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news_top
default_news_ad1
default_nd_ad1

“그 때는 그랬지요”

기사승인 2015.03.16  09:05:52

공유
default_news_ad2

누구나 어릴 적 추억으로 돌아가 보면 모든 게 크고 넓게 보인다. 학교 운동장이 그렇고 신작로가 그렇고 심지어 초등학교 교문 옆 은행나무 가로수조차 우람하게 보였다. 또 당시 겨울은 왜 그렇게 추웠을까? 냉골 방 윗목에 둔 자리끼가 아침에 일어나면 얼 정도였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돼서인지 내가 다닌 도회지 초등학교는 한 학급 학생이 60명을 훨씬 넘어 교실은 늘 포화상태에 연통을 단 난로는 교실 한 가운데 하나였다. 판자로 만든 가교사는 외풍이 심할 뿐 아니라 지면과 떨어진 마루 틈새와 옹이구멍에는 찬바람이 스며들어 특히 교실 가 쪽 학생들은 언 발에 동상입기 십상이었다. 그런 환경 속에 담임 선생님은 나무 땔감을 가져오는 학생들을 주로 난로 근처에 앉혔다. 땔감이 없어 집이 냉골인 아이들은 학교에서도 추위와 싸워야 했다.

지금은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이지만 당시는 초등학교도 극빈자를 제외하고는 모든 학생이 PTA(parent-teacher association)라고 학부모와 교사 간에 친목을 도모한다는 취지의 사친회비를 내야 했다. 이 회비는 뒤에 기성회비, 육성회비 등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수업료보다 훨씬 많아 소위 ‘아이보다 배꼽이 큰’ 회비 징수를 놓고 지금도 논란이 일고 있다. 한 반 학생의 70~80%가 빈곤층인 당시 형편에 사친회비를 제 때 내지 못하는 학생들이 수두룩 하자 교무실에서는 교감 선생님 주도로 반별로 막대그래프를 그려놓고 실적이 저조한 반 담임 선생님들을 족치기 일쑤였다. 아침마다 수업 시작 전에 사친회비를 제 때 못낸 학생들은 이름을 부르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이고 뭐라 변명을 해야 했는데 나는 늘 일어나 고개를 똑바로 들고 담임을 쳐다봤다. 난처해진 담임은 궁여지책으로 사친회비를 제 때 못낸 학생들을 공부시키지 않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집에 가봤자 사정을 뻔히 아는 우리들은 철길 근처에 삼삼오오 모여 대못을 주워 기차 지나가는 시간에 맞춰 레일 위에 얹어놓고 못을 납작하게 만든 뒤 끝을 뾰죽하게 갈아 만든 ‘아이구찌(단도를 뜻하는 일본어)'를 나무 표적에 던져 맞추는 놀이로 시간을 보냈다. 가난이 죄인 시절 어린 동심들은 나름의 울분을 그렇게들 풀었다. 수업이 끝날 무렵이면 우리는 하나 둘 거리를 두고 교실에 들어가 담임에게 적당히 둘러대고 대신 벌 청소를 했다. 그 시절 나의 통신표 행동발달 사항은 다른 항목은 모두 “가”였지만 사회성만은 “다”였다. 나는 사회성이 무엇인지 잘 몰랐다. 뒤에 안 일이지만 전후 재정이 핍박한 정부가 교사들의 급료 부족분을 사친회비 명목으로 거두도록 권장하고 일정 액수가 되면 거두지 않아도 되었는데 항상 과다 징수해 교사들에게 수당과 학교 경비로 썼다는 것이다. 지금 같으면 언론에 두고두고 씹힐 일인데도 그 당시는 당연한 교육적 처사로 여겼다.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선생님들은 호랑이였다. 특히 훈육주임 선생님은 가장 두려운 존재였다. 등교시간 교문에서부터 복도에서, 교정에서 훈육 선생님은 항상 지휘봉 비슷한 회초리를 들고 다니며 지나가는 학생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현장에서 가차 없이 체벌했다. 작곡가로도 잘 알려진 중학교 음악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뭐든지 좋으니 질문하라고 하시어 “가수 이미자는 백년 만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목소리라면서요?”하고 물었다가 뺨이 얼얼할 정도로 얻어맞았고 반 아이들은 다들 크게 웃었다. 또 고등학교 1학년 때인가 손때 맵기로 유명한 영어 선생님 수업시간에 옆 친구를 보며 웃었다고 불려나가 교탁에서부터 교실 뒤 게시판까지 그 큰 손바닥으로 밀려가며 앙다문 뺨을 수없이 맞은 적도 있다. 교실은 아침부터 공포 분위기였다. ‘웃은 죄’밖에 없었는데 왜 맞는지, 왜 때리는지 이유를 모르는 체벌 아닌 폭력에 우리들은 다만 첫수업의 경우 해당 선생님들의 그날 표정부터 잘 살펴야 했다.

