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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의 약점

기사승인 2018.03.12  06:0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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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리스트 강석진

본지는 이번주부터 월요일 정기 연재물 '황령산 칼럼' 필진을 개편 보강했습니다. 여기에는 기존의 박기철, 양혜승 님 이외에 강석진, 정인, 최원열, 손동우 님이 새롭게 참여합니다.

이번주 기고자 '강석진' 칼럼니스트는 서울대 정치학과, 동 대학원을 졸업한 뒤 언론계에 투신, 서울신문 정치부, 국제부, 사회부 기자를 거쳤으며, 주일 특파원, 편집국장을 역임했습니다. 2012년 서울신문사를 퇴사, 현재 을지대 외래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공중파, 종편 등 방송에 패널로도 활약하고 있으며, 역서로는 <저항과 극복의 길림길에서- 재일동포의 정체성, 그 역사와 현재 그리고 미래(2005년 지식산업사)> 등이 있습니다.

칼럼리스트 강석진

안희정, 박근혜, 이명박, 고은의 공통점은? 크든 작든 ‘제왕’으로 군림했지만 약점투성이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자신들의 영역에서 거칠 것 없었지만 영역을 벗어나 정상 사회로 나오면 금이 간 유리그릇처럼 약한 존재였다.

한국 사회는 형식적 민주주의를 자랑하지만 그 그늘에서는 제왕을 키우는 사회다. 정치, 경제, 기업, 문화, 법조, 언론, 학계 곳곳에 제왕들이 군림한다.

제왕들은 권력과 영향력이 무척 세다. 무소불위의 힘을 갖고 있다. 그 진영, 그 영역 안에선 거의 모든 사람들이 허리를 꺾는다. 권력자는 영향권 안에 있는 자들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파워를 갖고 있고, 행사한다. 권력은 고속으로 돌아가는 전기 톱날 같아, 누군가 조심하지 않는다면 자칫 스치기만 해도 큰 상처를 입는다. ‘제왕’들은 상대가 예쁘게 여겨지면 힘을 나눠주고 자리를 배분하며, 때로 두툼한 봉투나 기회로 ‘성은’을 내린다.

정치권의 이야기지만, 보수든 진보든 진영 안에서 보스를 ‘주군’이라고 부르는 예는 드물지 않다. 주어가 주군이 되면 서술어는 극존칭이 된다. 주군이 목적어가 되면 서술어는 백화점 직원이 VIP 손님 대할 때보다 더 공손한 말이 붙게 된다.

견제와 균형, 쓴소리 따위는 점점 약해진다. 권력은 늘 옳거나 깊은 뜻이 있다고 여겨지게 된다. 그리하여 나중에는 구성원들의 생각마저 지배하는 힘을 갖게 되어 간다.

봉건 왕조 시대에는 제왕들이 천수를 누리며 권력을 누렸다. 하지만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제왕들은 몇 가지 문제에 부딪힌다. 민주주의 하에서 제왕들은 겉으로는 강하지만 안으로는 약하다. 권력이 강하기 때문에 약점이 생긴다. 아니 스스로 약점을 키운다.

우선 잘못된 일을 내부에서 걸러내기 어렵게 된다. 부정한 돈, 불법 부당한 권력의 행사, 추행, 폭행 등이 소리없이 쌓여 나간다. 때로 그런 것들이 조직을 움직여 나가는 윤활유처럼, 낭만처럼, 큰 목표에 비해 작은 실수 정도로 여겨지지만 쌓이고 쌓이다 보면 경사면에서 쌓인 눈처럼 사태를 일으키게 된다.

권력은 진실을 숨긴다. 정보가 흐르지 않으면 사회 구성원들은 인식을 형성하기 어렵고, 진실이 숨겨지면 피드백이 이뤄지지 않는다. 그러나 숨겨진 진실은 어둠 속에서 가시나무처럼 자란다.

이것이 이른바 민주화 30년을 노래하다가 대통령 탄핵 1년을 지나고, 미투 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한국 사회의 일그러진 자화상이다. 물론 한국 사회의 준수한 모습도 있다. 권력은 영원하지 않다. 임기가 있거나 SNS를 통해 용기를 내는 사람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대형 이슈들이 폭포수처럼 떨어져 내리고 있다. ‘한국은 과연 다이나믹 코리아’라는 자조적인 말이 사이버 공간에서 유행한다. 이슈 하나하나 중요하다고 생각되지만 늘 그렇듯이 남비처럼 끓다가 식어가지 않을까 우려된다.

