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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현대인물을 찾아서, 이해인 편] "감사하는 마음, 향기로운 삶과 행복 키우고, 고전 읽으며 도전하는 용기 가져라"

기사승인 2019.02.12  14: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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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망'의 시인 이해인 수녀에게 ‘희망’의 길을 묻다 / 차용범

이 글은 인터뷰 시점이 2012년인 까닭에 일부 내용은 현 시점에서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시를 쓰는 수녀 이해인(李海仁, 74). 자연∙인생을 성찰하며 사랑∙행복을 기도하는 ‘희망’의 시인이다. 그의 트레이드마크는 '꽃시'다. 일상적 체험을 녹여낸 많은 꽃시를 쓰며 믿음과 소망, 사랑과 행복을 얘기한다. 그는 이 시대 '치유∙희망의 메신저'다. 슬픈 사람을 위로하는 글을 쓰며 글의 힘, 글의 치유능력을 경험한 바탕 위다. 그는 2008년부터 암과 싸우면서, 글을 통해 희망과 행복을 전파하고 있다.

이해인 수녀 인터뷰 표정, 그는 글을 통해 희망과 행복을 전파하고 있다(사진: 차용범 제공).

지금은 '분노의 시대'-. 우리나라 역시 세대∙계층에 관계없이 분노하며 위로∙공감에 목말라 하는 시대다. 청년들은 아프고 중장년은 불안하다. 이 시대의 '맑은 영혼' 이해인의 시, 이해인의 삶은 많은 이를 위로하며 희망을 줄 터이다. 50년차 글쟁이의 남은 소원 역시, 아프고 힘든 사람들을 대변∙위로하는 소박한 노래를 더 많이 쓰는 것이다. 그는 1964년, 10대 소녀시절 구도자의 길을 찾아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에 입회, 광안리 앞바다를 내려다보는 낮은 언덕 위에서 내내 온전한 부산사람으로 살고 있다.

[이해인(李海仁) 약력]

1945년 강원도 양구 출생. 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 수녀회 소속 수녀이자 시인. 1964년 부산 성베네딕도 수녀회 입회, 1968년 첫 서원, 1976년 종신서원. 서강대 종교학 석사. 1970년 문단 등단. 시집 ‘민들레의 영토’(1976), ‘내 혼에 불을 놓아’(1979),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1983), ’작은 위로‘(2002) 등. 산문집 ‘두레박’(1990), ‘사랑할 땐 별이 되고’(1997), ‘꽃삽’(2000), ‘고운 새는 어디에 숨었을까’(2001), ‘꽃이 지고 나면 잎이 보이듯이’(2011) 등. 부산 여성문학상(1998), 천상병 시 문학상(2007) 수상.

글 쓰는 수녀, 글로써 치유희망 전파하기

<행복의 얼굴>

사는 게 힘들다고
말한다고 해서
내가 행복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내가 지금 행복하다고
말한다고 해서
나에게 고통이 없다는 뜻은
정말 아닙니다
마음의 문/활짝 열면
행복은
천 개의 얼굴로
아니 무한대로
오는 것을
날마다 새롭게 경험합니다
어디에 숨어 있다
고운 날개 달고
살짝 나타날지 모르는
나의 행복
행복과 숨바꼭질하는 설렘의 기쁨으로 사는 것이
오늘도 행복합니다

수녀 이해인은 실상, 수녀를 넘어 온 나라에 명성 높은 베스트셀러 작가다. 1970년 ‘소년’지에 동시 3편으로 등단한 이래, <민들레의 영토>(1976)부터 <작은 위로> <작은 기쁨> <희망은 깨어 있네> 같은 시집과, <사랑할 땐 별이 되고> <향기로 말을 거는 꽃처럼> 같은 산문집까지, 30여 권의 시집∙산문집을 냈다.

Q. 수녀에서 시인으로 삶의 영역을 넓힌 계기는?

“그냥, 아주 자연스럽게! 어려서부터 사색하며 책을 읽거나 글쓰기를 좋아했다. 여중 시절 문예반에서 칭찬도 받고, 여고시절 백일장에서 입상을 하면서…, 약간의 자신감도 얻고 주위의 격려에 힘입어 수도원에서도 계속 글을 쓰고 있다.”

