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현대인물을 찾아서, 금난새 편] 청중과 소통하는 무대로 클래식 대중화 선도한 음악계 돈키호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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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현대인물을 찾아서, 금난새 편] 청중과 소통하는 무대로 클래식 대중화 선도한 음악계 돈키호테
  • 차용범
  • 승인 2019.02.10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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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대중화의 선구자 금난새에게 음악의 길을 묻다 / 차용범
이 글은 인터뷰 시점이 2012년인 까닭에 일부 내용은 현 시점에서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한국 관객에게 가장 인기 있는 지휘자 금난새(72). 청중과 소통하는 무대로 클래식의 대중화를 선도한 ‘온 국민의 마에스트로’다. ‘해설이 있는 음악회’, ‘마라톤 음악회’, ‘도서관 음악회’, ‘로비 음악회’.... 관객의 눈높이에 맞춘 다채롭고 신선한 프로젝트로 클래식 음악 보급에 앞장서며, 연주하는 음악의 재미있는 정보와 뒷이야기들을 관객에게 전하는 그의 ‘혁명’은 크게 성공했다.

그는 음악이 주는 즐거움과 황홀함을 만끽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 즐거움과 기쁨이 너무(!) 커서 그걸 좋은 사람들과 나누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이다. 과거 농어촌지역 청소년들이 출연한 ‘농어촌희망 청소년 오케스트라’를 지도했고, KBS <해피선데이-남자의 자격>에서 ‘패밀리 합창단’ 지휘자로 출연했다. 그는 청중에게 ‘친구 같은 음악’을 전해주려 애쓴다.

그는 부산에서 나고 자란 부산사람이다. 말도 부산사투리와 서울말을 한데 섞어 쓴다. 부산의 DNA대로, 과감한 도전을 즐겨온 ‘돈키호테’다. KBS 교향악단의 최연소 지휘자에서 무명의 수원시립오케스트라로 옮겨간 일, 유라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창단한 일, 그의 열정적 인생 스토리를 더듬으면 그가 사는 방식과 그의 인기비결 역시 짐작할 수 있을 터. 그에게 부산은 어떤 의미일까? 더 도전하고 싶은 일은 또 뭘까? 그의 진화는 과연 어디까지일까?

[금난새 이력] 

1947년 부산 출생. 서울대 작곡과 졸업, 베를린 음대에서 라벤슈타인 사사. 1977년 카라얀 콩쿠르 입상 뒤 유러피언 마스터 오케스트라 음악감독, 모스크바 필하모닉, 독일 캄머 오케스트라 등 지휘. KBS교향악단, 수원시향, 경기필하모닉 상임지휘자를 거쳐 인천시립교향악단 지휘자 역임. 1998년 창단한 유라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호흡하며 다양한 페스티벌 기획과 실내악 공연의 활성화에 힘써왔다. 창의력 넘치는 아이디어와 재미있는 해설로 ‘클래식 음악은 어렵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청중과 소통하는 무대를 운영 했다. 농어촌지역 청소년이 참여한 농촌희망재단 희망 오케스트라를 지도했고, KBS <해피선데이-남자의 자격>에 ‘패밀리 합창단’ 지휘자로 출연함. 뉴월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음악감독, 성남시립예술단 예술총감독, 서울예술고등학교 교장. 저서로 <나는 작은새 금난새>(1996), <금난새의 내가 사랑한 교향곡>(2008), <마에스트로 금난새 열정과 도전>(2007), <금난새와 떠나는 클래식 여행>(2003), <금난새의 클래식 여행>(2012 합본개정판) 등.

연주 장소∙격식 파괴로 ‘찾아가는 공연’ 개척

‘금난새’의 아이콘은 ‘찾아가는 공연’이다. ‘찾아가는 공연으로 청중 만들기’, 그는 음악연주의 때와 장소를 파괴하며 클래식 대중화에 끊임없이 도전하고 있다. 관객이 모일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 음악을 연주하는 방식, 그는 어떻게 이런 혁명적 시도를 감행했을까?

“음악에서 청중은 매우 중요하고 필수적인 요소다. ‘클래식 음악은 어렵다’는 편견을 깨기 위해선 언제든 청중을 찾아가야 했다. 어려울 것 같은 음악에 재미있는 해설을 붙여 관객의 눈높이에 맞춰야 했다. 청중이 하나도 없는, 각만 잡는 음악회가 무슨 의미가 있나?”

