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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현대인물을 찾아서, 신옥진 편] 화상(畵商) 신옥진, “그림은 ‘소유하기’보다 ‘공유하기’...기증은 나를 극복한 쾌감”

기사승인 2019.01.30  15: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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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기증하는 화상 신옥진에게 ‘공유’의 미학을 묻다 / 차용범

이 글은 인터뷰 시점이 2013년인 까닭에 일부 내용은 현 시점에서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신옥진 약력]

1947년 부산 출생. 부산 공간화랑 대표. 시인. 서울신문 기자. 1975년 공간화랑 개관. 1998년 박수근 스케치, 장욱진 수채화 등 50여 점 부산시립미술관 기증. 지금까지 부산시립미술관, 경남도립미술관, 박수근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등 작품 800여 점 기증. 부산시, 2009년 2월 부산시립미술관에 신 대표 두상 설치. 2010년 12월 명예 경남도민. 2011년 부산시 문화상(대중예술 부문) 수상. 부산시립미술관 건립추진위원, 한국화랑협회 감정위원장. 저서: 잠언집 <사람들은 걷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흘러가고 있었다>(2009), 시집 <빛난 하루>(2011), 산문집 <진짜 같은 가짜 가짜 같은 진짜>(2011) 등.

"미술작품은 개인의 소유물이기보다 사회의 공동재산이다." 값진 미술품을 '소유하기'보다 '공유하기'에 앞장서온 부산 공간화랑 신옥진(辛沃陳) 대표(72)의 말이다. 그는 40여 년 화상(畵商)생활 동안 독특한 안목과 발품, 그만의 정신을 담아 모은 '참 좋은 작품' 860여 점을 공공 미술관에 척척 기증했다. 미술품의 가치를 날카롭게 평가할 줄 아는 컬렉터로서, 소장품 하나하나는 그에게 다 보물이었을 터-. 낡은 30평 아파트에 살며 값진 그림을 계속 기증한다? 결코 평범한 일은 아닐 터이다.

인터뷰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신옥진 대표. 신 대표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즐기며 감동을 얻을 때 예술작품의 가치가 무한히 커진다고 강조한다(사진: 차용범 제공).

부산시립미술관은 그의 그림철학을 기려 '신옥진 기념상’(두상)을 세웠지만, 그는 기증자를 예우하는 허남식 부산광역시장의 열정에 감복, ‘신옥진 콜렉션’까지 거덜 냈다. 나름 아껴오던 명작 105점까지 부산시립미술관에 마저 기증한 것이다. "'기증'의 쾌감과 '생업'의 부담, 그 팽팽한 긴장을 뚫고, '여생 밑천'까지 깨끗이 내놨다"는 표현이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즐기며 감동을 얻을 때 예술작품의 가치는 무한히 커진다, 그는 그 진리를 일찍이 알고 실천하고 있다.

 

기증의 큰 기쁨? 나 극복한 희열

'그림 기증하는 화상(畵商)' 신옥진. 1998년부터 지금까지 부산시립미술관, 부산시립박물관, 경남도립미술관, 박수근 미술관 등에 귀한 그림들을 기증하고 있다. 기증의 규모는 어느 정도일까?

"전체적으로 한 860점 정도다. 지난해 국립현대미술관에도 53점을 보냈다. 그 미술관의 한 해 최다 기증자로, '망설임에서 결정까지'를 주제로 강연도 했고...." 그는 명작들을 기증하곤 큰 기쁨을 얻는다. 스스로를 극복한 기쁨이다. 갈등을 이기고 내놓고 나면 '내가 나를 극복했다'는 쾌감이 온다. 게다가, '내가 미술 덕에 밥 먹고 있는데, 미술에 고마움을 표시했다'는 자부도 크다.

‘그림 기증하는 화상’으로 불리는 신옥진 대표. 미술작품을 공유한다는 생각으로 1998년 그림 50여 점을 부산시립미술관에 기증. 지금까지 약 860점을 기증했다(사진: 차용범 제공).

Q. 귀한 작품을 기증키로 결심한 계기는?

“1998년, 화랑을 연 지 23년만에 결핵 후유증으로 크게 앓으면서다. 곧 죽을 줄 알고 주변 정리를 해야겠다 싶어 박수근 스케치, 장욱진 수채화 등 50여 점을 부산시립미술관에 기증했다. 막상 살아나고 나니 아깝다는 생각과 함께, 묘하게도 ‘처음 기증이라 모자랐으니 앞으로 제대로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난, 아끼고 좋아하는 작품부터 기증한다...”

