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 만에 고향에 돌아오는 윤이상, 이젠 ‘상처받은 용’을 껴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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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만에 고향에 돌아오는 윤이상, 이젠 ‘상처받은 용’을 껴안을 때
  • 편집국장 강동수
  • 승인 2018.02.20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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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수 자투리시사인문(33) 유해 귀환으로 되짚어보는 현대음악 거장 윤이상의 삶과 생각

1.

편집국장 강동수

작곡가 윤이상(1917~1995)은 한국이 낳은 세계 음악계의 기린아이지만 우리는 그에게 빚이 많다. 그는 세계 현대음악의 5대 거장에 꼽히는 인물이다. 그런데 조국은 일찍이 그를 내쳤다. 1967년 ‘동백림사건’에 연루돼 2년간의 징역을 살다 1969년 독일로 되돌아 간 이후 그는 평생 고향에 돌아오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23년 전 만리이역 독일에서 세상을 떠나 베를린의 묘지에 묻혔다.

윤이상의 유해가 그가 평생 그렸던 고향 통영으로 돌아온다. 엊그제 여러 언론 매체는 윤이상의 귀환을 일제히 보도했다. 그 보도들을 종합하면, 오는 23일 오전 11시(현지 시각) 독일 베를린시는 가토우 공원묘지에 있는 그의 유해 이장 행사를 개최한다고 한다. 그리고 오는 25일께 유해가 한국에 도착할 것으로 알려졌다. 유족들은 약 한 달 동안 유해를 따로 보관하다가 내달 30일 통영국제음악제 개막에 맞춰 열리는 이장식을 거쳐 유해를 묻을 것이라고 한다. ‘통영 바다를 보고 싶다’는 생전 뜻에 따라 그의 묘소는 통영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통영국제음악당 인근 공터에 마련된다.

베를린의 윤이상 묘소(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이제야 윤이상이 오랜 방랑을 끝내고 고향에 돌아와 영면할 것이라니 한편으로는 안도하게 되면서도 그 동안 그에게 왜 그렇게 모질었던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미안하기도 하다.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뒤 그에게 귀국의 조건으로 준법서약서를 요구했을 때 그는 고향에 되돌아 오겠다는 소박한 꿈을 접었다.

‘윤이상 귀향 프로젝트’는 ‘탄생 100주년’을 맞은 지난해 여름께부터 시작됐다. 통영시가 본격적으로 베를린시에 의사를 타진했고 올해 초엔 통영에 살고 있는 윤이상의 부인 이수자 씨가 독일어로 직접 쓴 편지를 베를린시에 보냈다고 한다. “나이가 구순이 넘었는데 생전에 고향인 통영 땅에 묻히고 싶어 했던 남편과 함께 했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지난해 7월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독일을 방문한 김정숙 여사는 그 묘소 옆에 통영에서 가지고 온 동백나무를 심었다. 여러 단체와 유족들의 노력 끝에 현대음악의 거장은 이제야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 셈이다.

 

2.

윤이상의 음악적 이력은 다채롭다. 1917년생이니 그를 간첩이라며 감옥에 가둔 박정희와 공교롭게도 동갑인 셈인데 경남 산청에서 태어난 그는 4세 때 통영으로 이사를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보통학교를 마쳤다. 서울로 올라와 학교를 다니면서 음악이론과 화성학을 배우고,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음악학교에서 2년간 작곡과 첼로를 전공했다. 해방 후에는 통영여고와 부산사범학교, 부산고등학교의 교사를 지냈다. 1953년 서울로 옮겨 여러 대학에서 작곡을 가르치며 <7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 <현악4중주 1번>. <피아노 3중주> 등을 작곡했다. 서울시문화상을 받은 것도 그 무렵이었다.

윤이상이 39세의 늦깎이로 유학길에 오른 것은 1956년. 파리의 고등음악원을 거쳐 1년 뒤 베를린음대로 옮긴 그는 1959년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12음계 기법에 한국의 정악 색채를 담은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을 발표한다. 이 작품이 주목을 받은 덕에 그는 현대 음악계의 선두 그룹인 존 케이지, 피에르 블레 등과 교유하며 서구 현대음악계에 진입했다. 윤이상은 이후 관현악곡 <바라>가 베를린라디오방송교향악단에서 초연되는가 하면 <예악>, <낙양> 등을 발표하며 유럽에서 입지를 넓혀갔다. 1965년엔 오라토리오 <오! 연꽃 속의 진주여>를 하노버에서 초연하기도 했다.

