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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현대인물을 찾아서, 강남주 편④] 그가 아름다운 이유는 영원한 청년이기 때문이다

기사승인 2018.11.21  23: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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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노년’ 강남주 작가에게 노년(老年)의 길을 묻다 / 차용범

[부산의 현대인물을 찾아서, 강남주 편③]에서 계속, 인터뷰 시점이 5년 전인 까닭에 일부 내용은 현 시점에서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시인은 어릴 적 꿈…은사 권유로 첫 발

Q. 총장 퇴임 이후 시작(詩作)활동이 활발했다. 계간시지 '시로 여는 세상'이 기획 '시인 집중조명' 난에서 강 시인의 시와 산문을 실었고, 월간 시 전문지 ‘시문학’도 강 시인의 시세계 특집을 하기도 했다. 총장 시절 목말랐던 욕구가 분출한 것인가?

“그랬다. 퇴임과 함께 여러 문학잡지에 시를 꾸준히 발표했다. 다행히 발표한 시들이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기도 했고. 선거에 포로 잡힌 정치꾼 같은 문인들, 비문학적인 이유로 다툼질하는 문인들을 보며 언제쯤 부산에도 문학적 문인 풍토가 이루어지나 아쉬운 생각도 들 때다. 이 무렵에는 문학 모임에 우우 몰려다니는 것보다는 시를 쓰는 것이 생산적이란 생각을 많이 했다.”

그는 ‘문학은 혼자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지금도 가능하면 문학행사에 ‘끌려 나가’, 함께 소주 한 잔 마시고 오는 일은 가능한 삼가고 있다.

Q. 1973년 시집 <해저의 숲>을 내고, 1975년 ‘시문학’에 시 <바느질>로 본격적 문학활동을 시작했다. 기자 시절, 참 바빴을 텐데?

“난, 고교 때 대망의 부산 유학은 이뤘지만 공부는 열심히 하지 않았다. 시 쓰는 일에만 흠뻑 빠져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디서 백일장이 있으면 결석을 하면서라도 그 쪽으로 달려가곤 했다. 때로는 상을 받기도 했고, 때로는 낙방을 되풀이했다. 그러면서 나도 시를 쓸 수 있다는 자가진단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신춘문예에 응모했으나 낙방했다. 대학 1학년 때 또 낙방했다. 비로소 공부를 시작했으나, 전공과는 다른 공부를 했다. 국어와 영어, 문학이론을 혼자서 열심히 하는 것이었다. 대학을 졸업했다. 그 때는 지금보다 취직이 더 어려웠다. 공채를 하는 직장이라는 게 우리나라에서는 고등고시와 언론사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을 때였다. 운 좋게 부산문화방송에 들어가 몇 년을 보냈다. 경찰서 출입기자를 면하면서 시간적 여유가 조금 생겼다. 비로소 스스로를 돌아보며 문학의 향수에 젖어들었고, 그것이 다시 시를 다시 쓰는 계기였다.

어느 날 은사 향파 이주홍 선생 댁에서 뒷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그 시작 노트를 흘러버렸다. 선생과 맥주 한 상자를 마셨다. 선생은 기분 좋게 취하셨고 그는 얼큰했다. 집에 와서 보니 시작노트가 없어졌다. 며칠 뒤 선생이 부르셔서 갔다. 습작노트의 시를 시집으로 손수 꾸미고는 출판을 명(命)했다. 망설이는 그에게, “우리나라 시인으로 그 정도면 됐다”고 채근했다. 첫 시집 <해저의 숲>이다.

그 뒤, 돈 있으면 시집이야 누구라도 낼 수 있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어 정식으로 등단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2년간에 걸쳐 시 전문지의 추천을 완료하고, ‘공식적’으로, 시인의 명찰을 달기에 이르렀다.

1973년 첫시집 <해저의 숲> 출판 기념회에서 요산 김정한선생(왼쪽), 향파 이주홍선생(사진 중앙)과 함께(사진: 차용범 제공).

Q. 방송기자에서 신문기자로 옮겼다. 특별한 이유라도?기자생활하며 출강…교수 된 것 후회 없다

“MBC 기자로 일할 할 때 큰 사건의 경험이 많았다. 어떤 사건의 경우 16일간 경찰서 기동타격대 방에서 자면서 취재를 했다. 옷 갈아입을 때만 집에 갔다. 자연히 특종을 많이 했다. 그것이 계기가 되었던지, 신생 동양TV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다. 텔레비전의 미래를 보고 그쪽으로 옮겼다.”

당시 동양TV는 역시 신생 중앙일보와 같은 회사였다. 수시로 인사교류도 있었고, 취재도 함께 했다. 그는 중앙일보에서도 특종을 해서 보너스를 넉넉히 받기도 했고, 취재 잘못했다고 당시 사회부장으로부터 꾸중도 많이 들었다고 기억한다.

