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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이미지가 아니고, 외교는 환상이 아니다...미투, 성폭력, 남북, 북미 정상회담의 과도한 ’미디어화’를 우려한다

기사승인 2018.03.09  23:4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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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행인 정태철

발행인 정태철

세상의 모든 길은 미디어로 통한다. 카톡 안하는 사람 없고, 인터넷 홈페이지 없는 교회 없으며, 페이스북 페이지 없는 기업 없고, 트위터 안 하는 정치인 없으며, 인스타그램 안 하는 연예인 없다. 인간의 모든 행동과 말, 슬픔과 환희가 각종 최첨단 미디어에 의해 소통되고 있다. 이를 학자들은 ‘사회의 미디어화(mediatization)’라고 한다.

사회의 미디어화 요지는 미디어가 세상 구석구석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미디어가 세계 변화의 원동력이라는 맥루한의 ‘미디어 결정론’이 이렇게 현실화되고 있다. ‘프리센’과 ‘허그’란 학자는 금세기를 ‘미디어적 전환(mediatic turn)’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세상이 온통 미디어를 중심으로 변하고 있다는 의미다.

사회의 미디어화 중, ‘정치의 미디어화’가 문제다. 정치의 미디어화란 정치인들이 미디어가 어떤 방식(룰)에 따라서 무엇을, 언제, 어떻게 보도하는지를 잘 보고 거기에 맞춰서 정치 활동을 하는 것을 말한다. 정치인들이 ‘미디어의 룰’ 내지는 ‘미디어 논리’에 종속되는 것이다.

페이스북의 '좋아요'를 풍자한 로고(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안희정 전 지사가 3월 8일 기자회견을 한다고 했다가 돌연 취소했다. 그 날이 하필 여성들의 권리를 보호하자는 '세계 여성의 날'이었기 때문에 기자회견을 취소했다는 얘기가 시중에 나돌았다. 그러더니 9일 검찰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안 전 지사가 검찰에 불쑥 소위 ‘셀프 출두’했다. 사람들은 그날이 북미 정상회담 성사가 발표된 날이어서 사람들 시선이 그리 쏠릴 것을 예견하고 안 씨가 검찰로 달려갔을 거란 얘기가 다시 돌았다.

3월 9일 검찰에 출두한 안희정 전 충남 지사(사진: 채널A TV 직접 촬영, 독자 제공)

정치인들이 정책을 발표할 때는 국민에게 가는 혜택보다는 미디어 반응을 더 중시한다. 정치인들이 약이라고 국민에게 주는 정책은 실제로는 해롭지 않은 증류수를 주는 격인 경우가 많다. 이런 정치를 ‘플라시보 정치’ 혹은 유사 정치라고 한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선거철만 되면 평소에 가지 않던 시장 국밥집을 가고, 일선 소방서를 방문하며, 노인병원에서 어설픈 봉사활동을 흉내내고, 안전모를 쓰고 공사장을 누빈다. 서민과 가까이 한다는 이미지를 위해서 그런다. 단, 그들의 액션은 TV 카메라가 돌아야 시작된다.

언제부터인지 연예인 뺨치는 정치인 팬클럽도 생기기 시작했다. 아이돌 팬덤 문화를 연상케 하는 박사모, 노사모, 달빛기사단이 주군 모시듯 지지하는 정치인을 위하고 있다. 안희정 전 지사에게도 ‘팀스틸버그’란 팬클럽이 있었던 사실이 이번에 드러났다.

정치의 미디어화는 미국이 원조다. 호인달변가, 즉 TV형 인물이 미국 대통령이 될 확률이 높다. 1960년, 젊고 핸섬하며 토론에 능숙한 케네디가 늙고 창백한 얼굴을 가진 닉슨을 제치고 대통령이 된 것은 최초로 컬러 TV로 생방송된 대통령 토론회 덕이었다. 이를 두고, 미국 대통령 선거는 대통령으로서의 능력을 보고 선출하는 게 아니라 짧은 시간에 재치 있게 어려운 질문에 대답 잘하는 퀴즈의 달인 같은 이미지를 갖는 인물을 뽑는 거라는 비판도 있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아예 배우 출신이었다. 공군1호기에서 내려 의장대에 거수경례하는 레이건의 모습은 남우주연급 연기였다. 그의 연설은 늘 “내 친애하는 친구 미국인 여러분(My Fellow Americans!)”으로 시작됐는데, 1984년 당시 학원에서 나에게 영어를 가르쳐주던 중년의 미국인 여 선생은 레이건의 정책이 아니라 “레이건의 목소리가 정말 끝내준다”고 레이건 지지 이유를 밝히곤 했다.

