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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만 학살 비극의 땅, 캄보디아는 아직도 아프다

기사승인 2015.05.15  09:5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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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빅뉴스 프놈펜 특파원, 옛 '킬링필드'를 가다

“우리는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과 의료진이 필요합니다. 영어를 할 수 있거나 의사는 손을 들어주시오.” 공산주의 무장단체인 크메르 루주 간부가 끌려온 사람들에게 이렇게 묻자, 눈치를 보던 한 명이 손을 든다. “저는 영어 교사입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한두 명씩 손을 들기 시작한다. 농민의 지상낙원을 건설한다던 크메르루주는 이렇게 지식인과 부유층들을 고문실로 끌고 가 고문하다 살해한다.

   
▲ 1985년 6월에 개봉된 영화 <킬링필드>의 포스터

이것은 1985년 6월에 개봉한 영화 <킬링필드>의 한 장면이다. 킬링필드는 1975년부터 1979년까지 4년간 캄보디아에서 일어난 공산주의자들의 양민 대학살이 일어난 곳을 가리키면서 동시에 대학살 자체를 뜻하기도 한다. 폴 포트가 이끄는 공산주의 급진단체였던 크메르루주는 친미 정권을 무너뜨리는 쿠테타로 정권을 잡았다. 크메르루주는 12세기 앙코르와트 궁전을 짓고 찬란하게 살았던 왕조인 크메르(Khmer)와 빨강이라는 불어인 루주(Rouge)가 합쳐진 이름을 가진 급진 좌파 무장단체다. 이들은 평등한 삶을 위한 사회주의를 지향하면서 전체 인구가 농장에서 집단농사를 지으면서 농부로 살아갈 것을 강요했다. 이러한 생각은 부유층과 지식인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졌고, 그래서 많은 이들이 대학살의 희생자가 됐다. 당시에 배 나온 사람, 피부가 하얀 사람,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은 전원 숙청의 대상이 되었다고 할 정도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 유엔의 집계에 따르면, 200만 명이 살해당했으며, 이는 당시 캄보디아 전체 인구의 1/4 정도다.

킬링필드를 겪었을 당시 12세였던 쌈밧(54) 씨는 현재 앙코르와트 주변에서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오토바이를 택시처럼 개조한 ‘툭툭이’라 불리는 캄보디아식 운송수단을 운전하고 있다. 그는 어렸을 적 영어교사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마을에서 유일하게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어서 마을에서 존경받는 선생님이었다. 쌈밧 씨도 자연스럽게 아버지에게 영어를 배웠다. 하지만, 킬링필드가 일어나고, 그는 눈앞에서 아버지가 끌려가는 것을 봤다. 그는 “그 후로 아버지는 고문을 받다 죽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 앙코르와트 주변에서 ‘툭툭이’를 운전하는 쌈밧 씨(사진: 취재기자 류세은).

캄보디아에서는 호텔 앞이나 관광객들이 많이 가는 식당, 관광지 근처만 가면 우리나라 초등학생보다 더 어린 아이들이 관광객을 붙잡고 “1달러, 1달러”라고 외치는 모습이 보인다. 비단 아이뿐만 아니라 간난아이를 업은 엄마들도 불쌍한 표정을 지으면서 손을 내밀어 관광객들의 동정심을 유발한다. 그들이 한국 사람을 보면 “천 원도 받아요”라며 한국어로 말한다.

학교에 갈 아이들이 구걸로 돈을 버는 이유는 부모님이 학교에 보내지 않기 때문이다. 킬링필드 이후로 캄보디아 사람들은 교육받는 것을 두려워한다. 킬링필드 당시에 교사, 대학교수 등 소위 지식층들이 속수무책으로 끌려가서 죽었기 때문이다. 혹여나 자신의 자녀도 고등교육을 받게 되었을 때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앵벌이 하는 것을 내버려둔다. 캄보디아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한국교포 김정은(40) 씨는 관광버스가 카페에 멈추어 서면 아이들이 달려 나와 구걸하는 모습을 수시로 본다. 김 씨는 아이들에게 “왜, 학교에 가지 않냐”고 물어보면 “집에서 안 보내준다고 말하는 아이가 많다”고 말한다.

   
▲ (오른쪽)캄보디아 톤레 사프 호수에서 관광을 마치고 올라오는 관광객들에게 아이들이 구걸하고 있다. (왼쪽)툭툭이 옆에서 돈을 달라고 손을 모으고 있는 아이의 모습(사진: 취재기자 류세은).

캄보디아는 한국전 당시 원조를 보낼 정도로 아시아에서 잘사는 나라였다. 하지만 킬링필드 이후로 캄보디아는 1970년대 그 상태로 멈추어 있다. 앙코르와트와 같은 유명한 유적지가 있어 제2의 도시라고 불리는 씨엠립에 캄보디아에서 베트남까지 이어지는 가장 긴 도로가 있다. 하지만, 이 도로는 이 나라에서 가장 긴 도로라는 말이 무색하게 차선도 불분명하고 아직 흙길인 비포장도로다. 운전자들은 마음대로 유턴하고, 보행자들은 차를 피해서 차도를 건넌다. 씨엠립의 중심지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제2의 도시라고는 믿어지지 모습이 펼쳐진다. 허허벌판에 드문드문 집이 한 채씩 보인다. 현지에서 한국인 가이드를 하고 있는 이우영(49) 씨는 “킬링필드 이후 캄보디아는 급격히 못살게 됐다. 지금 정부도 조금씩 개발하려고 하고 있지만, 너무 막막해서 손을 놓고 있는 상태다”라고 말했다.

   

▲ 캄보디아 씨엠립 시와 과 베트남 호치민 시를 이어주는 도로(사진: 취재기자 류세은).

   
▲ 씨엠립 시에서 20분 정도 차를 타고 지나온 곳으로 도시에 인접해 있는 곳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개발이 덜 된 지역이다(사진: 취재기자 류세은).

1970년대까지 캄보디아는 아시아에서 잘 사는 국가 중 하나였다. 하지만 한 집단의 잘못된 생각으로 4년 만에 인구의 1/4이 죽었다. 앞으로 나라를 이끌어갈 아이들은 혹시나 하는 두려움에 교육을 받지 않는다. 그날 이후 40년이 넘은 지금, 캄보디아의 발전은 멈추어 있다.  

시빅뉴스 캄보디아 특파원 류세은 reporter@civicnews.com

<저작권자 © CIVICnews / 시빅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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