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노동자 보호법' 시행돼도 하청업체 노동자에겐 '그림의 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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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노동자 보호법' 시행돼도 하청업체 노동자에겐 '그림의 떡'
  • 취재기자 김환정
  • 승인 2018.11.06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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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업주의 감정노동자 건강장해 보호조치 법제화...하청·협력 업체 직원은 보호 사각지대 놓여 / 김환정 기자

대학생 박지수(23, 부산시 연제구) 씨는 수능을 친 후부터 지금까지 여섯 번의 아르바이트를 경험했다. 다양한 곳에서 일을 했지만, 모두 서비스업이었다. 그러나 매번 그를 힘들게 하는 것은 일명 ‘진상고객’이었다. 박 씨는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는 손님부터, 물건을 던지거나 소리를 지르고 화내는 고객이 정말 많았다”며 “몸보다 마음이 힘든 감정노동자로 일한다는 게 정말 괴로웠다”고 말했다.

감정노동자란 손님을 응대할 때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통제하는 일을 일상적으로 하는 근로자를 말한다. 쉽게 말해, 판매·음식·관광 관련 종사자로 사람을 상대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을 담당하는 노동자를 감정 노동자라고 일컫는다.

서비스업(사진: pixabay 무료 이미지).

지난 10월 18일 박 씨와 같이 피해를 입는 감정노동자를 법적으로 보호할 수 있도록 ‘감정노동자 보호법’이라고 불리는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이 시행됐다. 앞으로 감정 노동에 종사하는 근로자들은 이 법을 통해 상대 고객의 폭언이나 폭행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게 됐다.

신설된 조항은 산업안전보건법 제26조 2항인 ‘고객의 폭언 등으로 인한 건강장해 예방조치’다. 이 조항에는 "사업주는 고객을 직접 대면하거나 상대하는 근로자에 대하여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유발하는 행위로 인한 건강장해를 예방하기 위하여 필요한 조치를 하여야 한다", "현저한 우려가 있는 경우에는 업무의 일시적 중단 또는 전환 등 필요 조치를 하여야 한다" 등의 내용이 명시돼 있다. 또, 제72조에는 "사업주가 이를 지키지 않을 시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는 항목 또한 적시돼 있다.

서울신문에 따르면, 지난해 서울연구원이 서울시 공공부문 감정노동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전체 응답자 중 69.4%가 고객으로부터 모욕적인 비난이나 고함, 욕설 등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또, 구인구직 전문 사이트 알바몬이 지난 2월 아르바이트생 1512명에게 ‘감정노동’을 주제로 설문을 진행한 결과, 아르바이트생 5명 중 4명은 자신이 ‘감정노동자’라고 여기고 있었다. 주로 고객 상담(83.5%)과 서비스(79.1%) 직무 알바생 중에 이같이 인식하는 비중이 특히 높게 나타났다.

실제로 한 대형 백화점에서 일하고 있는 P 씨는 “판매하는 제품을 서비스로 달라는 등 무리한 요구를 하는 고객들 때문에 곤란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라며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컴플레인을 걸겠다고 협박하는 고객부터 담당자를 부르겠다며 소리를 지르는 고객도 다반사다”고 말했다. 통신사 고객센터에서 근무하는 A 씨도 전화 상담을 하던 중 성추행을 당한 경험을 털어놨다. 일부 고객들이 “아가씨 목소리가 섹시하다”, “내 애인하자” 등의 발언을 마구 하는 것. A 씨는 “고객이 갑이고 내가 을이라는 이유로 이런 모욕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며 “당시에는 정말 비참하고 눈물이 났다”고 말했다.

감정노동자들이 고객들의 갑질이나 심지어 성희롱을 당하는 경우가 많아 극도의 스트레스를 겪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사진: pixabay 무료 이미지).

이러한 감정노동자들은 번아웃증후군(의욕적으로 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극도의 신체적 · 정신적 피로감을 호소하며 무기력해지는 현상), 스마일마스크증후군(밝은 모습을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에 슬픔과 분노 같은 감정을 제대로 발산하지 못해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 등을 겪는가 하면 정신적·육체적 괴로움을 호소하고 있다. 때문에 감정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제도를 마련하자는 사회적 목소리가 컸고, 이에 관련 법안이 제정된 것.

그러나 이 법이 실효성이 없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근로자에는 원청업체의 직원만 해당되기 때문이다. 실질적으로 더 많은 수를 차지하는 해당 기업의 하청업체나 협력업체의 근로자들은 법의 테두리 밖에 있는 것이다. 또한 고객의 폭행 및 폭언을 판단하는 주체가 직접 대면하는 근로자가 아닌 사업주라는 점에서 노동자들이 법의 보호를 제대로 받을 수 없다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고용노동부 산업보건과 관계자는 “사업주가 자신의 의무를 얼마나 잘 수행하냐에 달렸기 때문에 하청업체 및 협력·입점 업체의 근로자들이 보호를 못 받는 것은 아니다”라며 “해당 사업주들이 보호 조치를 잘 할 수 있도록 간담회나 캠페인 등을 통해서 많이 알리고 있으며, 원청·하청 관계없이 모든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보호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지난 1월에는 고객센터에서 현장 실습을 하던 여고생이 극단적 선택을 했고, 7월에는 한 고객이 백화점에서 소리를 지르며 화장품을 점원에게 집어던지는 영상이 페이스북에 올라 사회적으로 큰 논란이 되는 등 감정노동자가 피해를 입는 사건·사고는 끊이지 않고 있다. 이에 감정노동자를 위한 제도와 처우를 개선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계속 늘고 있다. 노동자들이 손님이 없을 땐 의자에 앉아있을 수 있도록 하는 ‘앉을 권리’ 캠페인과 감정노동자들의 입장을 이해하자는 ‘And you’ 캠페인, 콜센터 직원이 고객의 폭언을 피해 전화를 끊을 수 있는 ‘끊을 권리’ 등 감정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각종 캠페인 등이 이어지고 있다.

전국서비스산업노동조합연맹 이성재 정책실장은 감정노동자 보호법이 오래 기다리던 법인만큼 반갑지만 우려가 더 크다고 말했다. 이 실장은 “판매직 등에 종사하는 감정노동자들 대부분이 원청 소속이 아니기 때문에 보호받지 못할 우려가 더 크다”며 “근본적인 해결이 안 돼서 당사자들은 아직도 굉장히 힘들어하는 상황이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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