나는 우리가 제왕 문화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한꺼번에 고쳐지지 않겠지만 할 수 있는 것부터라도 고쳐야 한다. 그래서 주목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개헌 이슈다.

이번 개헌은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처음으로 민주 사회에서의 개헌이다. 지금까지의 개헌은 독재 하에서의 개헌이거나, 민주주의가 상당 기간 운영되지 못한 상태에서의 급한 개헌이었다. 이번이 실질적으로는 민주사회에서 이뤄지는 첫 개헌이라고 할 수 있다.

30년 전 민주 사회로의 길을 연 헌법인데 왜 고치려 하는가? 30년 간 운영해 보니 여러 문제들이 드러났고, 미래 사회로 가기 위해서는 틀을 바꿔야 한다는 컨센서스 때문이다.

컨센서스의 내용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제왕적 대통령제를 손봐야 한다는 것이다. 제왕 가운데 으뜸이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대통령의 권한은 광대무변이다. 대통령은 정부와 여당을 장악하는 데서 나아가, 공기업을 장악하고, 지방자치단체, 국립대를 크게 좌우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예산권과 인사권이 미치는 범위는 사방팔방 지평선이 보이는 벌판처럼 아득하게 넓다. 순수 대통령제인 미국에서는 감사원이 의회 소속이지만 한국에서는 대통령 밑에 있다. 감사원은 공무원 사회에서 거의 저승사자급 위력을 가진 기관이다. 정부가 주식을 갖고 있지 않은 대기업 예를 들어 포스코나 시중은행의 인사에도 큰 힘을 발휘한다. 짐작할 수 있겠지만 이런 기관과 조직을 장악하면 2차 3차로 젖과 꿀이 흐르는 그 주변과 하부 조직에 사람들을 심을 수 있거나 이권에 접근할 수 있게 된다.

언론의 독립성과 공정성은 민주주의의 핵심 요소다. 한국의 대통령은 주요 언론인 공영방송과 통신사, 서울신문사의 이사진을 장악하고 사장을 임명할 수 있다. 방송과 통신의 이사진을 여당 다수 야당 소수로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민 사회의 각 부분의 자율성이 높아지고 제왕의 문화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권한 남용, 부정부패, 여성 인권 유린 등 대형 이슈들이 되풀이될 가능성이 크다.

개헌을 앞두고 여당에서는 대통령의 권한에는 가급적 손을 대려 하지 않는다. 4년 중임제 정도로만 손을 보려 한다. 심지어 문재인 대통령은 국회가 머뭇거린다면 정부가 개헌안을 발의하겠다고 말한다. 정부쪽 개헌안 마련 기구인 국민헌법자문특별위원회는 2018년 3월 13일 문 대통령에게 정부 개헌안을 공식 보고하겠다고 한다. 정해구 위원장은 대통령이 3월 20일쯤 발의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야당 시절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이야기하던 여당은 제왕적 대통령이란 표현도 내켜하지 않는다. 문 대통령이 제왕적 대통령이 아니라는 것이다. 문 대통령이 선의의 권력자라는 생각이 밑바탕에 깔려 있는 듯하다. 하지만 제도를 그대로 두면 선의를 갖지 않은 권력자가 등장한다면 반드시 제왕은 부활한다.

헌법을 개정하면 대통령 임기 조항을 빼고는 바로 적용되어야 하는데 그래서 거의 모든 정권이 대통령의 권한을 줄이는 개헌에 소극적이었다. 이런 논리라면 영원히 개헌을 하기 어렵게 된다.

대통령과 국회, 정당, 주요 정치인이 제왕으로 남아 있는 한 이들은 내부적으로 약점을 키워나갈 우려가 상존한다. 그 피해는 국민에게 돌아온다. 우선 제왕들의 흉측한 모습을 보는 게 피곤하고, 그들의 비합리적 결정들이 나라와 해당 분야의 발전에 장애물이 되고, 돈이 새고,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의 비용을 치러야 한다.

제왕적 대통령제를 혁파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담지 않은 개헌은 아무리 미사여구로 치장해도 아니 하느니만 못한 대국민 기만극이다. ‘제왕’과 ‘제왕을 낳는 제도’, ‘일그러진 우리들의 제왕이 활개 칠 수 있도록 만드는 사회 문화’의 극복이 시대적 소명이다.

칼럼니스트 강석진 reporter1@civic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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