동양에서 온 재능 있는 작곡가로 탄탄한 입지를 다져가던 윤이상이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된 것은 1967년 6월. 이른바 ‘동백림(당시 동독의 수도인 동베를린의 한자식 이름)사건’에 연루돼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베를린에서 비밀리에 체포돼 한국으로 끌려오면서부터였다. 그 4년 전인 1963년 4월 아내와 함께 북한을 방문, 김일성을 만난 사실이 한국 정보 당국에 포착된 것.

중앙정보부는 1967년 7월 8일부터 17일까지 7차에 걸쳐 ‘동백림을 거점으로 한 북괴 대남 적화 공작단’에 대한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중앙정보부는 “문화예술계의 윤이상·이응로, 학계의 황성모·임석진 등 194명이 대남 적화공작을 벌이다 적발되었다”고 발표했다. 중앙정보부의 발표에 따르면, 사건 관계자들은 1958년 9월부터 동백림 소재 북한대사관을 왕래하면서 이적(利敵)활동을 한 데 이어 일부는 입북 또는 노동당에 입당하고 국내에 잠입하여 간첩활동을 해왔다는 것이다. 법원은 사형 2명을 포함한 실형 15명, 집행유예 15명, 선고유예 1명, 형 면제 3명을 선고했다. 윤이상은 1심 무기징역, 2심 15년형을 거쳐 대법원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중앙정보부의 발표와 달리 동백림사건 관련자 중 실제로 한국에 돌아와서 간첩행위를 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는 게 정설이다. 당시 동·서베를린은 상당 수준 자유왕래가 이루어졌는데 동베를린의 식료품이나 책값이 싸서 출입하는 한국인들이 적지 않았다고. 그 과정에서 이들이 북한공작원과 접촉하기도 했다는 거다. 윤이상이 북한에 다녀온 것은 분단국에서 서구로 옮긴 지식인으로서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에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중앙정보부는 대규모 간첩단이라며 무려 203명의 관련자들을 조사했지만, 실제 검찰에 송치한 사람 중 검찰이 간첩죄나 간첩미수죄를 적용한 것은 23명에 불과했다. 더구나 실제 최종심에서 간첩죄가 인정된 사람은 1명도 없었다. 결국 이 사건 수사가 강제연행과 고문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

독일 등과 ‘범죄인 인도조약’도 맺지 않은 상태에서 박정희 정권이 중앙정보부 요원들을 파견해 유학생과 교민들을 납치하다시피 강제 연행한 것은 심각한 외교적 마찰을 불러 일으켰다. 서독과 프랑스 정부는 영토주권의 침해라고 한국 정부에 강력히 항의하고 원상회복을 요구했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등 세계적인 음악가 161명이 한국 정부에 석방 탄원서를 보내기도 했다. 윤이상은 1년 8개월 동안 감옥과 병원에 갇혀 있다가 1969년 2월 대통령 특사로 풀려나 서독으로 되돌아갔다. 박정희 정권은 1970년 광복절을 기해 사건 관계자에 대한 잔여 형기 집행을 면제했고 사형수 2명까지 모두 석방했다.

‘국정원 과거사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2006년 1월 26일에 당시 정부가 단순 대북접촉과 동조행위를 두고 국가보안법과 형법상의 간첩죄를 무리하게 적용해 사건의 외연과 범죄사실을 확대·과장했다고 밝힌 바 있다. 또한 사건조사 과정에서의 불법 연행과 가혹행위 등에 대해 사과할 것도 정부에 권고했다.

자신의 말대로 “인간으로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분노의 사건”을 겪고 독일로 되돌아간 윤이상은 그 분노를 음악으로 승화한다. 감옥에서 작곡한 오페라 <나비의 꿈>을 발표했고 1972년엔 오페라 <심청>을 발표해 유럽 음악계의 격찬을 받았다. 서베를린예술원 회원으로 선임됐으며, 1977년엔 베를린예술대학의 정교수로 임용되기도 했다.