1970~1980년대, 시는 권위주의에의 우회적 비판 채널로 뜨거운 인기를 누렸지만 시집 판매는 부진했다. 그 시대 흐름 속에서 이해인의 시는 독자를 단번에 사로잡았다. 구도자적 시풍, 쉽고 정갈한 시어로 충격을 준 것이다. 베스트셀러에서 시집을 찾기 힘든 시대, 그의 시집은 진기록을 쏟아냈다. 1985년, 3번째 시집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가 연말 종합 베스트셀러 2위에,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 두 번째 시집 <내 혼에 불을 놓아>가 3, 4위에 오른 것이다. 2011년 교보문고 개점 30주년 설문조사에서, 그는 50-60대가 가장 선호하는 작가로 꼽히기도. 그의 저작은 어림잡아 600만 부가 넘게 팔렸다.

Q. '글을 쓰는 수녀' 이해인에게 시는 어떤 의미일까?

“글쎄..,. 기도하는 삶의 연장선상에서 기도를 더 잘하기 위한 도구가 아닐까? 시성 타고르가 표현했듯 ‘신의 갈대피리’ 역할을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시인 이해인을 생각하면 삶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시, 특히 꽃시가 떠오른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누구나 다 꽃을 좋아하지만, 시성 타고르의 시 <꽃의 학교>를 읽고 단번에 매료된 적이 있다. 꽃을 보면 내가 마치 꽃의 정다운 친구나 선생님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을 꽃의 입을 통하여 상징적으로 쓴 게 많다. <꽃은 흩어지고 그리움은 모이고>라는 꽃시집이 대표적이다.” 그는 독자에게 사인할 때 항상 꽃그림을 그린다. 꽃 한 송이로 믿음과 소망, 사랑과 행복을 말할 수 있으므로-.

자연·인생을 성찰하며 사랑·행복을 기도하는 ‘희망’의 시인. 일상적 체험을 녹여낸 많은 꽃시를 쓰며 믿음과 소망, 사랑과 행복을 얘기한다(사진: 차용범 제공).

시 쓰며, “위로받았다” 독자 반응에 늘 행복

“난, 나의 시가 민들레 솜털처럼 미지의 독자에게 날아가 위로와 희망이 되어줌을 직∙간접으로 알게 되었을 때 정말 보람 있고 행복하다.” 그럴 터이다. 그의 시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다. 그는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강의도 계속한다. 그 과정에서 얼굴도 모르는 많은 독자와 만난다. 그의 글을 통해 위로를 받고 희망을 얻었다는 독자편지를 받으면 그렇게 행복하다는 것이다.

<어떤 결심>

마음이 많이 아플 때
꼭 하루씩만 살기로 했다
몸이 많이 아플 때
꼭 한 순간씩만 살기로 했다
고마운 것만 기억하고
사랑한 일만 떠 올리며
어떤 경우에도 남의 탓을 안 하기로 했다
고요히 나 자신만 들여다보기로 했다
내게 주어진 하루만이
전 생애라고 생각하니
저 만치서 행복이 웃으며 걸어 왔다

이해인 인터뷰를 준비하며, 늘 그렇듯 페이스북에 알렸다. 문화기획가 박흥주 대표가 작은 사고로 병상신세를 지고 있으면서 질문을 부쳐왔다. “‘병상일기’ 중 <어떤 결심> 참 좋아하는 시다. 혹 뒷얘기라도?” 그는 평온하게 대답한다.

“가장 힘든 항암 방사선 치료를 받으며 쓴 시다. 시의 내용처럼 일단 투병의 방향을 정해두고 그렇게 살기로 마음을 굳히니 마음에 평화가 오고 결심도 잘 지킬 수 있을 것 같더라.”

수녀시인 이해인, 그는 앞으로도 슬픈 사람들을 달래 줄 소박한 시를 더 많이 쓰고 싶다. 그 동안 시를 통해 소소한 일상을 담아왔다면, 아무래도 아프기 전에 생각하고 표현했던 것과 아프고 나서의 인생관이 달라질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가 아프다? 알려진 대로다. 지난 2008년 갑작스럽게 직장암 판정을 받았다. 종양 제거수술을 받고, 계속 치료를 받고 있다. 투병생활 중에도 그는 틈틈이 시와 일기를 쓰며 즐겁게 지내고 있다. 힘든 시간을 동갑내기 최인호 작가의 위로를 받으며 투병의 도움을 얻기도 했다. 최인호 작가도 비슷한 시기에 암 판정을 받았다.