Q. 결심을 실행하기도 쉽지 않을 텐데....

“기증할 작품을 골라 포장하고 있자면 손이 바들바들 떨리지. ‘이 아까운 걸 그냥 내놓다니 내게 좀 이상(?)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그는 첫 기증 때의 기억을 떠올린다.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지만 날이 밝으니 슬그머니 생각이 달라지더라는 것, 보험 든 것도 없는데 늙으면 하나씩 팔아 써야지 하는 마음도 생기고. 하루를 보내곤 기증목록을 만들어 한밤중에 팩스로 보내버렸다. 이튿날 아침 미술관 직원이 놀라 전화를 걸어왔다. “와 그라요? 화랑 안 할라요?” 그렇게 보낸 그림들이 부산시립박물관 313점, 경남도립미술관 239점, 밀양박물관 100점, 부산박물관 30점 등이다.

'내가 좋아하고 아끼는 작품부터 기증한다'-그의 그림 기증 원칙이다. 지난 연말 국립현대미술관 기증작 중 이우환의 1977년 작 <선으로부터>도 그렇다. 20호짜리 과슈(불투명 수채 물감) 작품으로 5년 전 일본 경매에서 사들여 안방에 걸어놓고 보던 것이다. "이런 거 기증할 때는 '독한 마음' 먹어야지. 싫증 난 작품을 기증하면 덜 아깝긴 하겠지만 기증받는 쪽에 실례고. 나는 직업 화상이니까 안목(眼目)으로 먹고사는 셈인데, 그저 그런 작품을 기증했다가 '저 사람이 저 정도 안목밖에 없었나' 하면 창피하기도 하고."

신옥진 화상의 기증 원칙 중 하나는 ‘내가 좋아하고 아끼는 것부터 기증하는 것’이다(사진: 차용범 제공).

부산미술관엔 일본 근현대 미술 에센스 기증

그는 2009년, 아예 ‘기증용’으로 일본 근ㆍ현대 미술작 100여 점을 따로 구입, 부산시립미술관에 내놓았다. “내 고향 미술관에 다른 곳과는 다른 컬렉션을 만들고 싶었지.” 그는 기증을 계속하며 되돌아보니, 그의 기증에 작품의 성격적 가치가 좀 허술하더란다. 나름 기증의 의미를 찾은 게 일본 근ㆍ현대미술이다. 우리나라 미술은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은 만큼, 우리 미술의 근본부터 잡아보자는 생각에서다.

그 콜렉션은 질적으로 체계적, 양적으로 풍성하다. 피카소, 모딜리아니와 함께 에콜 드 파리(제1차 세계대전 후부터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 파리의 몽파르나스를 중심으로 모인 외국인 화가)의 일원으로 활동했던 레오나르 후지타, 일본 서양화단의 쌍벽으로 불리었던 우메하라 류자부로와 야스이 소타로, '자화상 작가' 기시다 류세이. 이우환 선생이 일본 구상작가 중 최고로 치는 시에키 유조, 한국에서의 이중섭만큼이나 인기 있는 일본 목판화의 거장 무나카타 시코. 한국 테라코타 조각의 거장 권진규의 스승인 조각가 시미즈 다카시 등의 작품이다.

‘한국화단의 일대 사건’-그의 기증에 대해 말 아끼기로 유명한 오광수 미술평론가가 쓴 표현이다. 일본 근ㆍ현대미술 기증작들은 국립현대미술관도 갖지 못한 부산시립미술관만의 특성이다.

 

기증에 가족 불만 없다... 외롭지도 않았다

화상과 그림 기증자 사이에 고민은 없었을까? 그는 두 역할을 별개로 본다, 화상은 직업이고, 기증은 소득의 용처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다짐한다, ‘차라리 이 그림을 팔아 낡은 아파트에서 새 아파트로 옮겨? 그렇지만 인간으로 태어나 매일 자기 앞만 닦다가 죽는다면, 그 삶은 너무나 안이한 것 아닐까?‘

Q. 기증할 때 가족의 반대나 불만은 없었나?

“돈을 벌면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오래전부터 얘기해서인지 가족이 미술품 기증에 대해 한 번도 불만을 표시한 적은 없다. 외아들(43)이 화랑 일을 돕고 있긴 하나, 최근 좀 가라앉아 있는 느낌이다. (계속적 기증 때문에) 소장작이 바닥수준(?)이고, (옥션 때문에) 화랑의 장래도 어둡다고 보는 모양이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대학까지만 책임진다고 말했다. 돈도 없지만 만약 있어도 너랑 상관없다고 했다.” 그는 기증문화가 척박할 때 기증을 시작, 15년을 견딘 스스로를 가상하게 생각한다. 혼자서 ‘마음의 끈’ 하나를 붙들고 외로이 걸어왔다고 생각했으나, 부지불식간에 수많은 사람과 함께 걸어왔다는 자각을 하고 있다. 좌우명도 그의 삶답다. “돈은 기술적으로 벌고, 쓸 때 예술적으로 쓰라.”

