이제는 멀어진 세월 그리운 첫사랑~"이란 시구(詩句) 같은 노랫말을 담았다. 중학교 1학년 입학식 날, 부산으로 통학하는 기차 안에서, 콧날이 오똑하고 눈이 크고 얼굴이 하얀 단발머리 소녀를 봤던 추억. 3년간 가슴앓이를 하느라 공부도 안하고, 말 한마디 못해보고, 밤마다 보내지 못하는 편지를 썼던 기억, 그 세월을 응축시킨 가사다.

<부산에 가면>은 은은한 피아노 소리에 최백호의 그윽한 음색이 포개진 노래다. "부산에 가면 다시 너를 볼 수 있을까/고운 머릿결을 흩날리며 나를 반겼던/그 부산역 앞은 참 많이도 변했구나/ 어디로 가야 하나 너도 이제는 없는데…." 그는 노래를 듣는 순간 느꼈단다. 이건 내가 불러야 하는 곡이라고. 노래에 등장하는 부산역, 광안리, 달맞이 고개…, 전부 그에겐 추억이 서려 있는 장소다. 마치 그의 과거를 옮겨놓은 노래라 할 만큼.

최백호의 열창 모습. 그는 ‘내 마음...’, ‘봄날은 간다’ 같은 애상조를 부를 땐 부동자세 폼으로, 진취적 젊음의 노래, 최근의 재즈를 노래할 땐 당연히 통기타에 열정적 자세를 동반한다(사진: 차용범 제공).

Q. 최근 에코브릿지와의 작업을 비롯, 아이돌 세대의 대표적 여자 솔로가수 아이유의 앨범에도 참여했다. 어떤 인연인가?

"우연히 만난 기타리스트 박주원과의 인연부터다. 2012년의 앨범 ‘다시 길 위에서’도 그랬고, 아이유, 에코브릿지와의 작업도 모두 그의 소개로 이루어 졌다. 사람의 인연이 얼마나 중요한지 공부했다.“

‘최백호 스타일’ 깨고 새 장르에 도전하기

최백호, 그에겐 2012년 12년 만에 발표한 정규앨범 ‘다시 길 위에서’가 다시 이슈다. 지금까지의 ‘최백호 스타일’을 깨고 팝재즈․탱고․라틴과 같은 새로운 장르에 도전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동안 그의 방식대로, 그에게 맞춰 만든 곡들을 부르다 매너리즘에 빠졌던 것일까? 알고 보면, 대중은 그를 ‘낭만가객’이라고들 말하지만, 그는 히피적 DNA, 또는 가슴 속에 들끓는 마그마를 가득 머금은 모험적 뮤지션이기도 할 터이다.

Q. 음악적 스펙트럼의 무한화? 다양화?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나?

“난 항상 변화의 필요를 느껴왔다. 오랫동안 내 방식대로만 해 오며 지쳐 있었다 할까. 그러던 차에 새 장르에의 제의가 들어 왔고 덥석 물었다. 이번에는, 나는 고개를 돌리고 있고 그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해보자 했다. 가사는 음반 제작사 겸 작사가 이주엽 제이엔에이치뮤직 대표가 대부분 썼다. 말로(보컬), 전제덕(하모니카), 박주원(기타), 민경인․ 조윤성(피아노), 재즈탱고 밴드 라벤타나 같은, 한국 재즈를 대표하는 음악인들이 작곡과 연주에 참여했다. 새로운 경험이었고, 많은 공부를 했다. 그 경험으로 앞으로 더 좋은 가수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함께 만드는 노래’가 얼마나 위대한 작품일 수 있는지를 실감한 듯, 한껏 행복한 표정이다.

그는 강박에서 벗어나니, 목소리도 젊을 때보다 더 좋아지고 있다고 느낀다. 많이 늦긴 했지만, 노래의 즐거움을 제대로 알고, 다름 사람들과 어울려 음악을 배워 가는 지금, 참 행복하다는 것이다.

Q. 젊은 세대와 소통하고,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고, 거기에 그치지 않고 원로 가수들의 신곡 음반까지 기획․제작하고 있다. 새로운 전성기를 여는 것인가?

