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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령군, 라스푸틴, 그리고 유홍준

기사승인 2019.01.06  23:2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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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리스트 강석진

칼럼리스트 강석진

웃다가 정신이 번쩍 드는 일이 있었다.

2019년이 밝아오던 지난 4일 청와대 춘추관(기자실)에서 브리핑이 열렸다. ‘광화문 대통령 시대 위원회’의 유홍준 자문위원이 청와대를 광화문으로 이전하겠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후보 시절 공약에 대해서 브리핑을 했다.

유 자문위원은 보안, 비용, 역사성을 따져 볼 때 청와대를 광화문으로 이전하기 어렵고, 관저(대통령 거주 시설)는 이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공약 실현이 불가능해졌음을 솔직하게, 빠르게 검토해 발표한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정신이 번쩍 든 것은 유 자문위원이 관저 이전 필요성을 거론하면서 “관저의 풍수상 불길한 점을 생각할 때 옮겨야 한다”고 말한 부분에 이르러서다. 유 자문위원은 풍수상으로도 관저 이동에는 수많은 근거가 있다고도 덧붙였다.

이 말이 사실인가? 21세기 대명천지에, 청와대에서, 문화재청장까지 지낸 대통령 직속 위원회 자문위원이, 공개적으로, 국가 중요 시설을 이전하는데 풍수지리를 근거로 들이민 것이 눈을 뜨고도 믿기지 않고, 눈을 감아도 믿기지 않는다.

타임머신을 타고 19세기로 날아가 보자. 안으로는 백성에 대한 착취, 부정 부패로 썩을 대로 썩었고 밖으로는 외세의 침략이 하루하루 노골화되고 있을 때, 암우한 고종과 민 왕후는 무당과 점쟁이에 의존해 나라를 파탄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용하다는 한 무당에 홀려 진령군(眞靈君)이라는 호칭을 그 무당에게 내리고 굿판으로 국정을 어지럽혔다. 왕실의 안녕을 빈다면서 궁중에 신당(神堂)을 짓고 금강산 1만 2000봉우리마다 쌀 1석과 돈 10냥을 바치게 했다고 한다. 민 왕후는 풍수지리에 집착해 28년 동안 친정아버지 무덤을 네 차례나 옮겼다. 무당 주문을 받아 궁궐 기둥 밑에 큰 솥을 묻었다. 현재 서울시청 앞 광장 자리에 민가들이 있었는데, 덕수궁 수요가 많아 무당과 점쟁이들이 대거 거주했던 것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재정은 파탄으로 가는 급행열차를 탔고, 이 광경을 보는 외국인은 “고종은 무당을 불러 굿판을 벌이는 등 미신을 신봉했다. 열강의 국제 관계와 일본 속셈은 이해하지 못했다”는 기록을 남길 정도로 한심하게 여겼다(러시아 공사 베베르).

종두법을 시행한 지석영은 1894년 7월 간신 민영준과 무당 진령군을 죽여 도성에 목을 매달아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지만 소용없었다.

유 자문위원의 발표를 웃으며 듣다가 정신이 든 김에 몇 가지 말을 해 두고 싶다.

풍수지리에 자연과학적인 암시가 숨어 있다는 주장이 있지만 현재로서는 과학적 근거가 없는 미신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만일 과학적 암시가 있거나 근거가 있다면, 풍수지리로 말을 풀어나갈 것이 아니라 그 과학적 근거와 논리로 설명했어야 한다.

유 자문위원의 브리핑 가운데 풍수지리 언급 부분을 촌극이라고 웃고 넘어가기에는 황당하고 한심한 점이 하나둘이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광화문 청와대 시대 공약은 꽤 재미를 본 공약이다. 2012년에도 내놓았고 2017년에도 내놓았다. 시민에 가까이 다가가는 이미지를 주는 데 성공한 공약이다. 이를 접은 만큼 유 자문위원이 아니라 문 대통령이 가까운 시일 안에 국민 앞에 진솔하게 사과하는 게 필요하다. ‘풍수지리에 마음을 뺏긴 자문위원’의 일방적 발표는 대국민 사과로서 미흡하다.

유 자문위원은 풍수지리상 많은 근거가 있다고 했다. 아마도 위원회에서 많은 이야기가 오간 듯하다.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위원회를 상상하면 황당하고 한심하기 짝이 없지만, 근거가 있다고 했으니 그 근거를 소상하게 밝혀야 한다. 위원회 회의록도 공개해야 한다. 누가 어떤 주장을 내놓았고 누가 동의했는지도 국민은 알아야 한다. 위원회 운영에 국민 세금이 한 푼이라도 들어갔다면 국민에게 알 권리가 있다.

문 대통령도 보고를 받았다고 윤영찬 국민소통수석이 밝혔다. 문 대통령은 별 말씀 없이 수용했다고 하는데 풍수지리 근거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밝혀야 한다. 청와대 관저 이전의 근거를 풍수지리에서 찾는다는 것은 국제사회에서도 웃음거리가 충분히 될 만한 일인 만큼 대통령이 미신으로부터 국정운영을 독립시켜야 한다는 점에서도 대통령의 인식을 분명히 해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구한말 고종의 예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제정 러시아 말기 ‘괴승’ 또는 ‘요승’으로 알려진 라스푸틴도 있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국면에서 비선 실세로 국정을 농단한 최순실을 진령군이나 라스푸틴에 빗댄 이야기도 무성했다. 최순실의 행태와 유홍준의 발표를 평행선상에 놓고 비교할 일은 아니나 과학적 근거에 바탕을 둔 합리적 판단을 뒤로 물리고 미신을 앞세우면 한 나라를 초토화시킬 수도 있다는 점만큼은 지적해두고 싶다.

칼 마르크스는 “역사는 되풀이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라는 말을 남겼는데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저자로 이름을 날렸고, 문화재청장까지 지냈고, 대통령 직속 위원회의 자문위원이라는 공인의 발표를 비극으로 들어야 할지, 희극으로 들어야 할지 황망하기만 하다.

이런 상태로 청와대 이전 문제를 종결지으면 두고두고 웃음거리가 될 소지가 크다. 중요한 문제를 한심한 근거로 처리한 만큼 청와대 이전 문제는 미신 신봉자들을 제외하고 위원회를 다시 구성해 재논의하는 게 바람직하다. 

칼럼리스트 강석진 reporter1@civicnews.com

<저작권자 © CIVICnews / 시빅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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