 

부산시장 예우에 ‘최후의 보루’ 마저 기증

신옥진, 그에게 부산광역시는 2011년 부산시 문화상(대중예술 부문)을 수여했다. 이에 앞서 2009년 2월 부산시립미술관에 그의 기념상(두상)을 제막했다. 허남식 부산시장이 금일봉을 미술관에 보내 두상을 제작하도록 지시한 덕분이다. 처음에는 흉상을 제작하려 했으나, 신옥진의 고집에 밀려 실물 크기의 두상으로 크기를 줄였다.

2009년 2월 부산시립미술관에 신옥진 기념상을 제막했다. 허남식 부산시장은 “고마운 기증자들을 정성껏 예우할 것”이란 약속을 지켰고, 신옥진 대표는 ‘최후의 보루’였던 ‘신옥진 컬렉션’을 마저 기증했다(사진: 차용범 제공).

제막 인사에서 그는 기념상을 세우는데 앞장선 허남식 부산시장에게 되레 깊이 감사했다. 그가 국내외 걸작을 시나브로 기증할 즈음, "고마운 기증자들을 정성껏 예우할 것"이라는 부산시장의 약속이 있었다는 것, 그러나 "또 한 번의 립 서비스이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는 것. 그러다, 부산시장이 정말 기념상 세우는 일에 열심인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는 것이다. 그는 그 마음에 감동받아 ‘최후의 보루’로 남겨둔 ‘신옥진 콜렉션’을 마저 기증했다. 그는 명예 경남도민이기도 하다. 이우환의 작품 등을 기증해 준 데 대한 경남도의 예우이다.

기증에 대한 부정적 반응도 없진 않다. “그렇게 기증할 바에야 차라리 나한테도 한 점 주지.” 어떻게 들으면 좀 비아냥거리는 말이지만, 한 번 웃자고 하는 말인 줄 이해한다. 어떤 이들은 보다 구체적으로 원망조의 말을 하는 경우도 있다. “저 정도를 기증할 때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을까?” “보석 같은 작품들은 모두 집에 따로 챙겨놓았을 거야.” 심지어 “명예에 대한 집착 때문에 기증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도 듣고 있다.

Q. 기증 후 느끼는 가장 큰 기쁨은?

"뜻밖일지 모르지만 '나 자신'에 대한 기쁨이 가장 크다. 갈등을 이기고 내놓고 나면 '내가 나를 극복했다'는 쾌감이 온다. 그 희열, 말도 못한다. '내가 미술 덕에 밥 먹고 있는데, 미술에 고마움을 표시했다'는 자부심도 있다.“

 

부산 공간화랑 37년, 상처 투성이 긴 완주

신옥진, 그가 부산에 공간화랑을 연 것은 지난 1975년. 서울신문사에 다니다 결핵으로 부산대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뒤 복직 대신 개업했다. “뭐든 하고 싶은 일을 하다 죽자”고 결심한 끝이다. 당시 동양화가 대세였지만 과감히 서양화 전문화랑을 표방했다. 그림만 파는 방식으론 성공에의 자신이 없어 다방식 화랑으로 시작했다. 찻값 외상 때문에 화랑 운영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Q. 그 길은 결코 평탄치 않았을 터다. 서울을 두고 굳이 부산에서 화랑을 운영한 이유는?

“같은 시기에 서울에서 화랑을 시작한 이들은 승승장구했다. 나는 부산에서 화랑을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끝없는 셋방살이 처지를 전전했다. 생각은 있어도 경제력이 달려 자유롭게 움직일 도리가 없었다. 화랑을 한다며 시도 때도 없이 뻔질나게 서울을 왕래했지만, 부산서는 드물고 귀한 작품을 구해 내려와도 제 값을 받기 어려웠다. 그것은 부산과 서울의 경제적 규모 차이였다.”