일부 순수 음악계 인사들의 반발도 있었지만, 그는 단호했다. 모두가 ‘제야의 종’에만 관심 있는 12월 31일에도 “이날 공연을 해보면 어떨까?” 하며 제야 음악회를 연 적도 있었다. “청소년 음악회를 초대권으로만 진행하는 관행 대신, 2000원 씩이라도 걷어서 해보면 어떨까?”라고 제안했다. 오래도록 유료 전석 매진 기록을 달성했다. 15년여 동안의 ‘해설이 있는 콘서트’, 그의 전매특허다. 국내 유수 오케스트라들은 지금, ‘금난새 스타일’을 벤치마킹하고 있다. 해설이 있는 연주와 브런치 콘서트, 연주장 개념의 파괴까지. 여러 이벤트를 기획하며 없던 청중을 만들어내는 방식이다. 

금난새 지휘자는 대중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그의 인기 비결은 창의력 넘치는 아이디어와 연주자 간의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바탕으로 한 연주다(사진: 차용범 제공).

Q. 공연을 마치면 무대에서 가장 늦게 퇴장하는 지휘자다. 왜 그런가?

“끝까지 관객과 함께 축하하고 서로의 감동을 나누기 위해서다. 단원들도 노력한 만큼의 갈채를 받아야 한다. 지휘자가 퇴장하면 박수가 그치지 않나? 난, 단원들이 끝까지 박수갈채를 받게 하고 싶다. 이건 내가 배운 것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다.”

그는 번스타인과 카라얀을 향하여 음악가의 꿈과 지향을 세웠고, 독일에서 사사한 스승에게서 음악가의 태도를 배웠다. 스승은 아침마다 연습실에 들어오며, “헤이, 미스터 금, 굿모닝” 하면서 악수를 청해왔다. 학생과 동등하게 악수를 나눈 것이다. 스승이 그에게 알려준 것은 ‘사람은 평등하다’는 것. ‘너를 내가 가르치는 사람’이라며 권위를 내세우기보다, 악수하며 ‘너도 한 명의 지휘자’라며 인정해 준 것이다. 그 순간 그는 지휘자로 탄생했다. 그는 그 깨우침대로 연주자를 대하는 것이다.

카라얀 콩쿠르 입상-국립교향악단 지휘-유라시안 필 창단...

금난새 지휘자. 1997년 카라얀 콩쿠르에 입상한 뒤, 베를린 음대에서 라벤슈타인 교수를 사사하고 귀국했다. KBS 교향악단의 전신인 국립교향악단을 지휘하며 주목을 받았고, 그야말로 승승장구하다 사정이 어려운 수원시향으로 갔다. “어려운 처지의 오케스트라를 멋지게 바꿀 수 있다면 그것도 좋은 도전”이라는 생각이었다. 1998년 국내최초로 벤처 오케스트라 ‘유라시안 필’을 창단해 성공적으로 운영했다. 스스로 ‘돈키호테’라고 말할 만하다. 

Q. ‘유라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한국을 대표하는 국민 오케스트라’로 평가받고 있다. 다른 보조 없이 운영하는 벤처 오케스트라를 창단한 계기는?

“현실에 안주할 수 있었지만 새로운 생각을 했다. 한국 음악계는 제도권의 지원을 받는 것에 인이 박혀 있다. 서울시향은 연간 170억 원, KBS교향악단은 100억 원 가량 지원받아 왔다. 이런 현실을 비난할 순 없어도, 단원들은 ‘좋은 악단’에 들어가면 도전정신을 잃고 안주하기 쉽다. 난, 거꾸로 독립적인 오케스트라를 만들고 싶었다. 오케스트라도 자생력, 경쟁력이 있을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유라시안’은 정부지원 없이 성장했고 최근 4년간 매년 100회 이상의 연주를 하고 있다.”

금난새 지휘자가 1998년 창단한 벤처 오케스트라 '유라시안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사진: 차용범 제공).

그는 자본 없이 제도를 바꿨다. 연주를 많이 할수록 인센티브를 받는 제도다. 일반 기업의 구조 그대로다. 클래식 공연을 관객에게 쉽게 들려주는 방법으로 기업과의 연계를 선택했다. 기업은 예술을 후원함으로써 기업 이미지를 드높이고, 오케스트라는 기업후원을 통해 다양한 공연은 부담 없이 선보일 수 있다. 결국 관객은 질 높고 다양한 공연을 상대적으로 값싸게 즐기는 것이다. 