레이건 대통령(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1962년 미국의 역사학자 다니엘 부어스틴이 쓴 <이미지(The Image)>라는 책은 미국 정치의 이미지화를 최초로 지적한 역저(力著)다. 그는 미국 정치는 국민들에게 멋지게 보이기 위한 정치인들의 미디어 이벤트(언론 플에이)로 가득 찼다고 했다. 그는 대통령의 기자회견도 미디어에 잘 보이기 위해 고도로 연출된 사건이며, 진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가짜도 아닌 ‘유사 사건(pseudo event)’이라고 했다. 미국의 평론가 조지 윌은 <이미지>의 후기를 통해서 부어스틴의 <이미지> 책은 미국 미디어의 뉴스 뒤의 숨은 의도와 계산을 보여 주며, 정치라는 무대 뒤의 로프와 도르래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미국 정치의 고백서라고 평했다.

나는 이 책을 2004년 번역해서 <이미지와 환상>이란 책으로 출간했다. 미국 친구 도노반 박사가 나에게 이 책을 선물하면서 “한국도 이제는 이미지가 문제 될 때가 됐다”고 말했다. 당시 나는 그게 무슨 의미인 줄 몰랐다. 이제는 우리나라도 정치가 미디어화됐고, 미디어는 이미지로 가득 찼다. 우리 대통령 기자회견장에 잔잔한 유행가가 배경으로 깔리기도 하고, 정치인들이 예능 프로에 출연하기도 한다. 정치인 정봉주 씨가 모처럼 기자들을 불러놓고 서울시장 후보 출마선언이라는 미디어 이벤트를 준비했는데, 그만 성추문으로 취소되기도 했다. 어느새 우리 정치인들도 아무 색이나 넥타이를 함부로 매지 않는다. 카메라를 의식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우리 정치도 ‘미디어가 이끄는 민주주의(media-driven democracy)’가 됐다.

이런 정치의 미디어화, 미디어의 이미지화 현상에서 우리가 놓치는 게 있다. 정치인의 이미지는 정치인의 그림자다. 본질이 아니다. 정치인의 이미지는 의도적으로 만든 것이다. 정치인의 민낯이 아니다. 정치인의 연출된 이미지는 우리와 정치인을 단절시킨다. 우리는 단 한 번도 직접 본 적이 없고 대화를 나눠 본 적도 없는 정치인을 TV에서 본 이미지를 보고 선택한다. 미디어는 정치를 지배하면서 정치인들의 이미지를 옮겨주고 그 대가로 돈을 벌었다. 고은, 이은택, 조민기, 안희정, 조재현, 박재동, 정봉주를 스타로 만든 것도 미디어였다.

미디어 중 가짜뉴스를 남발하는 각종 SNS는 믿을 수 없다고 치자. 그러나 전통적으로 신뢰를 받던 주류 미디어들은 이들 정치,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참모습을 낙종(落種)했다. 주류 미디어들은 힘이 있고 취재력 있음에도 뉴스 뒤에 감춰진 스타들의 추한 모습을 국민들에게 사건 터지기 전에 보여주는 데 실패했다. 제법 실력 있는 탐사보도 프로그램도 가지고 있는데 말이다. 기자들은 사석에서 정치인들의 꽤 재미있는 뒷얘기를 전하곤 한다. 내 기억에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성폭력 사태와 다를 바 없는 비인격적 사례들도 그 안에 많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하나도 보도되지 않았다. 남자의 바지 아랫도리는 건드는 게 아니라는 말도 나돌았다. 지금 생각하면, 정치화된 미디어, 이미지를 옮겨준 미디어도 성폭력 사태에 책임이 있다.

이제 남북, 북미 정상회담이 다가온다. 정치는 이미지가 아니다. 외교는 환상이 아니다. 미디어는 본질을 취재하고, 실체를 찾아야 한다. 거기에는 진영논리도 없어야한다.

독일에 있는 김정은과 트럼프 그라피티(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영화 <스포트라이트>에서 천주교 사제들의 아동 성폭행 문제를 파헤친 보스턴 글로브 지 편집국장은 “우리는 시스템을 고발해야 한다. 한두 건 신부의 성범죄를 보도하는 것으로 만족하면 안된다”고 말한다. 세상은 점점 더 미디어화해 가는데, 언론의 힘은 도처에 퍼져 있는데, 우리 미디어는 진작 중요한 일을 놓쳤다.

발행인 정태철 reporter1@civic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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