궤멸 직전에 놓인 보수, 살아남으려면 처절히 반성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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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멸 직전에 놓인 보수, 살아남으려면 처절히 반성하라
  • 편집국장 강동수
  • 승인 2018.06.15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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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국장 강동수
편집국장 강동수

경천동지(驚天動地)랄까, 지난 13일 치러진 지방선거 결과는 여야 정치인은 물론 투표한 국민들 자신도 놀라움을 감출 수 없게 만들었을 만큼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1번을 찍었던 유권자 자신들도 마음 한편으론 ‘야, 이거 이렇게까지 돼도 괜찮을까’ 하는 불안 아닌 불안이 슬며시 들 정도였으니. 내 지인들 중에서도 이런 생각을 내비친 사람이 더러 있다.

광역자치단체장 ‘14 : 2 : 1’, 기초자치단체장 ‘151 : 53 : 5 : 17’,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 ‘11 : 1’, 다들 아시는 대로 이번 지방선거의 전적표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14개 광역단체장을 차지한 반면,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은 고작 2곳에 그쳤다. 기초단체장도 여당이 한국당의 3배 가까이 당선자를 냈다. 12곳 중 11곳을 석권한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는 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교육감 선거에서도 17곳 중 진보계열 후보가 당선된 곳이 14곳이라고 한다. 이번 선거는 ‘진보여당의 압승, 보수야당들의 참패’로 귀결됐다. 글쎄, 참패를 넘어 거의 궤멸 수준이 아닌가.

특히 부산, 울산, 경남의 선거 결과는 상전벽해(桑田碧海)다. 다들 아시는 대로 1990년 김영삼이 노태우, 김종필과 함께 3당 합당을 한 이후 이 지역은 30년 가까이 여당의 독무대를 이뤄왔다. 그 동안 야당은 이 지역에서 광역단체장은 물론, 기초단체장 한 명도 내지 못했던 터다. 시의원도 비례대표 한두 명이 가뭄에 콩 나듯 양념 삼아 끼어들었을 뿐. 말 그대로 보수당의 완벽한 영지였던 거다.

오거돈 더불어민주당 부산시장 후보가 13일 오후 10시께 부산진구의 선거캠프에서 두 손을 들고 승리를 기뻐하고 있다(사진: 오거돈 후보 블로그).

그런데 이번에 상황이 180도로 달라졌다. 부산에선 시장은 물론 16개 구청장·시장 가운데서 민주당이 13곳이나 가져갔다. 한국당은 고작 2석. 시의원도 47석(비례대표 5석 포함) 중에서 민주당이 41석을 가져갔다. 30년 보수당의 아성을 하루아침에 진보 여당이 통째로 점령할 줄을 누가 알았겠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울산과 경남도 비슷한 상황이다. 하물며 수도권은 말해 무엇 하겠나. 서울에선 구청장 25석 가운데 24석을 민주당이 싹쓸이 했고, 경기도에선 지역구 도의원 129석 중 128석을 싹쓸이 했으니. 단 1석을 한국당에 남겨준 건 ‘까치밥’이었을까.

선거 이후 신문과 방송마다 백가쟁명 식으로 이번 선거의 의미를 분석하고 있다. 모모한 정치평론가들의 주장을 되풀이할 생각은 없지만 선거 결과는 다시 뜯어봐도 놀랍다. 이번 선거에서 여당이 압승한 것은 무어 그들이 잘해서가 아니라 ‘문재인 효과’에 편승한 것은 분명하다. 문 대통령은 취임한 이래 1년여 ‘따뜻한 리더십’을 선보이며 지난 정권 때 국정 농단에 상심했던 국민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데 노력해 온 터다. 더 큰 이유는 북핵 폐기에 진력하면서 두 차례 남북정상회담을 열어 남북한 화해분위기를 몰고 왔고 미국과 북한의 협상 중재에도 견마지로를 다해 왔지 않나. 문 대통령의 노력, 그리고 앞으로 한반도에 항구적인 평화가 찾아들 것이란 기대까지 얹어 여당에 표를 듬뿍 던져준 것일 거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도보다리 회담(사진: 청와대 제공).

그러니 여당이 이번에 얻은 표는 어떻게 보면 빚이다. 잘 해서 준 것이라기보다는 앞으로 잘 하라고 준 표이니 제대로 하지 못하면 언제든 국민들은 지지를 회수할 밖에. 싹쓸이에 취해 독선, 독주하면서 흥청망청하면 삽시간에 ‘판돈’을 날릴 수 있다. 그러기에 문 대통령도 "국정 전반을 다 잘했다고 평가하고 보내준 성원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며 "모자라고 아쉬운 부분이 많을 텐데도 믿음을 보내셨다. 그래서 더 고맙고 더 미안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 해도 보수 야당들이 이토록 처참하게 패퇴한 것은 한편으론 이해하기 어렵다. 글쎄,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고 하지 않았던가. 망해도 이렇게 쫄딱 망할 수가 있을까. 그러니 이번 선거의 최대의 화두는 ‘진보 여당의 승리’가 아니라 ‘보수 야당의 궤멸’에 둘 수밖에. ‘지역당’이라느니, ‘TK 자민련’이라는 소리도 나왔지만, 그들의 패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은 온통 파란색으로 둘러 싸여 섬처럼 고립된 대구·경북 지역의 빨간 색이 도드라진 선거 판세 지도였다.