고교 시절 무엇보다 가장 괴로운 시간은 학생 군사훈련인 교련이었다. 얼룩무늬 교련복에 각반을 차고 무거운 목총을 든 채 총검술 16개 동작과 분열과 열병 등 재식훈련을 매주 3년 동안 받았다. 특히 도내 시범학교로 지정되면서 걸핏하면 인근 사단에서 검열을 나와 입시공부에 시달리는 학생들을 여름 뙤약볕이 내려쬐는 운동장 아닌 연병장으로 불러내었다. 교장 선생님의 일장 훈시와 군복을 입은 교관과 조교들의 장광설에 도열해 있는 학생들은 입에 거품을 물고 넘어지기 일쑤였다. 학교는 병영 생활과 진배 없었다.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라는 뜻도 모를 ‘혁명고약’이 아닌 혁명공약을 듣고,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띄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을 조회마다 암송하며 우리의 의식은 여물어갔다.

고등학교 교련 3년과 군대생활, 예비군, 그리고 민방위 훈련. 청춘의 황금 같은 시간들이 군사문화에 물들어갔다. 자유로운 낭만의 시간만 있을 줄 알았던 나의 대학시절도 고달프기는 마찬가지였다. 현실정치에 반항하는 학생운동의 싹은 물리력이 동원돼 저지되었다. 대학방송 기자시절 교수들의 양심선언문을 정오 뉴스시간에 내보냈다가 방송국 전원이 차단되었고, 문제 학생으로 지목돼 담당 교수의 정기적인 상담과 감시를 받아 대학생활이 시들해질 무렵 교내에 탱크가 주둔해 방학 때가 아닌데도 방학이 실시되었다. 이른바 ‘유신방학’이었다. 자연히 대학생활 내내 공부와는 거리가 멀어졌고 빨리 졸업해 직장을 구하는 게 급선무였다.

그 후 사회에서 방송국에 근무하며 도 교육감이 되신 고등학교 시절 호랑이 훈육주임 선생님과 점심을 함께 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학생 체벌이 한창 문제가 되던 때여서인지 선생님은 교육적인 입장에서 조차 ‘사랑의 매’도 문제가 있음을 에둘러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선생님 그 때는 왜 그렇게 학생들을 패셨어요?”라고 질문 아닌 질문을 했다. 선생님도 잠시 머뭇거리더니 짧게 하시는 말씀이 “그 때는 그랬지요”라고 당시는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또 그래도 되는 분위기였음을 암시하셨다.

얼마 전 고등학교 교장 자리에서 정년을 마친 한 고교 동기의 퇴임식에 축시 낭송 요청을 받고 덕담 몇 마디를 했다. 필자도 신문, 방송기자 생활 34년을 했으니 세상에 별 부러운 일 없었지만 초등과 중등 교사, 장학사, 교감을 거쳐 교장까지 무려 42년을 교단에 섰던 그가 부럽고, 그의 두 아들이 결혼해 식장에 며느리와 손자들까지 참석했으니 그 또한 부러운 일이라고…. 더구나 어려운 시절 박봉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교단을 지킨 친구와 같은 선생님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이만큼 살게 된 게 아니냐고, 지하자원이 부족한 대한민국이 그래도 짧은 기간 경제발전을 한 것은 모두 인재를 키우는 ‘교육입국’ 정신 때문이었음을 강조했었다.

최근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는 구호 아래 산업화에 성공한 사례를 다룬 영화 <국제시장>과, 엄혹했던 군사독재 시절 민주화를 위해 노력한 이들을 다룬 영화 <변호사>가 수많은 관객을 동원하며 우리의 현대사를 재조명하는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보는 시각에 따라 두 편의 한국영화에 대한 반응이 세대 간에 엇갈릴 수 있다. 그리고 그 시대를 살았던 기성세대와 다른 세대 특히 ‘88만원 세대’, ‘3포 세대’로 일컬어지는 요즘 젊은 세대 간에는 갈등도 존재한다. 그러나 변치 않는 사실은 산업화와 민주화가 먼 과거의 일이 아니라 불과 반세기에 걸쳐 일어났고 그 주역 세대들이 나름으로는 열심히 어려웠던 세상을 살아낸 결과 지금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5.16 군사 쿠데타의 주역이자 한국의 현대 정치사에서 ‘2인자의 철학’에 관해서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JP(김종필 전 총리의 영어 이니셜)는 얼마 전 부인 상(喪) 때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졸수(90세)가 되고 보니까 미워할 사람이 없다. 나름대로 살고 있으니까 그 입장이 있겠지”라며 오로지 승자와 패자만이 있는 정치판에서 과거의 오류에 대한 관용의 정신을 에둘러 표현했다.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 현장에도 항상 문제는 있다. 물론 문제가 없으면 답도 없겠지만…. 다만 지적하는 교사나 지적받고 상응하는 벌을 받는 학생이나 왜 지적하는지, 왜 지적받는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폭력에 가까운 감정적인 체벌을 이유도 모르고 받아야 하는 그 때 우리는 으레 그런 줄 알았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견디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 무더운 여름 교련시간, 운동장 아닌 연병장 한 자리에서 30분 이상 부동자세로 앞사람의 뒷머리만 보고 서있으면 갑자기 앞 친구의 두 귀가 당나귀처럼 커졌다 작아졌다 해도 얼굴조차 흔들 수 없는 노릇에는 환장할밖에!

편집위원 장동범 reporter@civicnews.com

<저작권자 © CIVICnews / 시빅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5
default_side_ad1
default_nd_ad2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ide_ad4
default_nd_ad6
default_news_bottom
default_nd_ad4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