"우리는 나이가 드는 걸 세월이 '지나갔다'라고 한다. 그리고 ‘한물갔다’고 제외시켜 버린다. 그러나, 무엇이 ‘지나갔다’는 건가? 기준이 어디인가? 20대? 30대? 인생에 어떤 기준이 있나? 인생엔 시작과 끝뿐이다. 그 삶의 테두리 안에서는 모두가 소통 할 수 있다. 특히 음악에서야. 내 앨범도 그렇고, 원로 분들도 마찬가지다. 그런 생각으로 내 힘 닿는대로 돕고 있다.“

그는 지금 (사)한국음악발전소 소장이다. 벌써 1960년대를 풍미한 한명숙, 안다성, 명국환 같은 원로들의 신곡앨범을 기획했다. 젊은 뮤지션의 젊은 감각으로, 원로가수들께 건강한 삶과 새 희망을 드릴 수 있는 신곡을 제작하고 있다.

원로 음악인 돕기, 나눔과 공생의 의지

Q. (사)한국음악발전소는 어떤 단체인가?

"한 원로 음악인에 대한 헌정 공연에서 출발했다. 지난해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를 발표한 한명숙 선생님 50주년 기념공연이 KBS홀에서 열렸다. 그 일을 계기로 평생 음악인으로 살아온 원로가수들의 삶을 기리고, 젊고 실력은 있지만 경제력이 없는 음악인을 후원하기 위한 기부 단체를 만들자는 의견이 나왔다. 그 첫 발로 한국음악발전소를 설립했다.“

한국음악발전소는 기부금을 받아 운영하는 비영리단체다. 인디 밴드, 원로 음악인 지원 활동도 계속하고 있다. 2011년 6월 아코디언 연주자 심성락 선생을 위한 헌정공연을 열었다. 지난해 12월 샹송 가수 최양숙 선생을 위한 두 번째 헌정공연을 가졌다. 2012년부터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 뮤즈홀에서 인디밴드들을 지원하는 공연도 20회 진행했다.

“힘들게 사는 음악인이 많다. 보통 매스컴을 통해 보는 (상업적으로 성공한) 음악인 전체의 5%에 불과하다. 90%의 음악인은 음악으로 버텨내고 있다. 그분들이 마음껏 음악을 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는 이 일을 하고 있다.

한 때 ‘노래로 먹고살기에도 고달팠던’ 한 가수가 이런 일에 공력을 쏟는다는 것, 웬만한 신념과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는 수천억 대 재산을 가진 거대 기획사 대표 정도는 아니다. 담대한 나눔과 공생, 숭고한 배려와 헌신, 이 부분에 최백호의 품성이 배어나는 것이다. 한국음악발전소는 이미 많은 후원기업이 참여하고 있다. 전경련, 포스코 경영연구소, 롯데, 조선내화, 인터파크, LG히다치, 희성금속, 세스코, 국립중앙의료원..., 그들은 분명 ‘가수 최백호’의 결 곧은 이미지, 나눔과 배려에의 담백한 의지에 끌려 선뜻 후원의지를 세웠을 터-.

Q. 최근 몇 년간 다양한 활동들을 해 왔다. 그러나 당신은 7080세대다. 통기타와 낭만이 있는…, 그 시대 노래를 더 할 생각은?

“나는 지금까지 특별한 장르의 음악만 하진 않았다. 내 노래는 가사가 우선이다. 좋은 가사가 만들어 지면 그 가사에 맞는 리듬과 멜로디를 결정한다.” 7080음악에 관한 한, 그는 그 시대 음악에 아직 배가 고픈 듯하다. 그 시대에 음악을 했던 다른 뮤지션들의 귀환을 기다리는 기분도 있고-.

화가 지망생에서 운명처럼 가수 데뷔

그는 부산 태생에, 부산에서 데뷔했다. 음악의 길로 들어섰던 스무 살 시절, 그는 부산의 통기타 클럽에서 오직 젊음과 패기로 노래로 불렀다. 시작은 참 좋았다. 서울 ‘쎄시봉’에 버금가는 부산의 ‘틴클럽’에서 가수활동을 시작했다. 앨범을 내고 싶은 욕심에 무작정 상경, 멜라니 사프카의 <The Saddist Thing>을 불러 레코드사에 합격. 이후 피아니스트 작곡가 최종혁 씨와의 만남에서 우연히 건낸 어머니 스토리, 그 데뷔곡이 그의 인생을 이끌었다.