고통에도 희망 있고 축복 있다

Q. 산문집 <꽃이 지고 나면 잎이 보이듯이>를 보면, “아프고 나서 ‘희망’을 알게 됐고, 사소한 것에 더욱 감사한다”는 구절이 있다. 어떤 얘기를 하고 싶었는가?

“시 <어떤 결심>에 나오듯 ‘내게 주어진 하루만이 전 생애라고 생각하니’, 건강할 적보다는 더 절절하게 감사와 희망을 감지하게 된다. 내가 아프지 않았으면 경험하지 못했을 것들을, 전과는 다른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고 더 많이 감사하고 기뻐하고, 다른 사람을 더 넓게 이해할 수 있다는 걸 비로소 알게 된 거다.”

확실히 그는 투병하며 변한 게 있다. 마지막처럼 살아야겠다고 말했지만, 투병생활을 하니 느낌이 많이 달라졌다. 매 순간 살아 있는 게 경이로웠고, 불교 용어로 말하자면 환희심이 생겨난 것이다. 아프고 나서 행복과 기쁨에 관한 시를 더 많이 썼다. ‘자신에겐 더 엄격하고 남에겐 더 너그러워진 것’도 선물로 여긴다. 지금 건강은 어떤가? “고만고만하다. 과장 않고 그렇게 말하는 게 제일 낫다.”

추모 글 쓰며 글의 치유능력 경험

그는 지난 몇 년 동안 정신적 지주 같은 지인들을 차례로 떠나보냈다. 김수환 추기경, 법정 스님, 장영희 교수, 박완서 선생, 이태석 신부..., 그 상실감도 예사롭지 않았을 터이다. “그 때마다 추모의 글이라고 할까, 다른 사람의 마음을 대신한 기도문을 엮으면서, 대신 위로를 받곤 했다. 독자들도 부쩍 늘어난 것 같고..., 내 아픔을 통해서 아픈 사람과 벗이 될 수 있다면 그것도 참 고마운 일이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는 독자들이 그의 글에 공감하는 것을 보며 글의 힘과 치유능력을 새삼 실감하고 있다.

또 페이스북 얘기. 부산사람 이태석 기념사업회의 한 핵심인사가 준 질문이다. 최근 이태석 신부 선종 2주기 추모 겸 제1회 이태석 봉사상 시상 때, 수녀시인이 추모시를 보내왔다. 고 이 신부와 어떤 인연이 있는지?

“신부님을 직접 만난 것은 딱 한 번, 돌아가시기 전 어느 기도모임에서였다. 힘든 투병 중에도 아주 선하고 의연한 표정이 인상적으로 남아있다. 그 부산행사엔 연례피정과 일정 겹쳐 가질 못했다. 나중 내가 보낸 가사에 곡을 붙인 노래를 들어봤다. 맘에 들더라. 추모노래를 부르며 울었다는 사람도 많았고....”

그 추모곡 가사 일부. “너무 많이 사랑해서 너무 빨리 타버린 불꽃인가요/부를수록 빛이 되는 그리운 님이시여/밤낮으로 땀흘리신 당신의 삶과 수고 열매를 맺어/우리를 하나로 모으네요 어서 사랑하라고 재촉하네요...” 그가 보낸 추모시 제목은 <사랑의 눈물 속에 불러보는 이름-고 이태석 신부님께->.

‘행복’을 전파하는 그의 행복론은 간명하다. 오늘을 사는 인간으로서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행복이다. 개인적으론, 지금 수도공동체 안에서 동료들과 일상생활을 함께하는 것 자체가 가장 큰 행복인 것이다. 그가 전파하는 ‘작은 행복비결’이 있다. 우리 모두가 조금 더 행복해지는 방법이다. 첫째, 받은 것에 감사하라. 둘째, 당연한 일에 기적처럼 놀라워하며 감탄하라. 셋째, 자신의 실수∙약점을 부끄러워 말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여유를 지녀라. 넷째, 속상하고 화나는 일에 흥분하기보다 ‘모든 것은 다 지나 간다’는 생각으로 순한 마음을 지녀라....

