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내 아들이 아니야"...실종 사건 뒤의 검은 음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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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내 아들이 아니야"...실종 사건 뒤의 검은 음모
  • 부산광역시 연제구 이정은
  • 승인 2014.11.28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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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체인질링>을 보고

“True Story.” 영화의 내용이 시작하기 전에 이런 문구가 브라운관을 채웠다. 이 영화는 실화다. 보통 사람들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를 볼 때 다른 때보다 더 몰입하게 된다. 특히 실제 범죄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에서는 사람들이 피해자의 감정에 더욱 이입하기 마련이다. 그 이유는 내 주위에서도, 또는 자신들이 영화를 보고 있는 이 순간이나 어느 곳에서 일어나고 있을 것만 같은 일인 실화여서가 아닐까?

영화 <체인질링>은 1928년 미국 LA에 사는 미혼모인 크리스틴이 아들 월터를 키우며 평범한 삶을 사는 모습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하지만 크리스틴에게 아들이 실종되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 일어난다. 아들이 실종된 지 5개월 후, 경찰에서 아들을 찾았다는 소식을 알려왔지만, 찾은 아이는 그녀의 진짜 아들이 아니었다. 실종사건으로 세간의 이목이 쏠리고, 경찰의 무능함이 수면위로 떠오르자, 경찰이 사건을 무마하고자 그녀에게 가짜 아들을 데려온 것이다. 경찰은 자기 아들이 아니라고 항변하는 크리스틴을 정신질환에 기인한 공무집행 방해로 정신병원에 감금시키기까지 한다. 졸지에 크리스틴은 누군지도 모를 아들의 납치범과 믿고 있던 경찰은 물론, 작정하고 가짜 아들을 그녀의 진짜 아들로 몰아가는 행정 관료들을 상대로 승산 없는 투쟁을 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그 뒤 누군가의 제보에 의해 월터가 아동 연쇄살인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이 밝혀지며 희대의 살인극이 시민들에게 알려진다.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된 시민들과 크리스틴은 시위와 재판을 통해 월터의 실종사건을 담당했던 경찰을 파면시킨다. 또한, 법원은 경찰의 필요 때문에 무고한 시민들을 정신병원에 가두는 악법과 관행을 폐지하게 한다.

영화 <체인질링>은 1982년 미국에서 실제로 일어난 ‘와인빌 양계장 살인 사건’을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영화로 제작했다. 여느 상업 영화들과 달리, 이 영화에서는 극적 긴장감을 주기 위해 사건을 각색한 흔적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우리는 실제 사건을 토대로 영상을 덧붙여 영화로 제작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이 영화는 그야말로 꾸밈없이 아동유괴 및 살해라는 무거운 사건과, 사건을 무마하려는 공권력의 개입 자체에만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2시간 30분이라는 긴 상영시간 동안 영화의 속도감은 별로 느낄 수 없었다. 이 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를 차분히 진행해 나갔다. 오히려 사건의 사실만 다룬 점이 보는 이들을 이 영화에 더 빠져들게 하지 않았나 나는 생각한다.

이 영화는 단순히 아동유괴 및 살해라는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대중에게 부각하기보다는 사건의 진상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은 채 자신들의 이권만 챙기려는 공권력의 이면을 보여주려 하였다. 정부 관료들의 눈 가리고 아웅 식의 안 좋은 행태들은 동서양 가릴 것 없이 예나 지금이나 항상 존재해 왔다는 걸 이 영화가 우리에게 알게 해주는 것 같아 씁쓸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이러한 공권력 남용의 사례는 많다. 한 예로 2011년에 개봉한 <도가니>가 있다. 이 영화 역시 실화인 ‘광주인화학교’ 사건을 재조명함으로써 국민들의 공분을 자아냈다. 장애인 학교 교사들이 장애인 학생들을 성폭행했지만,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지나치게 가벼워 문제가 됐던 사건이다. 결국 영화가 개봉된 뒤 이뤄진 재수사를 통해 해당 사건의 가해자는 다시 구속기소되어 지난해에 징역 8년을 확정 받았다.

영화 <체인질링>은 공권력 남용을 국민들이 결코 좌시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언론 역시 힘 있는 자들의 목소리만 전달할 것이 아니라 사건의 진상을 파헤쳐 공권력에 가려진 진실과 소수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비록 끝내 아들을 찾지 못한 채 영화는 끝나지만, 잃어버린 아들을 찾기 위한 크리스틴의 간절한 모정은 공권력의 억압에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그녀는 끝까지 사건을 덮으려는 자들과 싸웠고, 공권력 남용을 좌시하지 않았던 시민들의 도움으로 그녀는 그 싸움에서 이겼다. 이 영화는 192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긴 하지만 영화감독은 어쩌면 절대 꿈쩍할 것 같지 않았던 공권력을 우리의 힘으로 바로잡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하지 않았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공권력 남용에 희생된 국민들이 있지 않을까? 우리 모두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는 자세를 가져야만, 내가 공권력의 희생양이 될지도 모를 만약의 상황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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