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현대인물을 찾아서, 곽경택 편②] 의대생이 영화 감독으로..."영화는 여러 사람의 삶을 통해 인생을 고찰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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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현대인물을 찾아서, 곽경택 편②] 의대생이 영화 감독으로..."영화는 여러 사람의 삶을 통해 인생을 고찰하는 것"
  • 차용범
  • 승인 2019.01.23 14: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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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영화’ 대가 곽경택 감독에게 부산영화의 길을 묻다 / 차용범
[부산의 현대인물을 찾아서, 곽경택 편①]에서 계속. 이 글은 인터뷰 시점이 5년 전 2013년인 까닭에 일부 내용은 현 시점에서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부산의 의대생에서 영화감독까지

곽경택의 원래 진로는 의사였다. 아버지와 사촌형제, 집안사위까지 주변사람이 모두 의사였다. 그도 의사여야 밥 먹고 사는 줄 알았다. 6ㆍ25전쟁 때 월남하신 아버지 역시 전쟁 재발의 두려움 속에, 아들에게 ”전쟁통에도 의사는 죽이지 않더라“고 얘기했다. 그는 고3 때 확인한 ‘문과성적 우수’ 적성을 확인하고도 고신대 의대로 진학했다. 그는 어떻게 의대를 그만두고 영화공부로 돌아섰나?

“의대를 다니다 보니 의사 인생이 참 답답하겠더라. 찡그리는 환자 얼굴을 평생 보고 살 생각을 해 보라. 난, TV광고 찍는 일을 하고 싶었다. 삶이 다이내믹해지고, 멋진 남녀와 어울리며 살 수 있을 것 같고....” 그는 1991년 미국행을 결행, 뉴욕대 예술대 영화연출과에서 5년을 공부했다. 늘 한국적인 것을 찍으려고 애썼다. 졸업작품으로 단편 <영창이야기>를 찍을 때도 그랬다. 부산헌병대 방위병으로 복무할 때 이발병부터 감방간수까지 온갖 일을 다 했던 경험을 살린 작품이다. 이때도 믿을 곳은 부산 뿐, 자갈치에서 군복과 군대소품을 사가서 찍었다.

Q. 졸업 후 미국에서 활동할 생각은 없었나?

“졸업작품 <영창이야기>는 상당한 화제였다. 아카데미상 스튜던트 파트 수상을 내심 기대했다. 그러나 ‘아카데미’는 미국 국내 영화제여서 외국인은 수상 대상이 아니었다. 알고 보면 미국은 문화적 장벽도 높은 나라다. 특히 엔터테인먼트 부분, 열린 시장 같지만 굉장히 폐쇄적이다. 사회적 신분(영주권, 시민권)을 해결하며 일을 하기엔 벽이 높았다. 과감하게, 한국으로 돌아왔다.”

Q. 영화계 연고도 없었을 텐데 조감독 경력 없이 어떻게 감독으로 데뷔했나?

“1995년 <영창이야기>로 제2회 서울 단편 영화제 우수상을 받으며 화려한 신고식을 치렀다. 첫 상업영화 <억수탕>도 부산에서 찍었다. 서울엔 아는 사람, 연고도 없었고 조감독도 한 번 안 해본 처지였다. 다행히 평단과 관객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단, 두 번째 작품에서 난관에 봉착했다. 의대를 다닌 경험을 바탕으로, 직접 시나리오와 연출을 맡았던 <닥터K> 때문이다. 공교롭게 일본 만화 <슈퍼닥터>와 제목이 비슷한 바람에 욕도 많이 들었고....”

곽경택 감독은 “부산만큼 좋은 영화촬영지가 없다”며 “앞으로도 부산에서 촬영할 것”이라고 밝혔다. 부산에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촬영 당시 모습(사진: 차용범 제공).