Q. 오케스트라에도 CEO 정신이 필요한가?

"당연하다. 난 ‘유라시안’을 운영하며 스스로 CEO라고 인식하고 있다. 유라시안이 지금처럼 성장한 배경에는 그런 확고한 자의식도 주효했다. 더러는 지휘자의 변모를 예술의 상업화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예술가적 정신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변질했다고 한탄한다. 그러나 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예술정신을 포기한 적이 없다. 예술정신 때문에 갈등한 적조차 없다. 언제나 나의 길은 예술정신을 향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인천시향, ‘세계 최고’보단 ‘청중 서비스’ 더 중요

Q. 인천시립교향악단을 세계 최고의 교향악단이기보다, 시민에게 사랑받는 오케스트라로 만들었다. 클래식의 대중화를 오케스트라의 역량보다 중요하게 여기나?

“우리나라 음악교육은 입학시험이나 콩쿠르 위주다. 사람이 성장하기 위해 경쟁도 필요하나, 음악은 틀리지 않고 잘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많이 따는 것도 중요하나, 결국 우리 삶 속에 스포츠정신이 있어야 체육도 바뀌는 것이다. 결국, 음악 역시 문화를 사랑하는 국민의 삶 속에 젖는 것이 중요하다. 오케스트라는 세계최고로 가기 보단, 청중에게 서비스하는 것을 더 중시해야 한다. 인천시향 예산, 년 40억 수준이다. ‘세계 최고’를 지향하기 보단, 세금을 내는 인천시민에게 행복을 주는 오케스트라라야 옳다.”

금난새 지휘자는 인천시립교향악단을 세계 최고의 교향악단이기보다, 시민에게 사랑받는 오케스트라로 만들고자 했다(사진: 차용범 제공).

그런 접근 끝에, 인천시민들은 인천시향에 거의 매진으로 호응한다. 지난 광복절 때도 기념식을 마치곤 인천시장과 청중 1500명이 시향 연주를 즐겼다. 그 중엔 음악애호가가 아닌, 클래식을 처음 듣는 이도 있다. 그들에게도 정기연주회를 하듯 최선을 다한다, 새로운 청중들은 위해. 그들이 “나도 클래식 듣겠더라”고 느낄 수 있도록-.

KYDO∙패밀리 합창단 지휘... 삶 속으로, 음악 들어가기

지휘자 금난새. 2012년 8월 13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농어촌희망 청소년오케스트라(KYDO, Korea Young Dream Orchestra) 합동연주회’를 지휘했다. 전국 농어촌 20곳의 청소년 오케스트라에서 각 10명씩, 모두 200명이 함께한 큰 무대였다. 이들 오케스트라는 한국마사회 농어촌희망재단이 악기구입비 등을 지원하며 출범했다. 그는 재능기부 차원에서 참여, 그동안 현지를 차례로 방문하며 공개지도를 했다.

Q. KYDO가 합동연주를 한 뜻과 앞으로 일정은?

“음악은 혼자만 잘하면 되는 게 아니라 남과 함께, 청중과 함께해야 한다. 음악을 전공하지 않더라도 음악을 통한 커뮤니케이션을 배우는 거다. 지난 합동연주에는 각 대학 오케스트라 친구 20명도 동참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교포 청소년 오케스트라에서도 10명쯤 왔고. 내가 계속해 온 오케스트라 아카데미에 참석했던 친구들이다. KYDO 아이들과 함께 연습하며, 영어든 뭐든 필요한 도움을 주고 싶다는 마음들이 참 좋지 않나?”

공연 레퍼토리는 베토벤의 교향곡 5번 <운명>과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메들리 등. 멀리서 서울공연을 온 아이들이 세종문화회관에서 베토벤을 연주했다는 추억을 가질 수 있다면 그 자체가 참 좋은 일이라고 봤다. 

Q. KBS <해피선데이-남자의 자격>에서 패밀리 합창단 지휘를 맡았다.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을 결심한 계기는?

“사실 지금까지 해왔던 것과 다른 부분이어서 많이 주저했다. 주위사람들이 ‘그 프로그램 유익하다’고 추천해서 결심했다. 어려움도 있겠지만 청중에 다가가자는 의미다. 난, 방송이나 책을 통해서도 음악에 기여하고 싶다. 이 방송을 통해 모두가 클래식 음악을 좋아할 수 있었으면 참 좋겠다.”