Q. 어떻게 가수가 됐나? “

"처음부터 가수되기를 꿈 꾼 것은 아니었다. 군에서 제대하고 삶이 막막했던 시절, 친구의 매형이 운영하는 부산 서면 라이브 클럽에서 노래했다. 2주일 만에 윤시내의 <열애>를 작사한 배경모 씨에게 스카우트 된 것을 계기로 지금에 이른 것이다. 원래는 그림을 그렸다. 고등학교 때까지 화가를 꿈꿨으나, 어머님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군대도 의병제대했다.“

Q. 1977년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로 데뷔했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직접 작사한 곡이라고 하던데….

“스무 살 가을, 어머님이 돌아가시며 막내 걱정으로 그 글을 쓰게 해주셨다고 생각한다.” 그의 대답은 예의 ‘단답형’이지만, 이 곡의 가사는 그가 스물한 살 겨울에 어머니를 그리며 쓴 사모곡이다.“

그가 스무 살 때 초등학교 교사였던 어머니가 병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누나 둘에 외동아들인 그에게 어머니의 기대는 컸지만, 그는 중·고교 시험에 떨어질 정도로 속을 썩인 아들이었다. 그는 회한에 젖어, 사흘 밤낮을 울며, 글을 썼다. 데뷔곡의 가사다.

“(최)종혁이 형님과 술을 먹다가 '이것도 노래가 되겠느냐'고 그 글을 건넸다. 형님은 며칠 뒤 곡을 붙여줬다. 피아노 연주를 할 때 소름이 돋더라. 어머니가 외동아들을 걱정하며 주신 선물이었나 보다. 난 문학공부를 안했지만, 어머니는 나에게 글을 쓰는 능력을 준 것 같다.” 세상에 홀로 남은 외로움, 미래에의 두려움을 음악에 녹여 낸, 그 데뷔곡 스토리다.

Q. <영일만 친구>도 직접 작사했다. 경북 영일에선 ‘가수 최백호’의 명망이 높다는데, 이 노래의 탄생배경은 어떤가?

"'그 노래, 1978년 그 당시 포항에서 음악다방과 인테리어 사업을 하던 시인이며 부산지역의 인기 DJ였던 홍수진이란 친구와, 소설가인 그의 친구 한 사람, 나, 이렇게 셋이서 포항 어느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만든 노래다. 뒤에, 작사는 그 소설가의 이름으로 등록했다. 젊었던 시절엔 둥둥거리는 반주가 맘에 안 들어 좋아하지 않았다. 나이가 들며 이 노래가 나의 삶에 큰 힘을 주었음을 깨닫고 열심히 부르고 다닌다. 그 홍수진은 오래전 세상을 떠났다. 그 노래를 부를 때마다 그 모습이 떠오른다.“ 홍수진, 이 노래의 클라이맥스 대목 ‘영∼일만 친구야’에 등장하는 그 주인공이다.

난, 슬럼프 겪으며 내 천직 찾았다

Q. 데뷔 이후 <입영전야>, <영일만 친구> 등으로 전성기를 누리다 1983년 ‘고독’이라는 앨범을 발표하면서 가수로서 침체기를 가졌다. 1990년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1995년 <낭만에 대하여>로 재기했다. 그 사이 어떤 일이 있었나?

"사실 <영일만 친구>도 빅히트를 하진 못했다. 그 이후 차츰 일들이 줄어들고 생활이 어려지며 그래 돈이나 벌자 하는 심정으로 밤업소를 7군데씩 돌아다녔다. 그런 시간이 길어지며 가수로서의 모멸감도 많이 느꼈고, 기회가 생기면 이일을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었다. 마침 아는 분이 LA에다 방송국을 차리면서 ‘같이 가자’고 해서. 따라갔다. 처가도 미국에 있었으니 얼씨구나 하고 그냥 보따리 싸 가지고 간 거다. 미국에서 2년 동안 가족들과 편안했고 행복했다.“

되짚어보면, 최백호는 미국에 머무는 2년 동안 그를 객관적으로 돌아본 듯하다. ‘야, 이게 내 천직이구나’ 하는 걸 느끼기도 하고. 그러면서 깨닫는다, ‘내 노래를 듣는 사람들은 나와 함께 늙어가는구나. 내가 너무 스무 살의 최백호에 머물러 있으려고 했구나.’

