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벨벳 평양공연에 마저 ‘빨갱이 덧씌우기’인가...남북화해에 ‘겐세이’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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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벨벳 평양공연에 마저 ‘빨갱이 덧씌우기’인가...남북화해에 ‘겐세이’는 안된다
  • 논설주간 강성보
  • 승인 2018.03.22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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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주간 강성보

고 박완서의 1977년 단편소설 <돌아온 땅>은 후반부에 낮술에 취한 건달이 시외버스에 올라타 손님들을 향해 행패를 부리는 에피소드가 들어있다. 그 취객은 한 젊은 여인의 옆자리에 앉아 고성방가를 하더니 그녀에게 시비를 걸며 노래를 부르라고 윽박지른다. 그의 주정을 보다 못한 승객들과 차장이 검문소에 버스를 세우고 헌병에게 그를 끌어내려 달라고 호소한다.

그런데 헌병이 버스에 올라타자, 그는 갑자기 주정을 딱 그치고 멀쩡한 척하며 헌병을 돌려보낸다. 헌병이 내리고 다시 버스가 출발하자, 그는 벌떡일어나 “야, 이놈의 빨갱이 새끼들”이라며 고함을 치고 살기등등한 눈을 부라리며 승객들에게 다시 행패를 부린다. 흥미로운 것은 승객들의 반응이다. 취한의 “너 빨갱이지”라는 손가락 지적이 자신을 향할까봐 모두 다 전전긍긍하며 숨을 죽인다. 승객들은 죄인이 되고 난동을 부린 취한은 죄인을 응징하는 심판자의 입장이 된다. 결국 아무도 그 취객 옆 여성을 도와줄 수 없게 되자, 그녀는 취객이 시키는 대로 노래까지 불러야 했다.

이를 두고 박완서는 이렇게 말했다.

“취객은 빨갱이라는 악(惡) 중에도 최악을 내세워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최소한으로 축소하고 마침내 무화(無化)하는데 성공한다. 이 땅의 모든 악이란 악은 빨갱이라는 최악만 만나면 (그게 설사 허상이라도) 맥을 못추고 위축되는 이 땅의 특이한 풍토를 취객은 교묘하게 이용한 것이다.”

박완서 소설의 취객이 그랬듯이, ‘빨갱이’라는 말은 한국사회의 원형적 분노와 공포를 자극해 사태의 본질에 대한 판단력을 흐리게 만드는 마법의 용어다. 해방 이후 이승만 정권과 이에 빌붙은 친일파 잔당들은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이 요술방망이를 함부로 휘둘렀다. 때로는 자신들의 죄악을 감추기 위한 갑옷으로 사용했다. 아무리 건전한 민족주의 정치인, 지식인이라고 해도 '빨갱이'로 몰리는 순간 박완서 소설 속 승객들처럼 맥을 추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게 되는 것이다.

이 ‘빨갱이 몰이’는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군사정권을 거쳐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까지 지나면서도 여전히 끈질긴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다. 지난해 촛불정국에서 태극기 집회가 내건 주된 슬로건은 ‘좌빨 척결’이었다. “좌파 빨갱이를 몰아내자”는 구호는 일베 등 친박 보수우익 세력을 결집시키는 핵심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심지어 제1야당 자유한국당도 문재인 대통령 공격의 단골 메뉴로 “좌파 대통령”, “종북 정권”이란 시대착오적인 용어를 마구잡이로 사용하고 있다.

‘빨갱이=공산주의자’란 프레임은 볼세비키 혁명 이후 지구상에 등장한 공산당 정권이 거의 대부분 진홍색 깃발을 사용한데서 비롯됐다. 구 소련 국기는 붉은색 바탕에 노동자와 농민을 상징하는 낫과 망치 문양이 그려진 것이었다. 소련 해체 이전 당시 러시아 등 15개 소비에트 연방 국가 모두가 이 깃발을 사용했다. 중국 국기는 붉은 색 바탕에 노란 별 5개가 그려진 이른바 ‘오성홍기(五星紅旗)이며, 문재인 대통령이 이달 말 방문하는 베트남 국기도 붉은 바탕에 황금색 별이 하나 수놓인 ‘금성홍기’다. 북한은 붉은 색 바탕에 붉은 별, 그리고 남색 줄이 아래위에 그려진 이른바 ‘남홍색 공화국기’를 사용한다. 같은 공산당 국가인 쿠바 역시 카리브해의 푸른 바다를 상징하는 청색, 백색 스트라이프가 5개 그어져 있으나 핵심 포인트는 왼쪽 붉은 바탕의 삼각형이다.