한국의 보수주의가 늪에 빠져 허우적거린 게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이번 선거를 앞두고 이미 예고돼 있었다. 4·27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을 두고 “남북회담은 위장평화쇼”라느니, “김정은과 주사파의 숨은 합의”라느니, “다음 대통령은 김정은이 될지도 모르겠다”느니 침을 튀기며 깎아내리는 홍준표의 말에 귀를 씻고 싶은 심정이 된 사람이 어디 나 뿐이었을까. 유권자의 마음도 읽어내지 못하고 엉뚱한 소리나 뇌까리는 제1야당의 지도자라니 딱한 마음을 넘어 안쓰럽기까지 했다. 불리한 결과가 나올 때마다 가짜 여론조사라고 자기최면만 걸면 속이 편해지나. 몸뚱이는 내놓고 머리만 풀숲에 처박은 까투리 꼴이랄까. 그러니 자당의 지방선거 후보들조차 “홍준표, 제발 그 입 좀 다물라”고 아우성치고, 지원유세한다고 찾아올 때마다 다른 곳으로 달아나곤 했지 않았던가. 글쎄, 블랙코미디가 따로 없었던 셈이다.

그렇다고 자유한국당의 몰락의 책임을 홍준표에게만 다 떠넘길 수는 없다. 보수정당의 자승자박은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문제의 근원이 홍준표의 막말에만 있는 것도 아니잖은가. 그들 자신도 제 병을 어떻게 고쳐야 할지 몰라 망연자실할 만큼 한국 보수의 병이 깊다는 건 이번 선거 결과로 여실하게 드러났다. 따지고 보면 한국의 보수가 병상에 드러누운 건 가깝게만 따져도 박근혜의 국정 농단 무렵이 아니었나. 그때 국민은 보수의 수준이 이것밖에 안 됐나 하는 새삼스러운 충격을 받았던 거다.

보수란 게 무언가. 나라의 안전과 사회의 안정을 최고 가치로 내세우는 세력이 아닌가. 변화는 느리지만 원칙과 정해진 절차에 따라 나라를 경영한다는 사람들이다. 입만 열면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운 이도 그들이다. 그런데, 박근혜 4년을 들여다보니 이건 시스템이고 뭐고 없이 대통령의 40년 친구라는 한 자격 없는 사인(私人)이 나랏일을 주물렀던 게 아니었던가. 공화주의가 뿌리째 흔들리지 않았던가. ‘친박’이니 ‘진박’이니 봉건시대를 방불케 하는 파당 싸움이 벌어졌던 게 아니었나.

박근혜 탄핵을 거치면서 흔한 말로 ‘뼈를 깎는 자기 혁신’이 있었어야 마땅하다. 극우 성향의 홍준표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고 당권을 맡김으로써 늪에서 발을 빼는 게 아니라 제 발로 계속 걸어 들어간 게 한국당의 행보였던 거다. 그들은 철 지난 극우적 냉전 논리를 읊으면서도 그게 오류라는 것도 몰랐다. 이 첨단 디지털시대에 SNS로 무장한 국민의 의식은 무섭게 바뀌는데도 1950년대, 60년대의 냉동고에서 꽁꽁 얼어붙은 채 해동될 생각도 않았던 거다. 그럼 그 결과는? 경멸과 비웃음이었다. 아니 파산 선고를 내린 국민의 심판이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궤멸에 가까울 만큼 참패했으니 그들은 그럼 확 바뀔 수 있을까. 안타까운 이야기이지만 아마 그다지 크게 기대를 걸 기 어려울 거란 게 내 예상이다. 홍준표가 물러났으니 비상지도체제를 거쳐 전당대회를 열고 새 지도부를 구성하겠지. 그럼 뭐하나. 본질이 바뀌지 않는데. 파산 직전의 바른미래당을 대상으로 ‘보수대통합’ 소리가 나올 수도 있을 게다. 역시 그럼 뭐하나. 역시 본질이 바뀌지 않는데. 고름이 살 되는 것 봤나. 이합집산이 중요한 게 아니다. 철저히 반성하고 철저히 깨져야 한다. 그런 다음에 보수의 이념을 재구성해야 한다.

보수정치세력의 괴멸이냐, 회생이냐. 그 분기점이 올해가 될 것이라고 나는 예상한다. 얻어맞고도 아픈 줄도 모르는 노신의 ‘阿Q’처럼 백치 웃음이나 짓고 있어선 그야말로 궤멸이다. 실제로 어제는 이런 보도도 나왔다. 자유한국당 일각에서 이번 광역단체장과 기초단체장 득표율을 바탕으로 자체 분석해 2020년 총선구도에 시뮬레이션해 보니, 지역구 당선권은 30석을 웃도는 수준이고, 비례대표 또한 10여 석에 그칠 것으로 분석됐다는 거다. 113석인 지금의 1/3 수준을 겨우 웃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런데 고민은 자유한국당의 괴멸이 자칫 보수의 괴멸로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점에 있다. 글쎄 수구·극우세력과 단호히 결별하고 대안적 보수담론을 재구성해 낼 능력을 갖춘 새로운 정치세력이 나타날 수 있느냐에 한국 보수의 사활이 걸려 있지 않을까. 법과 질서 안보를 강조하면서도 냉전의식을 떨치고 한반도의 평화를 가져올 대안적 시야를 가진 세력,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공정하고 민주적인 경제 시스템의 청사진을 보일 세력, 신중한 개혁을 주창하더라도 사회적 약자에 대한 애정을 보일 집단이 과연 나올 것인가.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흔한 이야기가 있지만, 보수가 이렇게 처참하게 허물어져선 국민들도 손해다. 진보와 보수가 서로 적절히 견제하고 경쟁해야 좋은 정치를 내놓을 수 있지 않겠나. 한국 사회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보수가 정신 차려야 할 때다. 계속 늪으로 빠져들 건지, 아니면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시간을 거쳐 재기할 수 있을 건지 그건 그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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