이해인 ‘클라우디아’ 수녀. 강원도 양구의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 6∙25전쟁 때 부산 피난생활을 한 뒤 상경. 어릴 때부터 ‘사람은 왜 죽는가’ ‘삶의 끝은 어디인가’ ‘사랑하는 이들끼리 왜 헤어져 사는 날이 많은가’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1964년 19세 때, 부산에서, 먼저 수녀원에 간 언니의 영향으로, 수녀원에 입회했다. 1968년 첫 서원 때 받은 수도명은 ‘클라우디아.’ 가톨릭 잡지에 시를 투고하며 ‘해인(海仁)’이라는 필명을 썼다. 바다(海)와 <논어>에 나오는 인(仁)자를 좋아해서 직접 지은 이름이다.

중학교 시절, 똑똑하고, 예쁘지만 차가워 보이는 인상의 소녀였다. 중3 때 급우 김혜숙(74) 씨는 당시 이해인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무척 차분했어요. 그때도 책을 많이 읽었구요. 목소리가 맑고 발음이 정확해 수업시간에 책 읽기를 하면 선생님이 칭찬을 많이 해주셨죠.” 어린 친구가 언니를 따라 수도생활을 하겠다고 했을 때 김 씨는 그저 쉽게 생각했다. ‘아, 친구가 원하는 삶이구나’ 정도로. 지금 생각하면, 그 나이에 삶의 방향을 결정했으니, 굉장히 성숙한 소녀였다는 것이다.

중학교 2학년 시절의 이해인 수녀(왼쪽에서 두 번째)와 왼쪽 끝의 가수 박인희 씨(사진: 차용범 제공).

문서선교를 통해 사랑과 희망을 나누다

Q. 시인은 지금 '문서선교'를 맡고 있다. 어떤 일들을 하는가?

“‘해인글방’에서 책 읽기, 편지 쓰기, 부탁받은 글쓰기를 하며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지요. 때로는 특정한 그룹과 간담회를 하거나 수업도 합니다.” 수녀원엔, 그에겐, 초등학생부터 재소자∙장애인∙주부 같은 다양한 사람이 편지와 이메일로 온갖 사연을 보내온다. 유독 아픈 사연이 많다. 그들이 사랑과 희망을 잃지 않도록 가능하면 답장을 하려 한다. 그늘진 곳에 사는 사회적 약자에게 먼저 답장을 하는 방식으로-. 친분이 두텁지 않아도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려 노력하는 게 사랑을 잘하는 방법이라 믿고 있다.

문서선교실인 ‘해인글방’에서 이해인 수녀는 책읽기, 편지쓰기, 글쓰기를 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사진: 차용범 제공).

‘해인글방’? 수녀원 입구 연수원 1층에 있는 그의 작업실이다. ‘문서선교실’ 하면 딱딱하다며 수녀님들이 붙여준 이름이다. 이 곳에서 글을 쓰고 PC작업을 한다. 이름이 알려지면서 멀리서 구경(?)삼아 오는 분도 많다. 단, 수도원은 기도시간이라든지 항상 시간이 정해져 있는 곳, 면회시간을 예약해서 오면 자유롭게 덕담을 나누며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그 때문에 유명세를 탄 ‘방’은 또 있다. 우선 ‘민들레방’. 수녀시인의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를 줄여 붙인 이름이다. 그가 아끼는 책이 있고, 어렸을 적 가족사진이며, 지인과 나눈 편지며, 선물 받은 그림이 있다. 일종의 이해인 수녀 자료방이다. 또 하나, 언덕방. 게스트 룸이다. 출입문 위엔 통도사 축서암의 시인 겸 선화가 수안(殊眼)스님이 써준 현판이 걸려 있다. ‘言德房(언덕방)’으로. 작고한 작가 박완서 선생이 자주 묵은 곳으로 유명세를 탔지만, 실상 많은 유명인사가 묵고 갔다. 구상, 김남조, 피천득, 최인호, 홍윤식, 장영희, 정채봉, 윤석화, 노영심....

언덕방(言德房)의 이해인 수녀. 작고한 작가 박완서 선생, 구상, 김남조, 피천득, 최인호, 홍윤식, 장영희, 정채봉, 윤석화, 노영심 등 많은 이들의 추억이 이곳에 남아있다(사진: 차용범 제공).