Q. 신문기자에서 다시 대학교수로? 모교 부산수산대(부경대 전신) 국문학과 교수로 옮겼으니 영광스러웠겠다.

“방송사에 들어갈 때가 대학원 석사과정을 끝내고 논문 준비를 하고 있을 때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부터 무의식적 학문지향성이었는지도 모르겠다. 70년대 중반에는 낮에 슬쩍슬쩍 대학에 출강을 했다. 재미가 있었다. 본격적으로 공부하자는 생각에서 박사과정에 적을 두었다. 그때는 박사학위가 없어도 대학의 전임교수가 될 수 있었던 때였다. 박사과정도 끝나고, 시인으로서의 활동도 열심히 할 때 부산수산대에서 불렀다.”

그는 부산수산대 출신 아닌가. 모교에서 “전임교수 자격을 다 갖추고 있으니 모교에서 근무할 생각이 없냐”고 타진했다. 얼씨구 좋은 기회로구나 생각하며 가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인사위원회의 채용결정 소식을 듣고, 부임 준비를 위해 학교에 갔다가 깜짝 놀랐다. 초임이 월 16만 8000원이라는 것, 중앙일보▫동양방송 월급 32만 6000원의 딱 절반이었다. 보너스도 당시 공무원은 연 200%, 그는 회사에서 특종과 특진으로 850%의 보너스를 받고 있었다.

“난감했다. 기가 죽어 집으로 돌아왔다. 집사람이 왜 그렇게 기운이 없냐고 묻더라. 봉급 이야기를 했더니 집사람도 깜짝 놀랐다. 아이들 셋이 학교에 다니고 있는 집에서 수입이 절반 이하로 깎이다니.... 고민하던 아내가 용기를 줬다. 살림은 자신이 할 테니 그토록 하고 싶었던 일, 하고 싶으면 하라고-. 지금 생각하면 그때 결정이 다행이었다. 쓰고 싶은 글도 쓸 수 있었으니-.”

 

경남 하동서 고교 부산 유학

강 총장은 경남 하동 출신이다. 그가 기억하는 고향은 섬진강이 은빛을 반사하는 지리산록 강변 마을, 자연풍광과 고유문화만으로 우뚝한 고을이다. ‘삼포지향’, ‘백사청송의 고장’이며, 박경리의 명작 <토지>와 김동리의 소설 <역마>의 무대이다. 그 땅에 배인 인물의 역사, 한국전쟁 때 겪은 깊은 한(恨)도 결코 가벼이 할 수 없는 ‘물 좋고 산 좋으며 내세울 것 많은 땅’이다. 부산으로 출향, 대학총장을 지내고, 부산문화재단 대표 명함을 새겼으니, 그는 오늘 고향 하동의 ‘유명 출향인사’다.

Q. 부산과의 인연은 언제부터인가?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연고도 없는 부산의 한 명문 중학교에 지원했다. 덜컥 합격은 했으나, 입학금을 마련하지 못할 형편이었고, 외삼촌께서 마련해 준 입학금을 들고 부산 가는 버스를 탔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버스가 봄비에 미끄러져 남강 지류에 처박혀버린 거다. 결국 부산에 있는 중학교 등록을 못하고 고향 하동으로 귀환, 다음 해 하동중학교에 진학했다. 부산과는 ‘인연 없이’ 3년을 보낸 뒤, 비로소 부산의 동아고교 모자를 썼다.”

Q. 당시의 부산과 지금의 부산, 어떻게 달라졌나?

“내가 대학 4년을 보낸 대연동 일대 풍경이 떠오른다. 지금 대연동 일대, 건물이 숲을 이룬 도심 아닌가. 하루에 몇 번밖에 다니지 않던 버스가 요즘은 몇 분이 멀다하고 다닌다. 용당 캠퍼스의 경우는 버스가 교내까지 학생들을 실어 나른다. 세상이 이렇게 변했다. 상전벽해가 따로 없다.”

그는 당시를 에세이집 <돌아가길 잘했다>에서 정감 있게 묘사한다. “...대연 캠퍼스의 학교 뒤편 풀밭에 누워 하늘을 우러러 보면 그 하늘은 깊고 그윽했다. 보리가 한창으로 자라 머리가 묵직해질 무렵이면 노고지리 무리가 흩어졌다 섞였다 비비배배 노래를 부르면서, 그림 같은 그 푸른 하늘로 자맥질을 했다. 공해가 없었던 하늘, 그 투명한 하늘을 보면서 청년시절의 꿈을 익히던 곳이 바로 대연동 일대였다.” 노고지리 노닐던 자리가 오늘 대학생 밀집지역으로 변했으니, 상전벽해라는 것이다.

 

부산사람 포용․역동․의리…부산의 잠재력

Q. 부산의 강점, 부산사람의 특질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부산은 1963년 직할시로 승격, 이제 50년을 맞았다. 부산은 그동안 ‘혁명적 진화’를 거듭했고, 한 외국 조사기관은 최근 부산을 ‘아시아태평양지구 혁신도시’ 9위로 발표했다. 세계가 지켜보고 있는 북경이나 상해를 앞지른 순위다. 난, 그런 ‘부산의 혁신’ 역량에 방점을 찍고 싶다. 혁신은 발전 잠재력을 말해주는 중요항목 아닌가.”