그때 음악인 배철수 씨가 찾아왔다. “왜 노래를 해야 될 사람이 여기 있냐”고 짐짓 성화였다. 2년 만에 귀국했다. 1년 정도 가족과 헤어져, 혼자 복귀준비를 했다. 남한강변 미사리 같은 곳에서 일하고. 그러다가 나온 게 <낭만에 대하여>다. 가수 최백호를 다시 일으켜 세운 노래다.

Q. 제2의 전성기를 열어준 <낭만에 대하여>, 처음부터 인기를 끌었던 것은 아니라고 들었다. 어떻게 된 건가?

"그렇다. 앨범을 내고 1년 반 정도 반응이 없었다. 어느 날 제작사 여직원이 전화를 걸어왔다, ‘선생님, 이상해요’라면서-. ‘왜?’ 물었더니 ‘갑자기 주문이 1500장 들어 왔어요’ 그러더라. 한 달에 20장 팔리던 게. 그래서 내가 농담으로 ‘야, 임마, 그게 뭐가 이상해, 이제 정상이지’ 그랬다. 그러곤 잊어버렸지. 그런데 또 전화가 왔다. 추석 전날. ‘선생님, 1만 5000장 주문이 들어 왔어요’ 하는 거다. 그제야 ‘아~ 장난이 아니구나’ 했다. 왜 그런데?’ 물어보니까 모르겠다는 거다. 그냥 회사가 야단났다고. 공장을 풀로 돌려야 한다고.“

사연인 즉 그랬다. TV드라마 <목욕탕집 남자들>에서 장용 선생이 이 노래를 부른 것이다. 그렇게 해서 35만 장이 나간 거다. <목욕탕집 남자들’>작가 김수현 선생이 어느 날 차에 탔다가 이 노래의 가사 한 구절을 들었다.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선생은 곧 카세트를 구해 그 노래를 듣곤 드라마에 넣었다는 뒷얘기다.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실연의 달콤함이야 있겠냐마는." 그는 이 대목이 참 좋다. 그 앨범, 그를 살려냈다. 그에게, 낭만이라는 단어는 그저 나에게 아름답기만 한 단어는 아니다. 예순이 넘어서까지 가수 일을 하게 해 준 은인 같은 노래라는 것이다. 실상 그의 목소리에는 세월의 깊이를 느끼게 하는 진지한 울림이 있다. 마음에 오랜 진동을 주는 그런 울림이다.

40대에 <낭만에 대하여>, 아흔이면 ‘기 찬’ 가사 나올 것

Q. 그 노래로 1996년 KBS 가요대상에서 작사상을 받았다. 어떤 생각으로 가사를 썼나?

“그 가사를 쓸 때, 내 나이 마흔 다섯이었다. 스물다섯, 서른다섯엔 쓸 수 없는 가사다. 나이를 먹는 다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인지 그때 배웠다. 아흔쯤 되면, 정말 ‘기가 찬’ 가사가 나올 것 같다.”

그 가사의 고향? 부산 동래의 한 다방이다. 옛날 다방, 색소폰, 도라지 위스키 같은 기억들이 어디서 나왔겠나. 그가 굉장히 힘들었을 때 비 내리는 날 우연히 갔던 다방이다. 다방음악에서 색소폰 음악을 듣고 가슴의 울림을 느꼈다. LP재킷을 챙겨보니 에이스 캐논의 <Laura>라는 연주곡이었다. 그런 기억을 끄집어내서 만든 노래다. 노래를 다 만들고 나서 가사를 읽어보니 ‘아~ 이게 낭만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노래 맨 마지막에 "낭만에 대하여"라고 붙였다.