Q. 시인 역시, 이 시대의 유명인사다. 그만큼 겪은 해프닝도 예사롭지 않을 듯?

“어느 언론사 기자시험에서 ‘만나기 어려운 사람 인터뷰해 주면 점수를 더 준다’고 했던 모양이다. 많은 젊은이들이 막무가내로 수녀원 현관에서 진을 치거나 종일 수녀원 근방에서 지나가는 아무 수녀나 붙들고 ‘이해인 수녀 아니냐?’고 물어 곤혹스럽던 일이 있었다.” 어쩌다 전철이나 기차를 타고 승객들과 대화를 나눌 적에, 그가 “광안리에 있는 수도원에 산다”고 얘기하면 대뜸 “이해인 수녀 아느냐?”고 되묻는 경우도 많다. 그의 실명은 ‘이명숙’, 병원기록도 다 실명이다. 독자들은 병원에서 ‘이해인’을 찾다가 그냥 돌아간 경우도 있다.

그는 천주교 수녀이면서 불교와도 친하다. 법정 스님을 비롯한 여러 스님과 우정을 나누고 있고, 불교 용어도 자주 쓴다. 그의 강의를 들은 산청 간디학교 학생들이 보내온 편지엔 ‘이해인 수녀님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라며, ‘종교를 넘나들며 친구 사귀기’도 있다.

“법구경의 말씀들을 좋아합니다. 수행, 정진, 도량, 합장, 공양, 보리심, 환희심 같은 용어도 마음에 들더군요.” 법정 스님과의 인연도 글 때문이다. 스님에게 첫 시집을 보냈을 때, 스님은 바로 답신을 주더란다. “어린 왕자의 촌수로 따지면 수녀님과 난 친구입니다”로 시작하는 편지와 함께-.

Q. 600만 부를 판 베스트셀러 작가, 인세는 어떻게 관리하나?

“해마다 재정담당자가 살림보고를 한다. 강사료∙원고료∙인세에 대한 언급도 있어 ‘올해는 얼마가 들어왔구나’ 대충 짐작만 할 뿐이다.” 수도원에서 알아서 관리한다는 얘기다.

‘부산사람 이해인’의 부산 이야기

양구소녀 이명숙. 그는 ‘부산사람 이해인’으로 살기 전, 이미 부산생활을 경험했다. 전쟁통 피난길에, 범일동에 세 들어 살며 성남초교 1, 2학년을 다녔다. 당시 그는 어린 마음에도 그 많은 피난민들을 받아 준 부산인심에 큰 고마움을 느꼈단다. 여중 3년, 16세 때 처음으로 해운대 바다를 보고 황홀해했던 기억도 생생하다. 지난 연말 부산 범일성당에서 특강을 하며, 옛 생각이 나며 울컥했다. “그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외형적으로는 많이 달라지만, 본래 부산사람의 기질과 인심은 그대로 살아있는 것 같은데요?”

“40년 이상을 이곳에 살다 보니 저도 분명 부산사람이죠. 부산과 부산사람, 부산문화는 동백꽃, 갈매기, 어묵이 잘 표현해주는 것 같아요. 동백꽃처럼 밝고, 갈매기처럼 자유롭고, 어묵처럼 구수하고 수수한 맛과 멋! 겉으론 무뚝뚝해도 속정이 있고, 사귀긴 힘들어도 알고 보면 속정 깊은 (부산을 포함한) 경상도 사람을 저는 좋아합니다.” 그는 자칭 ‘부산 홍보대사’다. 어디서든 부산 험담하는 건 그냥 들어 넘기지 못한다. 되받아가며 부산자랑을 꼭 해야 직성이 풀릴 정도다.

젊은 시절의 이해인 수녀. 그는 10대 소녀시절 구도자의 길을 찾아 부산 성 베네딕도수녀회에 입회, 40년 이상 부산에 살고 있다(사진: 차용범 제공).