‘남자의 자격’ 합창단은 항상 온 나라의 화제였다. 그만큼 그의 부담도 컸을 터. 그는 그의 음악철학에 따라 예능에 참여했다. 새로운 창작과 연습 과정을 보여주며, 결국 음악이 생활 속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미술이 갤러리에만 있어선 좋지 않듯, 음악도 음악관을 넘어 우리네 삶 속에 있어야 한다는 믿음이다. 

금난새 지휘자가 TV 인기 프로그램 <남자의 자격>에 출연, 합창단을 지휘하고 있는 모습(사진: 차용범 제공).

Q. '패밀리 합창단' 합창곡으로 영화 <대부>에 나왔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Cavalleria Rusticana)>을 선정했다. 가사가 없는 오케스트라 곡을 선택한 이유는?

"잘 알려진 뮤지컬 같은 곡을 고르자는 의견도 있었다. 난, 예능프로에 아마추어 합창단이지만, 이 기회에 클래식 음악을 조금이라도 생활 속에 집어넣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곡에 합창단이 추구하는 바를 가사로 집어넣는다면, 가족의 사랑, 삶 속의 어려움, 이런 부분을 음악을 통해 극복하는 가사를 넣는다면, 곡도 아름답고 합창에도 어울릴 곡으로 본다.“

패밀리 합창단은 많은 사연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을 한 목소리로 끌어내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시청자는 그 가족들의 얘기에서 많은 감동을 받지만, 그 화면 속에서 금난새의 따뜻하고 정겹고, 다채로운 표정언어를 생생하게 보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일 터.

‘좋은 청중’ 요건=음악가+음악책, “내가 해 보자”

Q. <금난새와 떠나는 클래식 여행> 1, 2권을 묶어 낸 <금난새의 클래식 여행>이 클래식 분야 베스트셀러 1위였다. 왜 이런 책들을 쓰는가?

“내가 해온 다른 활동들과 함께, 어떻게 하면 클래식 음악을 쉽게 이해시키고 청중을 넓힐 수 있을지 고민한 결실이다. 이 책을 쓸 당시, 음악계에 ‘책이 없다’고 느꼈다. 화성학, 음악이론 같은, 시험을 위한 책, 지식을 위한 책만 있지 음악을 즐길 수 있고 더 사랑하게 하는 책은 없는 거다. 불평만 할 게 아니라 직접 써보면 어떨까? 하는 마음에서 시작했다. 어릴 적 ‘무뚝뚝한 아버지’께서 ‘우리 음악계를 위해 뭘 할까 생각해 보라’는 말씀을 한 적이 있다. 그렇다, 좋은 청중이 있으려면 음악가와 음악책이 있어야 한다. 내 책이 음악을 사랑하게 되는 계기, 새로운 가이드북 역할을 해 준다면 기쁘겠다.”

새 책은 시기별로 두 명의 음악가를 짝지어 17세기에서 20세기까지의 음악사를 설명한다. 바로크 시대의 바흐 vs 헨델, 낭만파의 슈베르트 vs 멘델스존, 피아노의 거장 쇼팽 vs 리스트.... 동 시대 예술가지만, 다른 환경 속에서, 다른 과정을 통해 자기 세계를 피워낸 천재들의 이야기는 그저 음악적 호기심만 충족시키는 것은 아니다. 삶의 고난이 어떻게 예술로 승화되는지, 어린 시절의 환경은 한 명의 세계를 얼마나 많이 좌지우지하는지, 천재의 삶을 엿보며 우리 삶에 대입할 만한 질문을 던지고 생각하게 한다.

음악가정에서 자라며 번스타인에 감동하기까지

‘국민 마에스트로’ 금난새, 그의 오늘엔 성장환경도 큰 몫을 했다. 그가 얘기한 ‘무뚝뚝한 아버지’는 국민가곡 <그네>를 작곡한 금수현 선생이다. 음악용어를 한글로 바꾸는 데 앞장서며 한국 음악사에 한 획을 그은 그 분이다. 경남여고∙부산사범에서 교감을, 경남여중∙통영고 교장을 역임했다. 도립 경남극장의 극장장, 문교부 편수관을 거치기도 했다. 어머니 역시 어떤 곡이든 한 번만 들으면 악보 없이 반주를 할 정도로 음감이 뛰어난 ‘피아노 교사’였다. 그는 ‘음악’ 속에서 자라난 것이다.

