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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로 일궈낸 민주주의가 보수 정권의 공(功)이라고? “택도 없는 소리!”

기사승인 2018.01.17  17:4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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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설주간 강성보

논설주간 강성보

며칠 전 좀 ‘특별한 곳’에서 영화 <1987>을 봤다. 여기서 특별하다고 한 것은 관람 장소가 한국 영화관이 아니라 미국이기 때문이다. 조지아주 어틀랜타 시 교외 슈가로프에 있는 대형 마트 내 멀티플렉스였다. 딸네 집 방문차 어틀랜타에 며칠 머무는 도중 시간이 나서 딸아이하고 이곳 영화관을 찾았다.

CGV, 롯데시네마 등 한국의 멀티플렉스와 비슷했다. 티켓을 사서 들어가니 팝콘과 콜라를 파는 매대가 있었다. (10달러 내고 콜라 2개, 팝콘 1개를 샀는데 너무 양이 많아 둘이서 2시간 내내 먹고서도 반 이상을 남겼다.) 상영관에 입장하니 약 300여 석의 좌석 중 200여 석이 차 있었다. 관객 대부분은 한국 사람인 듯 동양인의 모습이었지만, 흑인과 백인 커플들도 몇몇 눈에 띄었다.

과연 이들이 이 영화를 이해할 만큼 한국 현대사를 알고 있을지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요즘 미국인들 사이에 한국 영화가 완성도 높다는 평판이 자자해 헐리우드 영화에 버금가는 인기를 끌고 있다”는 딸아이의 대답이 돌아왔다. 역사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한국 영화 팬이라면 영화의 플롯 그 자체와 배우들의 완숙한 연기로 몰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도 <1987>은 최근 잇달아 발표된 완성도 높은 한국 영화의 대열에 낄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플롯이나 네러티브, 탑스타들의 완숙한 연기력, 그리고 미장센까지 어디 하나 흠잡을 데가 없다는 게 필자의 판단이다. 특히 역사적 팩트에 충실해 거의 ‘세미 다큐멘터리’에 가깝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한열 열사로 짐작케 하는 ‘잘 생긴 연세대 학생’ 역의 강동원과 교도관의 조카 ‘연희’ 역의 김태리 간의 짧은 로맨스 정도가 픽션 냄새를 낼 뿐 나머지 플롯은 거의가 사실 관계를 근거로 한 것으로 느껴졌다.

중앙 언론사 기자로 대한민국의 1987년을 온몸으로 겪은 필자에게 특히 영화 <1987>이 주는 사실감은 각별했다. 기억의 창고 깊숙이 감춰져 있던 당시의 장면들이 마치 낡은 슬라이드 필름처럼 뇌리 전면에 하나 둘 떠올랐다. 1987년 필자는 경향신문 국제부 기자였다. 영화에 나오는 신성호, 윤상삼 기자와 같은 사회부 소속이 아니었기 때문에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현장 한가운데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편집국 일원으로서 현장의 숨막히는 기운을 최전선에서 그들과 함께하고 있었다.

영화 <1987> 제작보고회가 2017년 11월 22일 오전 서울 강남구 CGV 압구정점에서 열린 가운데, 배우 박희순과 하정우, 김윤석, 장준환 감독, 김태리, 유해진, 이희준(왼쪽부터)이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사진: 더 팩트 제공).

그해 정초 1월 15일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제목의 중앙일보 사회면 2단 기사가 터졌을 때만 해도 별다른 주목을 받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이튿날 동아일보 사회면에 박종철 군이 경찰 물고문에 의해 사망했다는 기사가 톱으로 게재되면서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는 느낌이 강하게 다가왔다. 편집국 제작진 회의가 연일 장시간 진행됐다. 경찰의 고문 사실을 낱낱이 보도하자는 일선 기자들과 정권의 눈치를 보느라 이를 제어하는 간부들 사이에 고성이 오고갔다. 일부 기자들은 거칠게 저항했으나, 데스크들의 현실론이 당시엔 더 우세했다. (역사의 최전선에서 한걸음 물러서 있었다는 이 자괴감 때문에 경향신문은 그해 여름 6월항쟁 이후 언론사 중 가장 먼저 ‘기자협의회’를 결성, 언론자유를 주창하게 된다.)

그해 6월 어느날, 필자는 서울의 거리를 가득 메웠던 이른바 넥타이 부대의 일원이었다.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연희가 나섰던 바로 그 서소문 거리에서, 기자가 아니라 하나의 시민으로 시위대에 참여했다. 경찰이 쏘는 페퍼포그, 최류탄의 매운 맛을 견디지 못하고 인근 약국으로 튀쳐 들어가 한동안 몸을 숨겼던 기억이 난다.

