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35년 간 스페인 코르도바에서 한국을 대표했다”
상태바
“나는 35년 간 스페인 코르도바에서 한국을 대표했다”
  • 손희훈 시빅뉴스 스페인 특파원
  • 승인 2014.11.24 09: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스페인 이민 1세 코르도바 한인회장 문현석 씨 이야기

6개월 전 국내에서 인기리에 방영된 예능 프로그램 <꽃보다 할배>의 여파인지 스페인을 찾는 한인 관광객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실제로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와 같은 대도시에 가면, 이곳이 한국인지 스페인인지 어리둥절할 정도로 한인들이 많다. 그야말로 ‘스페인 관광 붐’은 스페인에 오면 실감난다.

하지만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조그만 소도시인 코르도바는 경우가 다르다. 이곳 안달루시아 지방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고작 80명이다. 안달루시아 지역의 면적은 8만 7,186㎢로 남한 면적이 9만 9,720㎢인 것을 고려하면 면적에 비해 이곳에 사는 한인 수는 매우 적다. 그마저도 스페인 이민 1세대로 건너온 약 20여 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대부분이 스페인 국적을 취득한 한인 2세들이다.

이런 외진 곳에 무려 35년째 삶의 터전을 일군 의지의 한국인이 있다.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 한인회장을 맡고 있는 문현석(59) 씨가 그 주인공. 기자 일행이 스페인에 막 도착하여 현지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흔쾌히 우리를 자택으로 초대하여 진수성찬을 차려주신 화통한 성격의 소유자인 문 씨는 약 20여 명의 스페인 1세대 이민자 중 한 명이다.

▲ 기자 일행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 스페인 이민 1세인 문현석 씨(사진: 취재기자 손희훈)

충청남도 아산 온양 출신인 문 씨는 젊은 시절 태권도 선수였다. 비록 전국대회에 출전할 기회를 갖는 못했으나, 그는 충남 대표 선수로 활동한 공인된 실력자다. 1979년 6월, 3년 간의 군 생활을 마친 문 씨는 고향 선배가 운영하는 체육관을 인수하여 고향 서산에서 태권도 사범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선배로부터 태권도 사범으로서 스페인에 건너가 현지인들을 가르쳐 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이 들어왔다. 1979년 당시에도 서독 광부 파견 같은 정부 차원의 해외 취업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태권도 사범으로서 해외취업은 당시로서는 굉장히 생소했다. 일순간, 그의 심장이 뛰었다. 그는 24세의 혈기왕성한 나이에 해외에서 의미 있는 일로 무언가 이루어 보다 나은 삶은 꾸리고 싶은 의욕이 넘쳤다. 그는 제안을 밪자마자, 냉큼 서산에서 대전까지 달려가 담당자와 얘기를 마쳤다. 당시만 해도 서산과 같은 조그만 촌에서 외국으로 나가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서 그는 스페인에 갈 수 있을지 반신반의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스페인 측과 얘기가 잘 풀렸다. 1979년 6월에 제대한 문 씨는 불과 반 년 뒤인 그해 11월에 아주 급작스럽게 스페인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문 씨는 “이것이 평생 내가 스페인 땅에 살게 될 운명의 시작이었음을 당시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 문현석 씨와 그의 부인(사진: 취재기자 손희훈)

스페인에 도착한 그에게 가장 큰 문제는 언어였다. 스페인 말을 못하니까 태권도 사범으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부터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통 되는 일이 없었다. 평생 책과는 담을 쌓고 지냈던 문 씨는 “6개월 동안 시간 날 때마다 책을 보며 죽어라 스페인어 공부만 했다”고 그때를 회상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현재 그의 스페인어 실력은 현지인 수준이다. 2년 간 남의 도장에서 스페인 학생들에게 태권도를 열심히 가르친 끝에, 그는 드디어 본인의 체육관을 차릴 수 있었다. 눈물이 났다. 어느 정도 기반이 잡히고 생활이 안정되면서, 그는 군 시절부터 사귀어온 한국의 애인이 너무 보고 싶었다. 그는 여자 친구의 아버지에게 “따님을 내주십시오” 하고 정성껏 편지를 써서 한국으로 부쳤다. 그렇게 해서 건너온 당시의 애인이 현재의 문 씨 부인이다. 말투에 카리스마가 뚝뚝 묻어나는 문 씨도 부인 얘기만 나오면 지금도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본인 스스로 본인을 애처가라 칭할 정도로 문 씨의 부인 사랑은 남다르다. 문 씨는 “집사람이 충남 아산에서 제일가는 미녀였다”는 자랑부터 “내가 사람을 좋아해서 집에 사람들을 자주 초대해서 집사람을 고생시켜 미안하다”는 얘기까지 부인 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의 말에서 낯선 땅에서 온전히 둘만의 힘으로 삶의 터전을 일궈오며 맺어진 끈끈한 부부의 정이 풍겨 나왔다.

