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투위, 동투(東鬪)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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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투위, 동투(東鬪)의 추억
  • 칼럼리스트 손동우
  • 승인 2018.04.08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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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부터 황령산 칼럼 필진으로 합류한 손동우 님은 경향신문 사회, 정치, 국제부 기자, 주독일 특파원, 사회부장, 사회 에디터, 논설위원과 EBS 이사를 거쳤으며 현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상임이사로 재직 중입니다.
칼럼리스트 손동우

3월 19일 서울 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에서는 뜻깊은 행사가 열렸다.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이하 동아투위)’의 결성 43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지금 젊은 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지 모르는 동아투위는 어떤 단체인가.

박정희 유신독재정권 시절인 1975년 3월 동아일보 기자들이 언론 자유를 부르짖으며 투쟁의 깃발을 올리자, 박 정권은 중앙정보부(국가정보원의 전신)를 통해 동아일보에 ‘광고탄압’을 가했다. 기자들은 이미 5개월 전인 1974년 10월 24일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통해 정권에 선전포고를 한 상태였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광고주인 기업들에게 압력을 가해 동아일보에 광고를 싣지 못하게 했고, 광고 지면이 백지로 나가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기자들의 저항이 더욱 거세지자, 박 정권은 동아일보 사주를 압박해 1975년 3월 17일 동아일보 기자와 동아방송 PD 등 113명을 강제해직했다. 거리로 쫓겨난 언론인들이 이틀 뒤인 3월 19일 지금의 프레스센터 자리에 있던 신문회관에 모여 결성한 단체가 바로 동아투위였다.

행사 주관단체인 자유언론실천재단의 회원이자 행사장인 프레스센터를 관리하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상임이사인 나는 당연히 기념식에 참석했다. 이날 기념식은 특히 지난 9년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언론 장악을 종식하고 공영 언론이 정상화의 첫 발을 내딛은 때에 열렸다는 점에서 더욱 뜻깊은 행사였다. KBS 양승동 사장 내정자, MBC 최승호 사장, EBS 장해랑 사장, 연합뉴스 조성부 사장 내정자 등 공영언론 사장과 사장 내정자들이 모두 기념식에 참석해 동아투위의 자유언론 정신을 기리고 언론 개혁에 앞장설 것을 다짐했던 것이다. 공영 언론 대표자들이 동아투위 기념식에 이처럼 한데 모인 것은 동아투위 결성 이래 처음이었다.

재야 운동가 백기완 선생, 이해동 목사, 함세웅 신부 등 동아투위와 연대했던 원로 인사들과 80년 해직언론인협의회 관계자, 전국언론노조, 언론개혁시민연대, 민주언론시민연합 등 언론시민단체 인사 100여 명도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김종철 동아투위 위원장 겸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도 감격에 겨운 듯했다. 그는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직후 5·18 광주항쟁의 역사적 의미를 국민에게 제대로 알렸던 것처럼, 또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됐던 대구 2·28 민주운동을 기렸던 것처럼, 유신독재에 맞섰던 동아일보 기자들의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이 언론과 민족을 일깨우는 역사적 동인이었음을 제대로 알려주길 소망한다”고 말했다.

행사장에 있던 나는 문득 동아투위 결성 직후인 1975년 4월초 어느날을 떠올렸다. 그 날의 사건은 지금까지 언론매체 등에 의해 단 한 번도 공식적으로 알려진 적이 없다. 당시 고교 2년생이었던 내가 실로 우연히 동아투위의 존재를 알게 된 날이었다.

내가 다니던 서울 신일고는 개신교 계통의 학교로서 매년 부활절이 되면 수업을 하지 않고 3, 4일 정도 영락교회에서 ‘심령부흥회’를 개최했다. 저명한 학자나 목회자를 모셔서 강연을 듣는 행사였다. 한완상 서울대 교수, 서광선 이화여대 교수 등이 초청강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행사 마지막 날 마지막 강연을 듣고 교회 정문을 나서려는데 미리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3학년 선배들이 우리 2학년 애들 앞을 막아섰다.

“너희들 우리 따라와!”

“어디 가는데요?”

“그냥 따라와!”

3학년 선배들 뒤를 따라간 곳은 지금의 광화문 동화면세점 건물 자리에 있던 국제극장 앞이었다. 길 건너편 동아일보 앞 마당에는 이미 우리 학교 학생들 100여 명이 연좌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시위대는 ‘언론자유’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학교 응원가인 <We Shall Overcome> <We Shall Not Be Moved> 등의 노래를 불렀다. 학생들보다 훨씬 많은 전경대원들이 진압복 차림으로 주위를 몇 겹으로 둘러싸고 있었고 ‘닭장차’도 수십 대 진을 치고 있었다.

‘후발대’인 우리는 동아일보 앞 ‘본대’에 합류하기 위해 지하도로 내려갔으나 이미 전경들이 바리케이드를 이중삼중으로 치고 막고 있었다. 결국 우리는 국제극장 앞에서 동아일보 앞 농성 동료들을 안타깝게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 순간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더니 전격적인 체포 연행이 시작됐다. 결국 시위대는 전원 닭장차에 태워져 어디론가 끌려갔다.