그는 부산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서울로 이사한 뒤 중-고교 입시에서 모두 실패했다. 그 ‘실패’는 그에게 새 에너지로 작용했다. 경기고 입시에서 떨어진 뒤 부모의 권유로 서울예고에 입학한 것이다. 그가 지휘를 시작한 모티브다.

“아버지 덕분에 일찌감치 클래식에 재미를 붙였다. 고1때 우연히 AFKN(주한미군방송)에서 청소년을 위한 클래식 음악프로그램을 봤다. 레너드 번스타인(뮤지컬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작곡자)이 지휘하는 뉴욕 필하모니의 멋진 연주에 감동했다. 번스타인이 직접 피아노를 치며 해설하는 모습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그 <청소년을 위한 콘서트>를 통한 번스타인과의 만남이 오늘의 나를 만든 것 같다.” 말 그대로, 번스타인은 그의 인생모델이다. 학생 때부터 앞장서서 그룹 활동을 주도했다. 늘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각해내곤 실천에 옮겼다. 서울음대 시절엔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연주여행에 나섰다. 음대 학생회장을 맡아 음악캠프도 추진했다. 

Q. 서울음대 시절 조직한 ‘서울 영 앙상블’은 어떤 동아리였나?

“여러 대학 학생이 어울린 연합 동아리였다. 당시 미국공보원(USIS) 강당을 공연장으로 빌린 일화는 유명하다. 책임자를 찾아가 “미국 음악도 연주할 테니 자리를 내 달라”고 당당히 요구했다. 우린 그 곳에서 공연을 했다. 반응은 뜨거웠다. 초청을 받아 부산, 대구, 광주에서 공연했고, 미국음악협회가 주는 공로상도 받았다. 이 때 공연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다.“

타고난 돈키호테의 고백 “독일사회가 날 키웠다”

Q. 베를린에 유학한 계기는?

“27세 때 세계청소년음악연맹 국제회의에 참석했다. 일주일간 스웨덴 회의를 마치곤 지체 없이 베를린으로 달려갔다. 국내 대학에서 지휘를 가르치는 학과가 없었고, 지휘 공부를 할 정보도 거의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베를린으로 간 것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곳에서 내가 공부할 가능성을 엿보려 한 것이다.”

그는 혼자 베를린 예술대학을 찾아갔다. 대학 직원은 음대에 지휘 전공과 두 분의 전임교수가 있다고 알려줬다. 피아니스트 루빈스타인과 비슷한 이름의 라벤슈타인 교수에게 먼저 전화했다. 그를 만났다. 교수는 몇 가지 테스트를 하곤, “재능과 자질은 우수하나 지휘를 공부하기에 너무 늦었다”며 “지휘를 공부하고 싶다면 지금 베를린에서 시작하라”고 조언했다. 그는 베를린에 남았다. 꿈에 그리던 지휘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Q. 독일 카라얀 국제 콩쿠르에서 3위로 입상하며 화려하게 데뷔하기까지, 유학생활은 어땠나?

"유학생활이 쉽지 않았지만 행복했다. 카라얀 국제 콩쿠르는 2년을 주기로 한 해는 지휘자 콩쿠르, 한 해는 오케스트라 경연 형식으로 열렸다. 1977년 지휘자 콩쿠르에서 1등은 없었다. 나는 4위에 올랐다. 입상자 중 나만 학생 신분이었고 다른 두 명은 현역 지휘자였다. 유학생활 3년 반 만에 얻은 결과였다.“ 그는 콩쿠르 리셉션장에서 만난 카라얀의 강렬한 눈빛을 도저히 잊지 못한다. 위대한 왕이 휘하 장군들을 꽉 끌어안고 있는 듯, 그 압도적인 매력을. 

카라얀 국제 콩쿠르 수상 기념사진. 왼쪽이 금난새 지휘자(사진: 차용범 제공).

Q. 베를린에서 무엇을 배우고 느꼈는가?

“베를린에서, 나는 음악공부뿐 아니라 음악을 즐기는 사회적 분위기를 직접 경험했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회와 다양한 연주회마다 청중이 가득한 모습이며, 관객들이 음악에 행복해하는 모습을 봤다. 나 또한 고국으로 돌아가면 내가 사랑하는 음악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는 소망을 가졌다. 사랑하는 법,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 사랑을 표현하는 법, 더 많은 것을 배웠다.”