그는 고백컨대, 부산서 버틸 수 있었던 관건은 서울의 힘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서울서 번 수입으로 부산의 적자를 메워온 것이다. 서울 작가를 부산에 초대해 와서 부산서는 못 팔고, 결국 서울 사람들이 되사가는 형국이다. 지방에서 자생력을 체득한다는 것은 요원한 일로 느껴 절망을 느낀 있다. 부산 공간화랑의 긴 역사는 어쩌면 부산의 자생력을 기다리는 긴 시간이기도 했다.

“당시 ‘문화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시절, 부산에 있던 5개 화랑은 지금 모두 문을 닫고 없다. 공간화랑 역시 상처투성이로 긴 완주를 한 느낌이다. 그 역경 속에서 1989년부터 부산청년미술상을 계속 운영하고 있는 것, 개관 30주년 기념 자료집을 만든 것은 참 큰 보람이다.”

 

화상, 드넓은 식견 바탕 화가-애호가 소통 통로여야

Q. 화상(畵商)이란? 그 자질과 덕목은?

“화상은 소통의 장(場)을 마련하는 사람이다. 광범위한 식견이 있어야 하고, 대인관계도 좋아야 한다. 재력 있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능력도 있어야 한다. 세계미술의 미술사적 동향과 유통의 동향에 밝아야 하고, 공적 성격의 영업이란 인식도 동반해야 한다. 특성을 그런 능력이 없다면 단순히 장소를 대여해주는 사람일 뿐이다.” 그는 미술품 거래에서 단순 이익만 노리는 사람은 화상이라고 할 수 없다고 본다. 그저 그림 장사꾼일 뿐이다. 화상은 신진작가를 발굴하고 작가들이 작업할 길과 정보를 제공해줘야 한다. 미술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눈을 열어주고, 그들의 생활을 풍요롭게 만들어주어야 한다. 그의 믿음이다.

 

좋아하는 작가, 단순간결의 장욱진 친근한 인연의 이우환

Q.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누구인가? 가장 기억에 남는 작가가 있다면? 

“좋아하는 작가는 두 사람이다. 근대작가로는 장욱진 선생, 현대작가로는 이우환 선생이다. 두 작가는 단순미가 특징이다. 장욱진 선생의 작품은 단순하고 간결하다. 장욱진 선생의 후학이 이우환 선생이다. 이우환 선생은 제일 친하기도 하고 인연이 있는 작가다.” 그는 최근 펴낸 산문집 <진짜 같은 가짜 가짜 같은 진짜>에서 미술계 거장들에 대한 생각을 담담하게 드러낸다. ‘이중섭이 천재적 작가라면 박수근은 위대한 작가’라고 했다. 장욱진에 대해서는 ‘세계에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인 달관에 이른 차원’이라 극찬한다.

일본 나오시마 이우환 미술관 앞에서 신옥진 대표와 이우환 선생 모습. 신 대표는 이우환 선생과 오랫동안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사진: 차용범 제공).

이우환 선생과는 꽤 오랫동안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선생의 첫 부산 개인전을 1992년 부산 공간화랑에서 열었다. 당시 작품은 모두 매진. 선생은 부산 전시를 앞둔 2, 3년 전만 해도 작품을 팔기 어렵던 때였다. 그의 작품이 상업적 두각을 나타낸 시발점이 당시 부산 개인전이었다. 그는 김두익 전 동보서적 사장과 함께, 경남 함안에 있는 이우환 선생 집터를 사서 ‘기념집터’를 꾸며 함안군에 기증하기도 했다. 굳이 밝히자면, 이중섭과 김환기의 작품을 좋아한다.

 

부산문화, 외부 소통에 뜻밖의 폐쇄성...극복해야

신옥진은 온전한 ‘부산사람’이다. 부산에서 태어나 기자 생활 3년을 빼곤 줄곧 부산에서 살고 있다.

Q. 부산, 부산문화의 특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부산은 해양도시의 장점 그대로, 외부와의 문물교류가 잦고 소통이 원활한 도시이다. 그러나 문화영역에선 의외로 외부로부터의 유입에 폐쇄적 경향을 띄기도 한다. 부산 작가의 전시엔 몰려다니고, 외지인의 전시엔 그저 무관심하다. 지금은 지구촌 시대 아닌가, 오직 ‘부산시대’만을 외치는 현상은 극복해야 할 터이다.”