Q. 부산노래 <청사포>, 최백호적 정서를 잘 표현한 노래 아닌가?

"정말 만들고 나서 그렇게 좋아했던 노래는 드물다. 부산사람들이 좋아 하겠다는 기대도 했고, 가사나 음악적 완성도는 <낭만에 대하여>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단지 김수현 선생님이 못 들으셨다는 점 외에는(웃음)….“

'청사포'(靑沙浦)'는 고향 부산 해운대 달맞이 고개 아래 있는 작은 포구 이름이다. 부산의 젊은 사람들이 데이트 코스로 자주 찾는 곳이다. 그의 20대를 떠올리는 자작곡이다. 젊은 시절 사랑했던 여인의 추억을 회상하는 포크와 트로트를 접목시킨 분위기의 곡. 40∼50대 중년 남자들이 노래방에서 분위기 잡고 부르는 <낭만에 대하여>와 닮아 있기도 하다.

Q. 당신의 노래, 가사가 좋은 노래가 참 많다. 곡을 쓸 때 멜로디보다 가사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인가?

“그렇다. 곡을 쓸 때 가사를 먼저 쓴다. 1993년 <애비>라는 곡도 가사를 먼저 쓰고, 가사를 보고 ‘이 노래는 트로트가 어울리겠다’ 생각해서 트로트로 불렀다. 고집하는 장르 없이 가사에 맞게 곡을 만든다.”

Q. 데뷔한 지 40년이 넘었다. 돈을 벌기 위해 가수가 됐고, 한 때는 가수가 천직이 아니라고 생각도 했었는데… , 그런 당신에게 ‘노래’란 어떤 의미인가?

“내 노래는 나의 이야기다. 그림을 그리듯 내 마음의 이야기를 그린다. 특별히 음악 공부를 하지 않았고, 그래서 많이 모자라지만 꾸준히 공부하고 노력한다. 나이 들수록 더 훌륭한 노래들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어느 인터뷰에서 털어놨다, 노래는 그에게 위로이자 치유였다고. 노래를 하며 그 자신을 치유했다고-.

그의 노래, 스펙트럼은 참 다양하다. 데뷔곡 <내 마음은 갈 곳을 잃어>는 애상(哀想)의 분위기를 안고 있으나, 다른 많은 히트곡에선 남성성과 젊음의 피가 새삼 돋보인다. <입영전야>, 우리 가요사에 흔치 않은 그 진취적 젊음의 메시지를 우리는 잊지 못하리. <영일만 친구>, 영원한 우정과 모험의 노래 아니던가. 그 뿐인가, 최백호는 늘 ‘진화 중’이었으니, <애비>, <낭만에 대하여>는 또 얼마나 사람냄새 물씬한가. 그래서, 대중은 그의 10년 뒤, 20년 뒤를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다.

부산, 나를 낳고 나의 음악을 키운 고향

Q.부산과의 인연은 언제부터인가?

"난 어린 시절 경남 동래군 장안면 좌천에서 태어나 일광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지금 부산시 기장군 편입지역이다. 내 어머니와의 추억이 남아 있는 일광초등학교 교정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곳이다. 지금도 시간 나면 고향엘 간다. 그곳에 앉아 있으면 10대 시절의 나로 돌아 갈수 있다.“

Q. 부산은 자주 오는 편인가?

“그렇다. 적어도 석 달에 한 번은 간다. 최근엔 해운대 청사포 한 화랑에서 개인전을 갖기도 했다. 어렸을 적 꿈, 그 화가에 도전하며 내 부산 추억을 듬뿍 안고 있는 청사포에서 ‘나무’를 주제로 전시회를 가진 거다. 굳이 가는 간격을 셀 필요도 없이, 난, 부산을 참 자주 간다.”

Q. 부산에서 최백호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은 곳은?

"역시 기장 일광지역과, 내가 자주 거닌 청사포, 그리고, 잊을 수 없는 곳, 내가 80년대 초반 노래를 부르던 음악살롱 ‘열풍’이 있던 서면 거리다.“

Q. 당시의 부산과 지금의 부산 어떻게 달라졌나?

“부산, 많이 달라졌지. 도시의 외형적 발전은 눈부실 정도다. 아쉬운 점도 없지 않다. 문화적 토양이 아직 허약하다는 것이다. 얼마전 보니 벡스코 오디토리움에서 대형 공연을 갖던데, 전문 공연장도 더 늘어났으면 좋겠다.”