그의 행적(!)을 보면, 그는 타고난 돈키호테다.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꿈을 이루는데 두려움이 없다. 다행히 그의 곁에는 좋은 사람이 있고, 자기 수완이 좋아 돈키호테보다 성공했다는 차이 뿐이다. 독일은 엄격한 룰을 엄정하게 지켜야 하는 사회다. 그 사회는 ‘반항적이고 괴짜 같은’ 그의 성향을 많이도 다듬어줬다. 그는 음악이라는 나무를 보러 독일에 갔지만, 그곳에서 실상 문화를 사랑하는 성숙한 사회라는 숲을 본 것이다. “독일 사회가 나를 키웠다”는 그의 말은 허사가 아니다.

국립교향악단 최연소 지휘자에서 무명 오케스트라 지휘까지

그는 귀국, KBS교향악단(전 국립교향악단)을 최연소 전임 지휘자로 12년간 지휘했다. 우리나라처럼 연공서열을 중시하는 나라에서, 서른세 살의 나이로 국가를 대표하는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일, 결코 쉽지 않았을 터-.

“나에게는 많은 부담이 있었다. 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젊은 지휘자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단원들이 파격적으로 젊은 나이에 부임한 지휘자에게 거는 기대는 엄청난 압박감으로 작용했다. 선배 단원들을 이끌고 잡음 없이 훌륭한 화음을 만들어 내는 일은 진정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의 당면과제는 ‘훌륭한 화음’보다 ‘단원간 화합’이었다. 그는 인내하며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 12년을 정상에 머문 것이다.

Q. 당시 무명의 수원시립오케스트라로 옮긴 것,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원칙은 간단하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나는 간다는 것이다. 당시 수원오케스트라는 여러 어려움에 빠져 있었고 무언가 돌파구를 찾으려 했다. 나를 필요로 했다. 그래서 간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과 음악을 나누는 것, 그러기 위해 청중이 있어야 하고, 청중과 좋은 음악을 나누기 위해 수준 높은 오케스트라가 많아야 한다. 그래서 수원으로 갔다. 연습실도 없고 관객도 별로 없었던 수원시립오케스트라, 오늘 야외음악당까지 있는 일류 오케스트라로 성장했다.”

“나의 인기비결? ‘고객 입장에서 음악하기’인가?”

이쯤이면 지휘자 금난새, 그의 음악관을 짐작할 만하다. ‘음악은 우리네 삶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그 지론을 풀어내는 눈 말이다. “음악은 판타지다. 그 안에 대화가 있고 작곡자의 의도가 숨어 있다. 작곡자는 음악 속 어디에 보물이 숨어 있는지 말해주지 않는다. 연주자는 그것을 찾아 청중에게 알려준다. 연주 때 지휘자의 해석을 단원에게 설명하면 단원들도 이야기를 들으며 판타지에 빠지고 선명하게 작품세계로 들어간다. 청중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 단원 모두의 일거수일투족이 하나의 작품이어야 한다.” 청중에게 필요한 음악은 친구 같은 것이라고, 그는 확신한다.

Q. 조금은 어려울 것 같은 클래식 음악의 매력은 무엇인가?“

“클래식 음악은 사람의 마음을 순화하고 정신을 맑게 해주는 힘이 있다. 바쁜 일상을 잠시 벗어나 푸른 숲이나 공원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면 금세 몸과 마음이 맑아지듯, 클래식 음악이야말로 우리 생활 속에서 푸른 숲과 맑은 공기의 역학을 할 소중한 선물이라고, 난 믿고 있다.”

Q. 음악 애호가를 넘어, 대중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인기 비결은 무엇일까?

“글쎄, 얘기하기 쉽지 않네. (한참 생각). 얼핏 얘기했듯, 나의 입장보다 고객의 입장에서 음악하기, 그런 부분에 대한 호의 아닐까? 한 음식점의 맛있는 음식도 중요하지만 마음으로 친절하게 대할 때 다시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나. 관객에게 친절한 음악, 지휘자의 권위 대신 짧은 순간에도 가까운 사람처럼 느낄 수 있는, 그런 부분을 좋아하시는지 모르겠다.” 결국 금난새의 인기는 창의력 넘치는 아이디어와 연주자간의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에 바탕한 연주다.