그는 화랑을 열기 전 취미 삼아 서상환 선생에게서 그림을 배웠다. 그는 이제 개인전 5회를 기록한 화가다. 유화와 수묵화를 그린다. 일본 Q갤러리, 서울 인사아트갤러리, 중국 상하이 아트페어를 경험했다. 옥션의 불우이웃돕기 이벤트에도 참여한다. 이우환, 이중섭, 김종식의 그림을 좋아하되, 누구 그림과도 닮지 않았으니 그건 온전히 그의 그림이다.

화상이자 시인이자 화가인 신옥진 대표. 유화와 수묵화를 그려 개인전 5회 열었으며, 그림을 통해 옥션 불우이웃돕기 이벤트에도 참여했다(사진: 차용범 제공).

화가ㆍ시인ㆍ수필가... 난 그림 그리기가 좋다

Q. 2009년 시인으로 등단, 시집 ‘빛난 하루’를 냈다. 산문집 ‘진짜 같은 가짜, 가짜 같은 진짜’도 발간하고. 창작은 언제부터 시작했고, 앞으로 어떤 글을 쓰고 싶은가?

“난, 시인 작가들과 어울리다 시인을 동경하기에 이르렀다. 허만하, 김춘수, 전봉건, 박청륭, 배달순 같은 분들이다. 부산에서 박청륭 선생을 만나면서 ‘시를 쓸 것’을 권유받고 시를 쓰기 시작했다. 창작은 그저, ‘기록용’이다. 예술인 모임의 말석을 지키다 ‘스토리’의 주인공들이 거의 타계하고 어느 듯 상석켠으로 옮겨왔다. 죽기 전에 그들의 스토리를 기록해 두자는 생각으로, 3년여 작업 끝에 산문집을 냈다.”

며칠 전 ‘해원(海源) 수필동인지’ 12집 ‘파도밭을 건너며’를 읽으며(인터뷰어는 수필동인 세분으로부터 동인지를 받아, 동료들과 나눠읽었다), 그가 새 동인으로 참여했음을 알았다. 화가이며 시인 겸 수필가인 그에게, 어느 장르가 더 매력적일까?

“나의 글은 일기 쓰듯 써 온 것이니 문학적 예술성이 높기야 하겠는가. 그림은 예술적 지향성을 갖고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 이우환 선생은 ‘현대 예술가는 지식인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문명비평가요 미래학자의 눈도 필요하다고 했다. 나 역시 잡학적 독서를 바탕하긴 하지만, 그 그림이 일정한 격을 갖출 수 있길 소망한다.”

2011년 서양화가 박서보 선생(문화훈장은관)과 함께 문화훈장을 수훈한 신옥진(문화훈장화관) 대표(사진: 차용범 제공).

난 태어났을 때 순수성 잃지 않길 바라는 소시민일 뿐

Q. 평소 건강관리는 어떻게?

"나의 건강관리 원칙은 일상과 음식의 '절제'이다. 스스로 '50정도'의 건강을 가졌다면 '40정도'만 소모해야 한다. 그 여유분이 건강을 유지해 주는 것이다. 난, 부산금연협의회장이다. 대표적 캐치프레이즈로 '담배연기는 백색 살인마!"를 내걸고 있다. 내 병력과 관계있을 터이지만, 금연운동을 열심히 실천하고 있다."

Q. 마지막 질문이다. 신옥진,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과분한 질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각자 쓸쓸히 죽어갈 것이기 때문에, 후대에 기억되기를 바라는 바는 품고 있겠지. 그러나 그것이 인력으로 되겠는가? 나는 마하트마 간디나 이순신, 존 F. 케네디, 성철스님이라든지 이중섭, 이상, 권진규 등을 만난 적은 없지만 늘 기억하고 있다. 이처럼 사람의 본성을 가차 없이 휘어잡을 수 있는 사람만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을 수 있는 것이다. 다만 나는 살아오면서 내가 태어났을 때의 '순수성'을 잃지 않고 죽을 때까지 지속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소시민으로 살고 있을 뿐이다.”

그는 이 질문에 대해 꽤 단호했다. 자신을 '기억에 남을 대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손사래다. 그는 실상 느긋하게 나누는 삶을 즐기며 산들바람처럼 살다간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그의 호 ‘산들바람’에서 얻은 생각이다. 그가 기증한 그림의 가액은? 그가 무심결에 대답한 기준이 있다. 단순계산으로, 점당 최소 300만 원, 최고 2억 정도라는 것이다. 그러면, 총액은 얼마나 될까? 이 부분은 묻질 않았다. 당연히 그는 '쓸 데 없는 질문'이라며 손사래를 칠 것이므로-.   

차용범 reporter1@civic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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