Q. 부산의 강점, 부산사람의 특질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자유분방하고 넉넉한 여유, 그게 부산사람들의 최고 특별한 기질 아닐까? 어느 지역 사람들보다 ‘낭만’의 느낌도 잘 알고 있고-.”

내 손자손녀 ‘좋은 노래 하셨네’ 평가면 만족

'낭만가객‘ 최백호는 다재다능한 예술가다. 당연히 취미도 다양하다. 그는 예순 즈음에 첫 개인전을 열었다. 나무를 주소재로 작업하며 ‘나무화가’라는 별칭까지 얻고. 어린 시절 집을 나서면 보이는 나무들, 끝없이 펼쳐진 광야와 그 위에 홀로 선 쓸쓸한 풍경을 보며 무작정 그리기 시작한 그림, 그 그림에의 꿈을 늦게나마 성취하고 있는 것이다. 청사포에서 개인전을 가졌다는 그 그림 솜씨다.

Q. 축구, 골프, 그림...,등 취미가 많은데, 그 중에서도 그림은 개인전을 열 정도다. ‘화가’ 최백호, 주로 나무를 그린다던데….

“그렇다, 시골 출신이어서 그런지 나무를 좋아한다. 나무는 나에게 참 많은 것을 얘기해 준다., 앞으로 시간 여유가 생기면 다른 대상도 그려볼 생각이다.” 지난 2009년,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나무를 주소재로 작업하며 ‘나무화가’라는 별칭까지 얻고 있다. 어린 시절 집을 나서면 보이는 나무들, 끝없이 펼쳐진 광야와 그 위에 홀로 선 쓸쓸한 풍경을 보며 무작정 그리기 시작한 그림에 대한 꿈이 개인전까지 이어졌다.

“언젠가 고향에 갔다가 어릴 적부터 보던 오래된 벚나무가 변함없이 그 자리에 서 있는 걸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나무는 사람의 모습이랄까? 우리도 다 고향을 떠나와서 살고 있지 않나. 나무가 고향인 산을 떠나서 사는 것처럼, 그런 느낌. 또 나무를 좋아한다.” 나무는 세월이 아무리 지나고 찾아가도 항상 변함없이 그 자리에, 사람들과 달리 옮겨 다니지 않고 꿋꿋이 버티고 서 있다. 그런 모습이 좋아서 , 그는 나무를 그리기 시작했다. 앞으로도 당분간은 나무만 그릴 생각이다. 그는 나무에서 동질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Q. 건강은 어떻게 관리하나? 언제까지 현역 활동 할 생각인가?

"스물아홉 살부터 축구를 꾸준히 해왔다. 미사리에서 활동하는 무명가수들의 축구팀이 있다. 지금도 일주일에 한 번씩 뛴다. 나도 30분씩 세 번 즐겁게 뛰고 있다. 그리고 15년 전부터 육식을 하지 않는다. 바다생선과 야채만 먹는다. 그 덕분에 건강한 것 같다.“

알고 지내는 한의사의 비방(?) 덕분일까? 식이요법을 따르고부터 건강이 좋아졌음을 실감한다. 피곤한 것도 없어지고, 호흡도 좋아졌다. 보통 가수들은 나이가 들면 키가 내려가지만, 그는 반대로 올라갔다. 담배도 그때쯤 끊었고-.

Q. ‘90세까지 노래를 하겠다’고 말했던데, 언제까지 현역 활동할 생각인가?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는 환경이면 좋겠다. 노래 역시. <낭만에 대하여>를 40대에 썼으니, 나이가 들수록 더 좋은 노래를 만들 수 있다는 기대는 있다. 한 90쯤 되어서 멋진 히트곡을 하나 내고 싶다. 90쯤 살아보면 세상이 좀 보일 것 같고.. 그럼 좀 건방진 노래를 부를 수도 있겠지. 인생은 이런 거다, ‘까불지 마라, 이것들아’ 그러면서 살아가는 거다.