Q. 후학은 어떻게 양성하는가?

“난, 개인 위주, 입시 위주에 집중하는 한국 음악계에 할말이 많다. 영재교육 덕분에 한국 음악이 대단한 성장을 이뤄내긴 했지만, 그만큼 더 음악이 일반 대중에게서 멀어지는 부작용도 가져왔다. 난, 머리 좋은 학생만 뽑기 보단 창의력을 가진 인재를 키워야 한다고 본다. 난, 개인 레슨을 해 본적이 없다. 대신 아카데미를 통해 후배를 양성하려 한다. 후배 양성은 비즈니스가 아니다. 경희대 교수를 휴직하고 서울예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2011년 대학생연합오케스트라 KUKO(Korea United College Orchestra) 연주를 지휘했다. 전국 25개 대학, 60여개 전공 대학생들이 모여 2010년 창단한 오케스트라다. 학생들의 연주지휘 요청 메일을 받았고, 예술의 전당에서 아마추어 최초의 오케스트라 공연을 지휘했다. 그의 교육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부산사람’이다. 지금도 격식을 차릴 땐 표준말을, 편할 땐 경상도 사투리를 뒤섞어 쓴다. 그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그에게 한글이름을 지어 호적에도 올려줬다. ‘난새’다. ‘나는 새’라는 뜻, 신화에 나오는 ‘난(鸞)이라는 새’의 뜻도 있다. 이 이름은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처음 호적에 오른 한글이름이 아닌가, 그는 생각한다.

그는 중구 대청동 산동네 꼭대기에 살며, 부산사대 부속 초등학교에 다녔다. 집에선 부산 시가지와 용두산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왜 ‘산동네’인가? 아버지는 사회적 존경을 받으며 교직에 몸담고 있었지만 수입만은 넉넉지 못했던 탓이다. 어머니는 마당 한 편에서 닭을 키우며 집안살림을 꾸려야 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서울로 이사했다. 수송초등학교 전학 첫날부터 촌놈 취급을 받으며 놀림을 받았다.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고-. 서울 생활이 익숙해질 무렵, 이번에는 거꾸로 부산에서 놀림을 받았다. 방학 때 부산 할아버지댁에 가면 친척이며 친구들이 ’서울말을 쓴다‘고 놀렸다. 그의 말에 서울말과 부산사투리가 뒤범벅되어 있는 숨은 이유다.

금난새 지휘자는 다시 태어나도 지휘를 하고 싶다고 말한다. 좋아하는 음악을 하고 있어 순간순간 행복하고 감사하다고 덧붙인다(사진: 차용범 제공).

"됐나?“ ”됐다!“ 이런 부산 표현, 화끈해서 너무 좋다

Q. 부산에서의 추억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난 언제나 바다를 볼 수 있는 그 시절을 참 좋았다. 한번은 버스를 타고 해운대를 갔더니, 거기도 사람은 별로 없고 훤한 바다만 보였다. 할아버지댁이 있던 낙동강변은 또 어떤가. 철새와 텃새가 자유롭게 나는 그 깅변의 추억도 그립다. 60여 년 전 부산, 지금과 비교할 수 있나. 정말이지 부산도 엄청 발전했지만, 난 ‘부산 바다’의 좋은 기억들을 도저히 잊을 수 없다.“

Q. 부산만의 매력, 강점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무뚝뚝하지만 그 속에 애정이 살아있는 표현법 아닐까? ”됐나?“ ”됐다!“, 이런 화끈한 표현이 어디 있나. 서울에선 그런 의미 전달하려면 한참 얘기해야 한다. 난, ‘우리끼리’ 쓰는 경상도 말이 너무 좋다. 덧붙여, 오늘은 부산은 정말 살기 좋은 도시로 컸다. 굉장히 기분 좋은 일이다.”

Q. 부산을 음악으로 표현한다면?

모차르트의 부드러움, 베토벤의 열정보다는 차이코프스키가 적절할까? 슬프지만 화려하고 격렬한.... 부산사람들의 삶은 거친 듯하면서도 정감이 있다. “와 이리 힘드노?” 이런 표현 속에, 부산의 깊은 멋이 있다.“

그래서 그는 부산을 자주 찾는다. 부산시향의 여름 공연을 20년 가까이 지휘하고 있고, 다른 오케스트라 지휘도 연 3-4회씩은 있다. 2012년 10월 23일에는 부산시민회관에서 ‘*클래식의 매력 속으로-금난새 & 유라시안 스트링스 음악회’를 지휘했다. 유라시안 스트링스는 유라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정예단원으로 구성한 소규모 연주단체다. 