Q. 데뷔작 <억수탕>은 개봉 당시 부산에서 상영하지 않았던데?

“그렇다, 서울 극장 4군데인가 개봉해 일주일 만에 내렸다. 독립영화 감성이어서 흥행에 실패한 것이다. 부산에선 ‘아들 영화 언제 개봉하느냐’고 묻는 주변사람 등쌀에 부모님이 계모임을 못 나가실 정도였다. 아버지는 ‘필름 사다가 우리끼리라도 보자’고 하셨다. 너무 부끄러웠다. 할 수 없이 한 동시상영 한 극장을 찾아 갔다. 끈질긴 부탁 끝에, 아무런 PR없이 1주일 상영했다. 가족적 만족에 불과했지.”

Q. <억수탕> <닥터K>, 모두 흥행에 실패했다. 그만 두겠다는 생각은 안 해 봤나?

“다시 시나리오를 들고 다니니 아는 형이 ‘염치없다. 그만 돌아다니라’고 하더라. 사람들이 실패의 기억을 잊을 때쯤 돌아다니라고.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철저히 견디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생각하고 만든 것이 대박 <친구>였다.”

Q. 11편의 작품, 어떻게 생각하나?

데뷔작 <억수탕>, 그때 내가 참 용감하고 무모했다는 생각이 든다. <닥터K>는 안타깝고 미안한 작품이다. 갖고 있던 이야기 중 제일 좋은 이야기인데 그것을 살리지 못했다. <친구>는 ‘잔인하게 영화를 찍었네’라는 생각이 들고. <똥개>는 배우 정우성한테 너무 고마운 영화다. <태풍>은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필사적으로 찍은 영화여서 아직 진한 애정이 남아있고. <사랑>은 첫 멜로 장르를 찍으면서 힘들었던 내 자신을 생각나게 하는 영화다. 그때 배우의 감정을 끌어내기 위해 고생한 걸 생각하면 아직도 징글징글하다.”

 

영화 <통증>으로 정통 멜로 도전

그는 <닥터K>의 실패를 뒤로하고 2001년 <친구>로 화려하게 부활한다. <친구>, 그의 대표적 흥행작이라는 점과 함께, '곽경택 스타일'의 출발점이라는 의미가 있다. 그의 이미지는 주로 '남성영화', 또는 '부산 사나이 영화'다. 그는 선이 굵고 강한 영화를 많이 만든 것이다. 그 ‘부산 사나이’가 정통 멜로 <통증>(2011년 9월)을 제작했다. <통증>은 그 특유의 어두운 색채를 유지하되 남녀 주인공의 조화로운 비중과 정통 멜로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동안 내로라하는 미남배우와 숱한 작업을 한 끝에 이제 권상우를 선택했다.

“권상우와는 한 번 작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배우라고 생각했고, 내가 연출한 작품 중 최고의 남자 배우라는 생각도 든다. 여자주연 정려원 역시 배우라는 직업을 감사하게 여기는 심성 고운 연기자더라. 연기를 잘하면서 소탈하기까지 해 흡족했다.” 그 <통증> 역시 흥행성적은 좋지 않았다. 추석 때 개봉했으나, 가족과 함께 명절을 즐길 제목으론 좋지 않았던 탓이다. 다행히 일본에서 3개월을 상영, 체면을 살려준 경우다.

부산에서 영화 <태풍> 화물선 씬 촬영 중 곽경택 감독과 배우 장동건이 연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사진: 차용범 제공).

영화 <미운오리새끼>, “내 20대 담았다”

Q. 20대 시절을 담은 자전적 영화 <미운오리새끼>가 화제였다. <영창 이야기>를 확장시킨 작품이라던데?

“맞다. <영창 이야기>는 내가 영화판에 들어올 수 있게 물꼬를 터준 영화다. 그래서 기회가 되면 이 영화를 꼭 장편영화로 만들어보고 싶었다. 사실 <미운오리새끼>는 여러 투자사에서 퇴짜를 맞았다. 결국 나와 모든 스태프의 인건비를 투자해서 만들었다. <친구> 이후 관객층을 넓히기 위해 시나리오를 다듬으며 현실과 타협을 해오기도 했다. 이번에는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보여주고 싶은 단 한 장면을 위해 전혀 타협하지 않았다.”