1983년부터 1987년까지는 매년 1편씩 총 5편의 교향곡을 발표했다. 1977년부터 1987년까지 베를린음대 교수를 역임했으며, 1985년 튀빙엔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칼문화상(1970), 독일연방공화국 대공로훈장(1988), 함부르크 자유예술원 공로상(1992), 괴테상(1995) 등도 수상했다.

그는 또 1980년 광주의 참상을 그린 교향시 <광주여 영원히!>를 작곡해 1981년 5월 독일 쾰른에서 초연했다. 민족의 통일을 그린 칸타타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를 작곡해 1987년 10월 5일 북한에서 초연했다. 이 작품은 군사독재 정권에 박해받던 시인 김남주, 문익환, 고은, 백기완 등의 민족시 11편을 골라 4개의 주제로 나눠 민족의 아픔과 통일에 대한 염원을 담은 곡. 1994년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분신한 사람들의 넋을 추도한 교향시 <화염에 휩싸인 천사와 에필로그>를 작곡하는 등 1995년 타계할 때까지 150여 곡을 작곡했다.

 

3.

서양에 동양 정신의 정수를 일깨운 공로로 윤이상의 음악은 일찍부터 서양 음악계에 널리 알려졌다. 20세기 후반 서양의 창작 음악계가 새로운 물결을 타기 시작했을 때 독특한 음악세계를 구현한 한국의 작곡가가 바로 윤이상이었던 것. 윤이상에 대한 유럽 음악계의 일반적인 인식은 ‘동양의 사상과 음악기법을 서양음악 어법과 결합시켜 완벽하게 표현한 최초의 작곡가’라는 것. 40세가 넘어 유럽 창작음악계에 등단한 윤이상은 쇤베르크의 ‘제2 빈 악파’를 이어 메시앙, 리케티, 펜데레츠키의 반열에 올라서면서 자신만의 고유 언어를 구사했다.

윤이상 기념공원 내부 모습(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전문가들에 따르면, 윤이상의 핵심 음악기법은 ‘주요음 기법(Haupttontechnik)’ 또는 ‘주요 음향 기법(Hauptklangtechnik)’이라는 용어로 설명된다. 훗날 독일의 음악학자들이 명명한 이 기법은 그가 베를린 음대를 졸업하면서 1959년에 출품한 작품 〈피아노를 위한 다섯 개의 소품〉과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에서 이미 그 단초를 보였다.

그는 1988년 독일로 건너간 한길사 대표 김언호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발언했다. “나의 음악예술이 도교사상 또는 동양정신에 토대를 둔다는 것, 동양인 또는 한국인으로서 생득적으로 갖고 있는 이런 정신적 유산 또는 토대는 오늘의 세계와 인류, 조국과 민족이 당면하는 문제와 결코 유리될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4.

윤이상의 방북 활동은 후일 많은 논란을 낳은 게 사실이다. 그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윤이상이 북한 공작원이라는 주장을 굽히고 있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는 1971년 독일로 귀화한 후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투신하면서 급속히 북한 쪽으로 기울었다. 기회가 닿을 때마다 북한을 방문했다. 한국 정보기관에 따르면, 1963년부터 1991년 10월까지 17차례나 입북했다고 한다. 북한은 1984년 평양에 윤이상음악연구소를 개관하고 1990년 윤이상관현악단을 창단했다. 조선로동당출판사가 2000년 간행한 김일성 교시집 ‘재 서독 교포 윤이상 일행과 한 담화’ 등에 따르면, 김일성은 윤이상을 ‘조국 통일을 실현하기 위하여 활동하는 애국지사’로 격찬했다고도 한다.