그는 단언한다. 부산의 긍정적 지표는 나열하기가 벅차다고. 그러면서 강조한다. 부산은 혁신역량에 바탕한 지식창출능력이 매우 뛰어나다고. 또 하나, 선진도시의 중요 요건으로 기본적 질서의 확보를 든다. 질서가 없고 생각이 천박한 도시는 아무리 높은 빌딩이 많아도 커다란 먼지덩이에 다름 아닐 수도 있다고. 그런 면에서, 부산의 발전 잠재력은 정말 엄청나다고.

강남주, 그는 부산직할시 승격 50주년을 맞아 공표한 ‘부산 미래가치 시민선언’을 만드는데도 깊이 관여했다. 부산을 대표하는 석학이니, 그가 생각하는 부산의 향후 정신적 푯대가 없을 수 없다. 그가 생각하는 부산시민의 독특한 정서는 포용성-역동성-의리성 같은 것.

그는 특별히 부산시민의 정신적 성숙을 기대한다. 부산의 미래가치를 숙성▫발전시킬 요소다. 이런 정신적 성숙은 공중질서의 확보와 남을 배려하는 도덕성을 전제로 한다. 어린 학생이 할머니에게 욕설을 하는 사회, 길에 담배꽁초를 마구 버리거나 교차로에서 다른 사람과 부딪히고도 사과하지 않는 사회는 성숙한 사회라고 할 수 없다. 이것이 그의 믿음이다.

 

끝까지 소설 쓸 것…원숙하게 살았다 기억되길

Q. 이제 새내기 소설가다. 언제까지 소설을 쓸 생각인가?

“아침에 도를 깨치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했던가. 나는 나의 내일을 모른다. 누가 언제 죽을지를 알 수 있는가. 죽는 날까지 노력하는 신인으로 남고 싶다. 그러다가 미완의 작품 앞에서 숨을 거두기로서니 무슨 여한이 있겠나.”

Q. 앞으로의 계획은?

“계속 글을 쓸 생각이다. 남과 다투지 않고 살겠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새로 시작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Q. 기자, 교수, 총장, 시인, 문화행정가에, 소설가까지, 정말 다양한 인생역정이다.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어도 좋다. ‘치졸한 사람’으로 살지 않았다는 기억만 해 준다면-.”

1960년 '수산대학의 밤'에서 자작시 <出渙以后(출환이후)>를 낭독 모습(사진: 차용범 제공).

그가 아름다운 이유? ‘영원한 청년’이어서

강 총장, 그는 인터뷰어와의 인연이 남다른 ‘선배’다. 동향에, 기자 경력에, 봉생문화상을 수상한 부분도 공통점이다. 그는 1989년 이 상의 1회(문학) 수상자, 인터뷰어는 1991년 3회(언론) 수상자다. 이 상 수상자는 일찍부터 수상자모임을 꾸려왔다. 그와 인터뷰어는 이 상의 인연을 통해서만 23년여를 함께 살고 있다. 그는 처음부터 줄곧 ‘종신’ 비슷한 회장으로, 인터뷰어는 총무-부회장에, 이젠 운영위원장으로. 문화교류를 위한 해외나들이와 문화답사를 위한 국내여행도 계속, 함께 다니고 있다.

그래서일까. 그는 인터뷰어보다 인터뷰어를 ‘잘 아는’ 사람이다. 최근 인터뷰어가 인물평전 한 권을 발간하며 서평을 부탁했다. 그는 인물평부터 적었다. 차용범, 그는 냉정하면서도 활화산같이 뜨거운 사람이라고, 할 일이 있으면 밤을 새며 끝을 보는 완벽주의자에, 하기 싫은 일은 끝내 고사하는 성격이라고. 새겨보니 한 치도 틀림없는 평가였다.

이 인터뷰를 준비하며 그를 연구한 준비자료를 보냈더니, 그는 대응했다, “당신은 ‘나보다 나를 더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라고-. 그만큼 서로는 물리적으로 자주 마주치며 심정적으로 많은 얘기를 나눠온, ‘상대에 관한 한 무장해제 상태’이다. 그럼에도, 이 인터뷰에서 그의 진면목을 보지 못한 부분은 적지 않을 터. 어차피 대중매체 글쓰기는 달리면서 써내려가는 역사이니, 그런 경험을 가진 그는 이 부분을 널리 이해할 터이다.

그는 일찍이 ‘문화의 힘’을 강조해 온 문화우선주의자다. 얼마 전 함께 만든 책의 제목 역시 그의 제안을 채택했다. <부산은 문화다>로. 그는 늘 홀로 걷고 홀로 도전하며, 역동적으로 산다. 그는 짐짓 항변한다, “왜 25세 청년에게 자꾸 ‘노년’ 얘기를 하느냐?”고. ‘영원한 청년’을 자임하는 그의 노년은, 그래서 아름답다. 우리가 그를 ‘아름다운 노년’으로 기억해야 할 이유다.

[부산의 현대인물을 찾아서, 승효상 편①]로 이어집니다.

차용범 reporter1@civicnews.com

<저작권자 © CIVICnews / 시빅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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