언어가 해결됐고, 사랑하는 부인이 왔으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두 아이가 생겼지만, 그에게도 평생 잊지 못할 아픔이 있다. 스페인 생활이 9년 차에 접어들던 해, 문 씨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문 씨는 아버지의 죽음이 자기 탓이라 했다. 이제 자식을 키우는 아버지가 된 입장에서 문 씨는 본인의 아버지가 자식을 먼 타국에 보내놓고 마음고생을 많이 해서 젊은 연세에 돌아가셨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을 쉽게 떨쳐내기 힘들단다. 그는 조만간에 노모를 뵈러 한국에 잠시 다녀올 예정이다. 그는 “이번에 한국에 다녀오면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를 어머니께 내가 아버지께 저지른 실수를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지만, 결국 생업 때문에 금방 스페인으로 다시 돌아와야 하니 한숨이 난다”고 말했다.

태권도장을 10년 간 운영한 문 씨는 혼자 도장을 꾸리고 교육시키는 일이 생각보다 고되고 경영도 어려워서 태권도 도장을 접고 체형교정사로 직업을 바꾸었다. 이 분야는 애초부터 그가 관심이 많았던 분야였다. 문 씨의 체형 교정술은 이 지역에서 물리치료나 침술 치료와 경쟁관계에 있다. 출근은 일주일에 3일만 한다. 아무리 복지가 뛰어난 유럽 국가에 살고 있지만, 생계를 꾸리기는 힘들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문 씨는 “욕심 부리지 않고 검소하게 살되 만족하는 삶을 사는 것이 내 삶의 철학”이라고 말했다.

그는 출근하지 않는 날은 대부분 골프장에서 보낸다. 골프 얘기만 나왔다 하면 그의 눈이 번쩍 뜨인다. 그는 유명 골프 선수들의 경기들을 모두 꿰고 있다. 문 씨와 그의 부인은 코르도바 아마추어 골프대회에서 우승한 경력이 있을 정도로 골프 실력이 뛰어나다. 문 씨는 지는 것을 싫어하는 한국인의 근성 때문에 취미로 한 골프도 잘 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골프가 값비싼 운동으로 자리 잡고 있는 한국의 골프 문화에 대해 불만이 많다. 한국과는 달리 스페인 사람들은 진정한 의미의 취미로써 골프를 즐긴다. 80세가 넘어서 정정하게 골프장에 나오는 스페인 노인도 있다. 스페인 사람들은 골프 게임이 끝난 날에는 친한 동료들과 간단한 식사나 커피를 즐기도 한단다. 스페인 사람들에게 값비싼 골프복이나 장비는 중요한 게 아니다. 그는 “인생에서 좋은 취미를 갖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나는 골프 칠 때 가장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는 안달루시아 지방 한인회장이라는 감투를 무려 11년째 쓰고 있다.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와 같은 대도시 한인 커뮤니티는 그 규모가 크기 때문에 회장이 할 일도 많다고 한다. 예를 들어, 노무현 전 대통령이 스페인을 방문했을 때, 마드리드의 한인회장이 많은 역할을 담당했으며 심지어는 정부의 부탁으로 공항까지 마중 나갔다고 한다. 하지만 한인이 불과 80명에 불과한 안달루시아 지방의 한인회장은 감투에 불과하다며 문 씨는 겸연쩍게 웃는다. 공식적으로 그가 맡은 임무는 대외적인 한인행사를 주관하고, 한인 연락망을 관리하며, 한인들의 경조사를 챙기는 일이다.

안달루시아 지방에 있는 한인 또는 한국인 관광객들에게 문제가 생길 때에는 일차적으로 문 씨에게 연락이 온다. 일전에는 스페인 경찰로부터 여행 중 여권과 지갑을 도둑맞은 한국 학생이 있다는 전화를 받고 그 학생을 집으로 데려와 숙식을 제공해 준 적도 있다. 그는 다음날 그 학생의 여권 재발급 업무를 도와 주었고 용돈까지 일부를 챙겨서 학생을 보냈다. 한국으로 돌아간 학생이 감사 엽서를 그에게 보내 왔을 때, 문 씨는 한인회장으로서 큰 보람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공식적인 그의 직함 때문이 아니라 원래 남을 돕는 것을 좋아한다. 문 씨는 “나는 인간관계를 맺을 때 자신이 이익을 보겠다는 생각은 절대 하지 않는다”며 “자신이 조금만 손해 본다는 생각으로 인간관계를 맺으면 모든 일이 즐겁다”고 말했다.

사람 좋은 문 씨는 이역만리 스페인에서 이렇게 한국인을 돕고, 한국을 대표하며, 스페인을 지키고 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