Q. 요즘 많은 사람, 특히 젊은이들이 많이 아파한다. 그들에게 특별히 전해 줄 치유격려의 말씀은? 그는 우선 청소년에게 몇 가지 생활지침을 전하고 싶어 한다.

“마음을 선하게, 말씨를 아름답게, 태도를 겸손하게, 시간을 성실하게, 우정을 소중하게..., 부딪치는 어려움에는 굴복이 아닌 극복의 태도로 인내하며 당당히 전진하는 삶의 주인공이 되라.” 그는 요즘 젊은이들은 정신력이 많이 약해졌다고 본다. 젊은이들이 고전을 읽으며 내면을 더 다듬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고전들은 내용을 달달 외우지 않아도, 평상심을 갈고 닦는 방법을 고민하고 여유를 찾는 데 도움을 준다고 믿고 있다.

유명한 절집이 그렇듯, 수녀시인이 머무는 수녀원 역시 광안리 앞마다를 내려다보는 경관이 빼어나다. 그 곳에서 인터뷰를 마칠 때, 그는 “한번 들어보라”며 뮤직 마운트 3집 <풀꽃단상>을 전해줬다. 그 음악의 노랫말과 선율은 정말 안온했다. 뒷 표지에 새긴 수녀시인의 시 한 구절 역시 그의 ‘희망’ 메시지 바로 그것이다.

아직 살아 있는 동안 더 많이 사랑하십시오
아직 살아 있는 동안 더 밝게 웃으십시오
아직 살아 있는 동안 더 넓게 용서하십시오.

[블로그 후기]

윤정희∙고은아 못잖은 미모... '속세적 사랑‘ 느낀 적 없나?
‘한 사람의 연인’ 대신 ’만인의 애인‘으로, 참 행복하다...

<차용범이 만난 부산사람>-잡지 '부산이야기'에, 제가 맡은 인물 인터뷰 코너입니다. 이번 인물은 '시 쓰는 수녀 이해인', 부산 광안리 성베네딕도 수녀원에서 근 반 세기를 살고 있는 '부산사람'이죠.

사실 이 인터뷰를 준비한 것은 몇 년 전의 일입니다. 그거 쉽지 않았습니다. 워낙 바쁜 수녀시인 일정 때문이었죠. 그러다, 갑자기 발병 소식을 듣곤, "아, 이 인터뷰 인연이 닿질 않는구나!" 이렇게 생각했죠. 최근 수녀시인께서 새로 산문집을 냈다는 소식, 고 이태석 신부 선종 2주기 때 추모시를 보낸 사연, 몇몇 매체에 인터뷰 한 기록을 보곤, 다시 시도했어요.

이번엔 통했습니다. '부산이야기' 담당자가 자신 있게 얘기하더군요. 대략 언제쯤 인터뷰하며 사진촬영도 할 수 있겠다고. 내심 기뻤습니다. 아, 그 유명한 수녀시인님 만나 물어볼 얘기 많고, 제 코너에 여류명사 한 분 모신다는 다행스러움도 있었습니다. 저, 이 코너 진행하며 처음 만난 '안철수 교수', 그땐 지금처럼 정치적 무게 대단할 때 아니었구요. 그 뒤 천호식품 김영식, 건축가 승효상, 야구해설가 허구연, BIFF 조직위원장 이용관, 세정 박순호, 이런 분들 모시면서, 여류명사 모시기 참 쉽지 않았거든요.

지난 8일 오후, 수녀시인 그 분 만났습니다. 요즘도 정기적으로 암 치료 받는 분이라는 선입견 때문이었을까요? 그 분, 웬만큼 괜찮아보였습니다. "아픈 만큼 1시간 이내로 끝내자"는 약속 있었습니다만, 그 분은 시간 관계없이, 정말 정성껏 인터뷰에 응해 주었어요. "사실 '부산이야기'엔 인터뷰 제때 응해주지 못해 나름의 빚 갖고 있다"는 속내도 즐거이 털어놓으면서. 여러 흘러간 스토리도 즐거이 끌어내고, 사진 촬영장소도 두루 안내하더군요.

그 날 날씨도 대단한 한파였습니다만, 사진 찍을 땐 꼭 수녀복 차림으로, 굳이 얇디얇은 코트도 벗고 수녀복 차림만을 고집하더군요. 10대 소녀시절 구도자의 길을 찾은 이래 지금까지 한길 걷는 결기, 그건 참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날 인터뷰는 보다 일찍 끝낼 수 있었습니다. 수녀시인은 미리 전해 드린 질문지에, 아주 꼼꼼한 답을 미리 해 줬거든요. 그러나 일단 만나고 보니 그건 또 다른 상황이었습니다. 마주보며 자연스레 떠오른 화두들도 있고, '언덕방' 같은 곳에선 직접 구운 쿠키며, 따뜻한 차도 나눠야했고, 우선 그 분은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그런 인상이었습니다.