붉은 벽에 그려진 구 소련 국기(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중국의 오성홍기(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하지만 붉은 깃발이 저항과 혁명의 의미로 사용된 역사는 이보다 훨씬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록에 따르면, 778년 발생한 이란의 고르간 폭동 때 농민들은 붉은 깃발을 들고 싸웠다. 당시 농민들의 적기(赤旗)는 흰 바탕에 붉은 줄이 그어진 것을 사용했는데 주인의 가혹한 매질에 몸 곳곳에 줄이 생긴 노동자, 농민을 상징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로부터 약 100년 뒤 896년 신라의 서남부에서 농민 폭동이 발생했는데 당시 신라의 농민들은 단결의 표시로 붉은 색 바지를 입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14세기 원(元) 제국 말기 중국 북방에서 군사를 일으킨 주원장의 농민 반란군은 붉은 색 두건을 썼다. 바로 홍건적(紅巾敵)의 난이다. 홍건적 출신 주원장은 결국 원을 무너뜨리고 명(明)나라를 건설한다.

유럽에서도 16세기 폭동을 일으킨 독일의 농민들이 붉은 깃발을 사용했고, 프랑스에서는 1792년 라파예트에 맞선 시민들이 ‘왕족들의 계엄령에 대한 인민의 계엄령’이라고 적힌 붉은 깃발을 들고 나왔다. 또 1848년 프랑스 2월혁명 당시에도 시민들은 붉은 색 깃발을 들고 나와 앙시앙 레짐 타도를 외쳤다. 그리고 1871년 유럽 공산주의자들이 결성한 파리 코뮌 이후 적기, 또는 홍기(紅旗)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상징으로 자리잡게 됐다.

1848년 프랑스 혁명 상황을 그린 그림(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혁명가들이 붉은 색을 선호하는 것은 피의 색이기 때문이다. 색채심리학적으로 붉은 색은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만들고 흥분시킨다고 한다. 폭력과 잔인함을 상징하는 한편 생명과 정열, 사랑, 동물적 본능을 일깨우는 색갈이라는 분석도 있다.

중국인들은 원래부터 붉은 색을 좋아했다. 주역의 음양사상에서 붉은 색은 밝고 희망차고 강건한 양(陽)을 상징하며, 어둡고 음울하고 칙칙한 음(陰)의 기운을 물리쳐준다고 생각했다. 중국의 황제는 홍포를 입는게 원칙이다. 한(漢)나라 유방(劉邦)은 스스로 적제지자(赤帝之子)라 부르고 붉은색 옷을 즐겨입었다. 베이징 자금성(紫禁城) 역대 황제들이 머물렀던 방은 모두 붉은색 톤으로 치장되어 있다. 자금성 이름 자체도 적색 계열인 자주색에서 나왔다. 중국인들은 붉은 색은 고귀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붉은색에 대한 호감은 중국인들의 생활 깊숙이 박혀있다. 명절날, 기념일에 선물을 주고 받을 때 반드시 붉은색의 포장지로 싼다. 촌지를 주는 붉은색 돈봉투는 아예 ‘홍포(紅包)’라는 고유명사가 붙어 있다. 홍안(紅顔)은 미녀의 대명사이고, 인기 연예인은 홍성(紅星)이다. 홍리(紅利)는 장사가 잘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 커팅하는 테이프, 터뜨리는 폭죽도 온통 붉은색이다. 여기에 공산당을 상징하는 홍기(紅旗)가 나라의 깃발로 들어섰으니 중국은 온통 ‘빨갱이 천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오쩌뚱(毛澤東)의 문화대혁명 당시 마오 사상에 세뇌된 홍위병들이 전국을 누비며 폭력을 휘둘렀던 역사도 있다. 이 홍위병이란 말은 이제 보통명사로 우리 언어생활 속에서도 녹아들어와 널리 사용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붉은색이 전통적으로 그다지 귀하게 인식되지 않았다. 오히려 중국에서는 귀신의 색으로 경원시되는 흰색이 더 숭상되었다. 삼국시대 이래 모든 백성들이 흰옷을 즐겨입었다고 해서 백의민족이라 불린 것도 그 때문이다. 다만 우리 선조들에게 붉은색은 정절과 충성심을 상징한다는 의미는 있었다. ‘일편단심(一片丹心)’이란 말이 이를 나타낸다.