윤이상기념공원에 전시된 여권 등 윤이상 유품들(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어떤 이에겐 친북활동이라고도 받아들여지는 방북 활동을 한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이었을까. 아무래도 ‘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투옥된 것이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로서는 투옥 사건이 분단된 조국의 현실을 뼈에 사무치게 깨닫게 된 계기가 됐던 것. 앞에서 소개한 김언호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동베를린사건 이전에는 나는 동양의 음악가로 동양적 정신, 동양적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심미적 작품을 쓴 것이 사실입니다. 지식인적인 예술행동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나는 해방 전에도 항일운동을 하다가 투옥된 적도 있고 해방 직후에도 조국과 민족을 위해 나선 바 있습니다. 나는 민족과 나라를 위해 내 개인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늘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나 동베를린사건이라는 개인적·집단적 체험은 민족문제·분단문제를 더욱 구조적이고도 깊이, 온몸으로 생각하고 실천하고, 작품으로 그것을 형상화시켜야 한다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도 말했다. “가난한 조국에서 태어난 한 예술가로서 조국의 민주화와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그리고 분단된 국토와 조국을 통일하는 일에 나서는 것은 한 예술가로서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더 나아가 전 세계 특히 제3세계의 수난 받는 민중에 대한 관심도 역시 당연한 일입니다.”

그는 유럽에서 활동하면서 독일 통일의 과정을 현장에서 지켜본 사람이다. 그런 만큼 남북통일을 위한 디딤돌 역할을 꿈꾸지 않았을까. 1988년 7월 7일 남북음악제전의 개최를 제의한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고, 1990년 10월 평양에서 개최된 ‘범민족통일음악제’의 준비위원장으로서 남북한 합동공연을 성사시킨 것도 통일에 대한 나름의 열망 때문이었을 터다.

 

5.

널리 알려진 대로 윤이상은 <생의 한 가운데>등으로 널리 알려진 독일 작가 루이제 린저와 오랜 교분을 맺었다. 루이제 린저는 윤이상과의 인터뷰를 거쳐 <윤이상, 상처 입은 용>이란 책을 통해 윤이상의 음악과 생애에 대한 전모를 대담 형식으로 풀어냈다. 루이제 린저는 음악가인 두 남편을 두었고 반나치 활동으로 투옥 경험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윤이상과 유사한 삶의 과정을 겪어왔다. 또 윤이상과는 개인적 친분이 있는 친구 사이여서 그녀의 붓끝에서 살아나는 윤이상의 모습은 단순한 음악가로서의 면모나 정치활동 같은 피상적 지점에 머물지 않고 인간적인 내면의 울림과 철학, 예술의 가치까지 함께 생각하게 만드는 깊이를 지니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윤이상은 루이제 린저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자신의 삶과 내면을 진솔하게 드러낸다. 그는 루이제 린저의 질문에 현대음악사와 동양철학과 한국 역사와 세계사적 비전 등을 막힘없이 종횡무진 풀어낸다.

그는 린저와의 대담의 어느 갈피에서 이런 말을 한다. “기본적으로 내 경우에는 예술과 정치는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그저 음악가이고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며 그리고 음악가에게 정치란 직접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음악가인 나에게는 단 하나의 목표밖에 없습니다. 즉 내 예술적 양심에 따라서 의식의 순수성과 광대한 차원을 향한 고도의 요구를 추구하는 것입니다.(…)위기가 닥치면 예술가도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이므로, 만인을 위해 무슨 일인가를 해야만 하고, 따라서 정치에 도움이 되기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단기간의 임무일 수밖에 없습니다. 역사의 광대한 발걸음에 영향을 줄 수는 없고, 아주 일부만을 바꿀 수 있을 뿐입니다.”

현대음악의 거장이자 통일운동가였던 윤이상이 유해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다. 1956년 파리로 유학을 떠난 지 62년, 동백림 사건으로 잡혀왔다 풀려난 지 49년 만의 귀환이다. 생전에 베를린에서 그는 고향을 그리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하루 한 시간도 내 조국 내 고향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내 민족 성원들 속에 나는 서 있습니다. 짐승도 죽을 때 제 집으로 돌아가는데, 내 조상들이 살았고, 위대한 우리 조상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내 땅에 묻히는 것이 나의 희망입니다. 고향 땅에서 여생을 보내는 것이 나의 간절한 염원입니다.”

만년의 윤이상의 염원을 한마디로 압축하자면 ‘수구초심(首丘初心)’이겠다. 글쎄, 이제는 그를 둘러싼 이런저런 논란을 끝내고 ‘상처 입은 용’을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평생을 외국에서 떠돈 우리 시대의 거장이 이젠 꿈에도 그리던 고향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도록 마음을 모아야 할 때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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