금난새 지휘자는 부산을 자주 찾는다. 부산에서 오케스트라 지휘를 연 3~4회 정도한다(사진: 차용범 제공).

Q. 가장 기억에 남는 부산공연은?

“부산공연은 두루 잘 기억하지. 사실 우리나라 오케스트라끼리는 교류가 없었다. 다 ‘우린 우리, 당신은 당신’이었다. 난 그런 부분을 극복하고 싶었다. 93년이던가? 수원시향과 부산시향의 합동연주를 가진 적이 있다. 앞으로 이런 기회를 서로 만들어가야 할 텐데....”

2011년 여름 맨하탄 뮤직 페스티발에서 지휘한 금난새 지휘자와 연주자들(사진: 차용범 제공).

“난, 취미가 없다. 할 일 많고 하는 일 즐기기에 바쁘므로“

금난새, 그는 실상 별 취미가 없는 사람이다. 산에 가고 골프를 즐기고, 그런 걸 못한다. 할 일이 많고, 하는 일을 즐기고, 그래서 취미생활을 할 시간적 여유도, 지금은 없다.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페스티벌을 진행하고, 책을 쓰고..., 늘 좋아하는 음악 일과 마주하고 있으니 다른 취미가 들어올 틈새도 없다.

Q. 평소 스트레스는 어떻게 하고 사나?

“스트레스? 느끼지 않으려 노력한다. 지금까진 잘 견디어 왔다. 사람들은 날 ‘예민하다’고 하지만, 난, 잠도 잘 잔다. 스트레스를 느낀다는 것, 그건 살아가는 방식을 바꾸라는 경고일 터이다. 난 아직 더 기다릴 여유가 있다. 평소 낙천적으로 살아온 삶 덕분인가?” 그의 아버지는 당연히 부엌엘 한번도 들어가지 않았지만, 그는 부엌출입을 생활화하고 있다. 혹 접시라도 깨게 되면? “행운이 온다”고 체면을 건다. 모든 일은 생각하기 나름 아닌가.

Q. 건강 비결은?

“보통에 이틀에 한 번 꼴로 연 150회를 연주한다. 30여 년 음악회를 했지만 건강 때문에 취소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단원들은 간혹 ”뭐를 드시기에 그렇게 건강하냐“고 묻곤 한다. 내 건강 비결은 잠을 잘 자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연주회를 하러 지방을 다닐 때 버스 속에서도 잘 잔다. 식사도 가리지 않고 화장실도 규칙적으로 가고....“

Q. 가장 행복한 순간은?

"늘 행복하려 노력한다. 내가 많은 일을 하고 있고, 할 수 있다는데 감사한다. 피곤한 줄 모르고 뛰어 나니니 옆에선 불안하게 생각하지만, 난 순간순간 감사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 살고 있다.“ 그는 다시 태어나도 지휘를 하고 싶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과감한 모험의 길... 또 어떤 도전 즐기며 행복할까?

Q. 앞으로 도전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난 하고 싶은 일이 많다. 무엇보다 사회공헌을 중시한다. 내가 즐거워하는 일이 사회에 보탬을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늘 그걸 생각한다. 굳이 힘이 남는다면 영화감독도 한 번 해 봤으면 좋겠다. 지금은 불가능하지만, 새로운 미디어에 대한 흥미는 대단하다. 부산이 최근 영화 시스템을 두루 발전시키며, 한국과 아시아 영화의 발전을 이끌고 있다. 나도 그런 과정에 작으나마 기여할 수 있을까?.”

Q. 후세에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그건 나의의 몫이 아니다. 굳이 바란다면, ‘그 사람이 있어 음악의 세계를 알게 됐다’, ‘그가 있어 행복했다’, 이런 평가를 받을 수 있었으면 참 좋겠다.“

 

오케스트라 공연연습 중의 바쁜 시간, 숨 가쁜 인터뷰를 마치며 묻는다. “혹 물어주었으면 하는 다른 주제는 없나?” 그는 특유의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그저 인터뷰 기사가 잘 나왔으면 좋겠다”고-. 지휘자 금난새, 그는 늘 숨찰 정도로 부지런히, 과감하게, 모험과 도전의 길을 걸어왔다. 늘 주변을 관찰하며 뭔가 더 재미있는 일이 없을까를 생각하며 살아왔다. 사방에 물음표를 달아놓고 다니는 그는 내일 또 어떤 도전을 즐기며 느긋한 행복을 즐길 것인가? 참 궁금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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