하지만 근대 들어 붉은색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덧씌워지면서 공포와 적개심의 색깔로 자리매김됐다. 웬만한 진보 지식인들은 우익 인사들이 덮어씌우는 ‘빨갱이’라는 덧칠에 박완서 소석 속 승객들처럼 공연히 주눅이 들고 거의 알레르기적 반응을 보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지금도 일부 친박 사이트나 SNS에서는 자신들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공격하는데 ‘빨갱이’란 프레임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고 있다.

공산주의자, 또는 사회주의자를 빨갱이로 부르는 것은 우리나라 뿐만은 아니다. 프랑스에서도 어감은 다소 차이가 있지만 공산주의자를 ‘루주(빨간색)’로 부른다고 한다. 젊었을 때 공산당에 적을 두었다가 나이 들어 신좌파적인 이론을 펴고 있는 대학교수를 두고 프랑스 언론이 “루주에서 루주-베르(빨간색-녹색)로 돌아선 사람”으로 평가했다고 홍세화가 그의 대표저서 <파리의 택시운전사>에서 밝힌 바 있다. 또 종편에 한때 자주 등장해 인기를 끈 핀란드인 따루는 한 예능 토크쇼 프로에서 “핀란드 사민당의 할로넨 대통령이 집권하자 그의 아버지가 ‘빨갱이(red communist) 대통령 밑에서 어떻게 사나’며 한탄했다”고 소개해 만장의 웃음을 샀다. 핀란드 노인들도 한국의 어르신들처럼 근본적으로 사회주의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던 것이다.

내달 초 남측 예술단의 평양공연에 걸그룹 ‘레드벨벳’이 참여하는 것을 두고 일부 보수인사들 이 뒷말을 수군거리고 있다. 다른 걸그룹을 제쳐두고 공연단에 굳이 레드벨벳을 선정한 것은 북한 당국자들의 붉은색 취향을 염두에 둔게 아니냐는 것이다. 게다가 이 그룹의 히트작 중 하나인 <빨간 맛>도 부를 예정이라고 하니 “빨갱이 잔치가 될것”라는 비아냥도 흘러나오고 있다.

그룹 레드벨벳이 1월 10일 경기도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제32회 골든디스크 시상식에 참석해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사진: 더 팩트 고병희 기자, 더 팩트 제공).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 아무리 레드 콤플렉스, 빨갱이 미망에 사로잡혀 있다고 가장 자본주의적인 미소녀 걸그룹에다 그런 터무니 없는 덧칠을 해대니 기가 막힌다. 만약 ‘붉은색’에 인격이 있다면 명예훼손 소송을 벌일 판이다. 그룹 이름에, 노래 이름에 ‘레드’가 있다고 빨갱이인가. 국내에서도 영화로 소개된바 있다시피 퇴역 CIA 요원을 지칭하는 <레드>도 공산주의자라고 규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망발이다.

한 보수단체 인사는 평양 방문 예술단의 단장 윤상이 재독 음악인 고 윤이상 선생과 이름이 비슷하다고 친북좌파 음악인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윤상의 본명은 이윤상이라는 것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내뱉은 고약한 가짜뉴스다.

이번 남측 예술단의 평양 방문 공연은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맞이하고 있는 남북화해 무드를 한걸음 더 진작시키기 위한 이벤트다. 한반도 정세가 극도의 긴장국면에서 평화와 화해의 국면으로 대전환하는 이 중차대한 시기에 시대착오적인 빨갱이 몰이, 종북몰이로 그들이 흔히 입에 올리는 이른바 '겐세이'를 해서는 안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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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양현 2018-03-31 00:26:05
빨갱이는 빨갱이라고 부를 수 있어야 민주주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