‘낭만가객’ 최백호는 90세까지 노래하길 꿈꾼다. 그 때쯤이면 ‘낭만에 대하여’를 능가하는 좋은 노래를 만들 수 있겠다는 기대다. 그 때쯤 그는 정말 ‘백발의 낭만가객’으로 대중과 울고 웃을 것인가(사진: 차용범 제공).

Q. 앞으로의 계획은?

"영화를 하나 만들 계획이다. 가능하면 중학교 정도의 축구팀 감독도 한 번 해 보고 싶다. 나름대로 축구 철학이 있다. 그는 ‘음악’에 관해선 장래 계획을 얘기하지 않지만, 그는 1950년대 전통가요 복원에의 꿈을 드러낸 바 있다. 우리 전통의 ‘창’을 계승해서 전통가요로 발전시킨다면 의미 있고 재미있는 작업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쉽지는 않겠지만 그의 세대가 해야 할 일이라고 보는 것이다.

Q. 앞으로, 어떤 평가를 받고 싶은가?

"그런 거창한 생각은 해 보지 않았다. 훗날 내 아이의 아이들이 ‘우리 할아버지 참 좋은 노래 하셨네’라는 평가를 할 정도의 삶이면 만족하겠다.“

순박한 품성∙‘국보가수’ 역량, ‘백발의 낭만가객’ 기대

낭만가객 최백호와 글쓴이의 작은 인연 얘기. 그가 80년대 초반 부산 서면에서 한창 노래를 부를 무렵, 글쓴이는 부산일보 사회부 기자였다. 한 선배의 소개로 그의 음악을 들으러 클럽 ‘열풍’을 찾아 다녔다. 그를 알고부터, 그의 LP앨범을 사서, 그의 사인을 받아 주변에 나눠주기도 하고. 그는 무대에서 열창을 한 뒤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작은 방에서도 ‘팬’ 서넛을 앉혀두고 그야말로 땀을 뻘뻘 흘리며 열창을 선사했다. 난, 그 때 그의 열정에 감동했다, 그리고 “저런 열정이면, 가수 최백호는 꼭, 크게 성공할 것”임을 굳게 믿기 시작했다.

어느 날 심야에는 그의 신혼 아파트를 찾기도 있다. 우리가 자정을 넘겨가며 술을 먹고 노래를 즐기려할 때, 그가 “우리 집에 좋은 양주 한 병 있다”며, ‘우리’ 일행을 초대했기 때문이다. 해운대 재송동 좁은 아파트, 그 ‘좋은 양주’는 수퍼마켓용 국산 양주였다. 그래도 나는 가슴이 울컥했다. 그가 굳이 자정을 기다리지 않고 귀가를 서두른 이유를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어린 아내’를 자정까지 홀로 둘 수 없어, 자정 전 귀가를 약속한 신혼시절이었던 것이다. 난, “저런 순박한 품성, 저런 애정이면 분명 ‘성공한 부부’로 오래 남을 것”임을 굳게 믿었다.

최백호, 그는 나름 “지금도 할 만큼 하고 있다”고 자족하는 ‘낭만가객’이다. 그리고, 그의 음악적 역량은 아직도 ‘진화 중’이다. 그의 지론은 “늙은 노래, 젊은 노래가 없듯이 음악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는 것(사진: 차용범 제공).

그 때의 믿음대로 최백호는 폭넓은 청중층을 확보한 ‘국보가수’(배철수의 표현)로 성공했다. 그는 나름 “지금도 할 만큼 하고 있다”고 자족하는 ‘낭만가객’이다. 그리고, 그의 음악적 역량은 아직도 ‘진화 중’이다. 그의 기대처럼, 그는 아흔 무렵이면 지금보다 훨씬 멋진 ‘백발의 낭만가객’이 되어 것이다. 그의 아이의 아이들은 나중 “우리 할아버지 참 좋은 노래 하셨다”며, 그를 칭송할 것이다. ‘낭만가객 최백호’, 오늘의 그를 보면 내일의 그를 기대할 수 있으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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