이튿날부터 징계 광풍이 학교 전체에 몰아쳤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그 무시무시한 박정희 유신 독재체제로서는 상당한 충격과 모욕을 느꼈을 법한 일이었다.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고삘이’(그때는 ‘고딩’이 아니라 이렇게 불렀다)들이 감히 광화문 네거리에서 체제에 도전하다니, 그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시위를 주도한 총학생회 간부들은 전원 제적된 뒤 당국의 조사를 받았고, 시위에 직간접적으로 관계한 학생들도 모조리 제적, 무기·유기정학 등의 중징계를 받았다. 수업 시간에는 담당 과목 교사 외에 담임 교사도 배석해서 학생들의 동태를 감시해야만 했다. 학교에서는 두 명 이상 모이지 못하게 했고, 도서관도 문을 닫아 아이들은 수업이 끝나면 곧바로 귀가해야 했다.

교목 선생님에 대한 거취도 학생들의 공분을 샀다. 교목을 맡으셨던 이귀선 목사님은 평소 아이들과 장난도 잘 치고, 늘 따뜻하게 아이들을 대해주셔서 인기가 높았다. 일주일에 한 번 채플 시간 설교에서는 ‘너희들은 나중에 사회 지도자가 되더라도 항상 가난한 이웃, 억눌린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취지의 말씀을 자주 하셨다. 그것은 일종의 ‘의식화’였다. 바로 이러한 대목을 눈여겨보았을 당국은 교목 선생님을 시위 배후조종자로 지목한 뒤 잡아넣으려 했다. 학교와 재단 측은 모든 노력을 기울여 ‘학교에서 내쫓아 미국으로 보낼테니 사법처리만은 하지 말아달라’고 관계 요로에 통사정했다고 한다. 결국 교목 선생님은 미국으로 일종의 강제추방을 당했다.

이런 과정을 지켜본 우리 학교 아이들은 강제해직당한 동아일보 기자들은 의로운 일을 하고 있다는 것, 유신독재는 사악한 체제라는 것, 그때 우리가 동아일보 앞마당에서 농성을 한 것은 자랑스런 일이라는 것 등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됐다. 우리 반 아이들이 용돈 한두 푼을 모아 "동아일보 힘내라/어느 고교생 일동"과 같은 격려광고를 낸 것은 소심하지만, 결코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또다른 투쟁이었다.

43년 전 동아일보에서 쫓겨나 동아투위를 결성해 싸웠던 30~40대 젊은 언론인들은 이제 여든 안팎의 백발노인으로 변했다. 113명 가운데 29명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가장 연로한 투위 위원은 올해 86세가 됐다. 국가가 이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적정한 배상을 할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동아투위는 단순히 43년 전 어느 특정 언론사에서 해직된 언론인들이 만든 단체가 아니다. 동아투위는 질곡의 한국 현대사에서 언론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져 치열하게 싸웠던 우뚝한 역사적 존재이기도 하다. 김종철 동아투위 위원장의 외침처럼 “세계 언론 역사에서 해직된 113명의 언론인이 옥살이와 고문을 견디면서, 블랙리스트에 올라 취업도 금지 당하면서 43년 동안 권력에 맞서 싸운” 일은 전례를 찾기 어렵다.

한국 언론사에서 동아투위가 없었다면, 그들의 끈질긴 싸움이 없었다면, 그것은 불의한 독재정권에 대한 언론의 부끄러운 굴종으로 기록됐을 것이다. 따라서 전체 한국언론과 한국사회는 동아투위에 역사적 도덕적 채무를 지고 있으며, 동아투위는 당당한 채권자인 셈이다. 문제는 그 채무의 이행이 제대로 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정부는 동아투위에 대한 명예회복과 배상 등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서둘러야 한다.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8년 10월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동아일보는 언론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헌신해왔던 자사의 언론인들을 보호하기는커녕 정권의 요구대로 해임함으로써 유신정권의 부당한 요구에 굴복했다”고 밝힌 바 있다. 언필칭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가 진실화해위의 결정을 외면할 수는 없는 일이다. 박종만 동아투위 위원의 지적대로 “비록 늦었더라도 그 결정을 따르는 것은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것이 아니라 촛불혁명으로 태어난 이 정부의 의무”인 것이다.

아울러 유신독재 치하에서 최초의 고교생 시위를 감행했던 내 친구들도 비록 많이 늦었지만 작은 위로와 격려라도 받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그들은 어린 나이에 학교에서 쫓겨나고, 당국의 엄혹한 조사를 받는 등 적잖은 고초를 받았음에도 지금까지 단 한 줄의 기록도 얻지 못했다. 이 보잘 것 없는 글이 그들의 오래된 상처를 조금이나마 어루만질 수 있으면 좋겠다. 혹시 동아투위 백서를 비롯한 관련 문서가 재정리되는 등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들의 용기와 분투를 힘껏 알려서 반드시 기록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동투’(동아투위를 더욱 줄여서 부르는 명칭)의 의로운 싸움에 힘을 보탰던 신일학교 내 친구들, 너희들이 진실로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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