<미운오리새끼>는 그의 20대 시절을 회상하며 만든 영화다. 1987년 민주화 항쟁이 뜨거웠던 시절 6개월 방위, 소위 '육방'의 이야기를 담았다. 군대에서 ‘육방’의 존재는 부대의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는 잡병. 영화는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웠던 그때, ‘육방’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놓인 주인공을 통해, 당시나 지금이나 힘든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모든 <미운오리새끼>들의 힘찬 발돋움을 유쾌하게 그려냈다. 

Q. <미운오리새끼>에 신인 배우를 기용했다. <친구> 장동건, <똥개> 정우성, <사랑> 주진모를 생각하면 파격적 캐스팅이다. 특히 연기자 오디션 프로그램 <기적의 오디션>(SBS, 2011년)’ 을 통해 ‘발견’한 김준구, 정예진이 열연을 했다는데...?

“감독이라면 누구나 그림에 덧칠하기보다는, 백지장에 새로운 뭔가를 그리고 싶은 욕망이 있다. <기적의 오디션>에서 그들을 보면서 그런 욕망이 생기더라. 김준구는 가장 어렵다는 코미디와 정극을 자유롭게 구사했다. 정예진은 시나리오 속의 캐릭터를 완벽하게 표현했다. 참 잘한 선택이다.”

Q. ‘기적의 오디션’에서 독설가로 명성이 높았다. 멘토로서 젊은 세대에게 해주고 싶은 격려 or 질책의 얘기였나?

"애정이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영화계가 얼마나 힘든 곳인가? 최소한의 갑옷은 입혀서 내보내고 싶다. 젊은 친구들이 꿈은 참 많다, 그러나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감수해야 할 부분에 대한 각오는 약하다. 지금 ‘88만원 세대’, 너무 힘든 시절이다. 그 힘든 시절, 선배세대들도 다 겪고 극복했다. 그런 생각을 전하려, 뒤집어 표현한 부분이 많다.“

부산은 한국 영화중심도시로 도약하고, 세계 속 좋은 브랜드 이미지를 키워가고 있다. 사진은 부산대학교에서 영화 ‘태풍’ 크랭크인하던 날. 왼쪽부터 배우 김갑수, 정보석, 이정재, 곽경택 감독(사진: 차용범 제공).

Q. 살아가며 평소 보람을 느낄 때는 언제인가?

"얼마 전 작품 작업을 마치고 경제적으로 참 힘든 시절 얘기다. 택시를 탔더니 기사분이 날 알아보시더라. ‘영화 모두, 잘 봤다. 너무 감사하다’고 격려하시며, 택시비 6000원을 안받으려 하시더라. 그저 내 영화 좋아하는 분이 더러 있을거라 생각하다, 정을 담아 격려해 주는 팬 만나면 정말 힘이 난다.“ 그는 <태풍> 때문에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릴 때, 이메일 한 통을 받았다. 해군사관학교 학생이 자기 고교생 때 <태풍>을 보고 해군장교 될 결심을 했다는 사연이다. 기분이 너무 좋아 만나 밥도 먹고 하는 사이를 유지한다. 영화 한 편이 한 인생의 좌표였다는 것, 참 행복한 일이다.

Q. 다시 태어나도 영화감독을 할 것 같은가?

"당연하다. 난 영화에서 돈을 벌지 못하더라도 그냥 영화 만드는 일이 너무 좋다. 어차피 인생은 꿈처럼 살다 가는 것 아닌가. 여러 사람의 삶을 영화를 통해 고찰하고 묘사하는 것, 남보다 풍족한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내내 그지없이 겸손한 자세와 목소리를 유지했지만, 이 부분에선 굉장한 확신을 당당하게 드러냈다.

[부산의 현대인물을 찾아서, 곽경택 편③]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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