인터뷰의 핵심의도와 오고간 얘기들은 대략 정리했습니다. '부산이야기' 게재원고 만들기 앞선 초벌원고이니 분량은 넉넉하네요. 단, 얘기는 나눴으되 원고에서 뺀 스토리 한 토막을 살며시 공개해 드립니다. 수녀시인께선 답변을 했으되, "혹, 민감할 수 있겠다"며, 원고에 넣지 말아줄 것을, 넌지시 부탁해 온 것입니다.

인물 인터뷰엔 이런 여유 많습니다. 혹 여느 정치인이나 뉴스메이커 인터뷰하며 무심코 내뱉은 한 마디도 기어이 놓치지 않은, 그런 인터뷰완 차원 다르죠. 인터뷰이(Interviewee)의 마음도 편케, 읽는 이도 가볍게 쉬이 읽을 수 있는, 그게 인물 인터뷰의 영역이니까요. 다만 그 질문만은 전해 드립니다. 며칠 전 인터뷰 앞두고 어느 책 읽으며 선뜻 떠오른 의문이었어요. 정면으로, 공격적으로 묻기엔 너무 조심스러웠지만, 언덕방에서 차 한 잔 나누며 분위기 좀 느긋할 때, 환담하듯 나긋나긋 물은 사연입니다.

신라 신문왕대 여류시인 설요(薛瑤)의 시에 <반속요(返俗謠)>가 있다. 10대 때 스님을 꿈꿨다가 20대 초반 환속을 결심, 환속의 이유를 밝힌 시다. 그 시의 마지막 소절은, “꽃 피어 봄 마음 이리 설레니/아, 이 젊음을 어찌할거나”

봄바람이 난 것이다. 얼마나 솔직한가. 스무 살 안된 나이에 속세를 떠나 여승이 되려고 절에 들어갔다. 그러나 굴러가는 낙엽만 봐도 웃는 나이에 이 꽃향기를 어쩔 것인가. 속세를 떠나 불교에 귀의하려 하는데 꽃들이 지금 미친 것이다. 앞 다퉈 꽃망울을 터뜨리며. 그래서 결국 환속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대책 없는 생의 충동인가. 그 충동은 위태롭고 무질서한가.... 그러나 삶 속에서 언제나 사랑은 두려움이나 부끄러움보다 먼저 아닌가. 수녀시인께선 특히 꽃시를 많이 쓰며 꽃을 자세히 관찰할 터, 혹, 동백, 진달래, 개나리, 매화, 벚꽃 같은 봄꽃을 보며 마음이 설레거나 ‘속세적 사랑’을 느껴본 적은 없는가?

정말이지, 수녀시인의 여고시절, 또는 초기 수녀시절 사진을 보니 그 분, 참 '미인형' 얼굴이더군요(정말 조심스런 표현입니다만). 어느 사진 한 장엔 당대의 여자배우 윤정희, 고은아와 함께 찍은 장면도 있던데, 아름다움에 관한 한 세 분 중 누구 하나 빠지 지 않는, 그런 장면이었습니다. 제가 조심스레 그런 인상을 얘기하니, 그 분은 좀 민망해 하더군요.

그러면서, 나름 솔직한 대답을 해 주었어요. 그 위태로울 것 같은 질문은 피해 가지 않고, 세월의 흐름 따라 겪어온 심상의 변화를 드러내 보여준 것입니다. 전, 그 분, 그 고통스런 병조차 즐거이 투병하며, 불행을 한탄할 것 같은 여러 상황을 되레 행복으로 받아들이며, 주변에 행복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경지를 읽었습니다. 그 정도의 경지이니 이런 질문에도 솔직하게, 당당하게, 생각 몇 마디를 대답해 준 것입니다. 마지막 표현으론, "'한 사람의 연인' 아닌 '만인의 애인', 그 행복 어찌 말로 다 말할 것인가" 정도입니다만, 자세한 얘기는 줄이기로 했으니, 이것으로 '끝.'

차용범 reporter1@civic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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