이낙연 총리가 얼마 전 지지자들과 영화를 본 뒤 당시 동아일보 국제부장이던 자신도 시위대에 참여했던 것을 회고한 적 있다. 이 총리는 “시청 앞에서 시위에 참여했다가 최루탄을 못견딘 나머지 플라자 호텔로 튀쳐들어가 겨우 숨을 돌이킬수 있었다”고 말했다. 같은 날이었다면 이총리와 필자가 최루탄 세례를 받았던 지점이 비슷하지 않았나 싶다.

이 총리는 또 영화에서 나오는 윤상삼 기자(이희준 扮)가 자신의 도쿄 특파원 후배였다며 인연을 강조했다. 필자 역시 1990년대 중반 경향신문 도쿄 특파원으로 있을 때 윤 기자가 동아일보 신참 특파원으로 부임하는 것을 맞이한 적 있다. 도쿄의 한 이자카야에서 가진 특파원 모임을 통해 윤 기자의 1987년 활약에 찬사를 던진 뒤 당시의 경위와 심정을 물었더니 “그냥 진실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는 간략한 대답이 돌아왔다. 윤 기자는 3년 뒤 간암 말기 진단을 받고 사망했다. 향년 42세였다. 그의 빈소에서 묵상을 하고 미인박명(美人薄命)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박종철 군 고문 치사 사건으로 만천하에 드러난 당국의 가혹한 고문 실태를 다룬 동아일보 1987년 5월 18일자 기획 기사(사진: 동아일보 뉴스 라이브러리 캡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터진 몇 년 뒤, 치안본부 출입기자였던 필자는 기자단의 일원으로 남영동 대공분실을 시찰한 적이 있다.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대사건 이후 그곳은 대공 혐의자를 취조하는 기능은 없어졌지만 음침하고 위압적인 느낌은 여전했다. 물고문의 현장은 보존되어 있었는데, 각 취조실마다 물빠진 욕조가 덩그렇게 버려져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또 하나 남영동 분실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건물 바깥쪽 한 켠에 설치된 골프 연습장(속칭 닭장)이었다. 큰 무궁화를 어깨에 짊어진 치안본부 고위 관계자(경무관 이상)가 이곳에서 때때로 골프를 연습한다고 했다. 우리를 인솔해 간 한 간부가 여기서 연습 자세를 취하자 전경 한 명이 어디선가 나타나 고무 티 위에 공을 올려놓았다. 얼마 전 박찬주 전 대장 부인이 공관병을 하인부리듯 했다는 보도를 보고 경찰 간부가 공 하나를 칠 때마다 전경이 잽싸게 다른 공 하나를 티 위에 올려주던 당시의 장면이 생각났다. 경찰이나 군인이나 국정원이나 대한민국 권력기관 간부들의 갑질은 한결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종철 열사가 고문으로 사망한 남영동 대공분실 추모관(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지난 8일 “문재인 대통령이 <1987> 영화를 관람하면서 눈시울을 적시는 모습을 연출하며 이 영화가 자신들의 영화인 것처럼 포장을 한다”면서 “쇼 그만하라”고 비아냥거렸다. 또 같은 당 곽상도 의원은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을 누가 밝혔나. 우리 보수 정권이 밝힌 게 아닌가. 그런데 왜 (진보 정권의) 문대통령이 <1987> 영화를 보고 우나”라고 힐난했다고 한다.

그들이 말하는 보수 정권이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전두환 정권의 뒤를 이은 노태우 정권인가, 3당 통합의 전략으로 정권을 얻은 개혁 보수 김영삼 정권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윤상삼 등 용감한 기자들의 보도에 밀려 고문 기술자들을 어쩔 수 없이 감옥에 보낸 전두환 정권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인지 알수는 없다.

하지만 설사 박종철 열사 고문 치사 사건의 전모가 보수 정권에서 밝혀졌다 하더라도 그 공(功)을 자신들의 것이라 주창하는 것은 후안무치하기 짝이 없다. 한 네티즌들은 “보수 정권의 공이라는 게 말이 되느냐”면서 “설사 그렇다 해도 깡패가 무고한 사람을 실컷 패놓고 빨간 약 한 번 발라주는 격”이라고 야유했다. 또 일부 누리꾼은 연일 문재인 정부에 대해 말도 안되는 트집을 잡아 네티즌들의 따가운 비판을 사는 자유한국당을 두고 “하루라도 욕 안들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 모양”이라고 말했다.

어틀랜타 슈가로프 멀티플렉스 상영관의 관객들은 영화가 끝난 뒤 엔딩 스크롤이 한참 올라가는 도중 아무도 자리를 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일부에서는 나지막한 흐느낌 소리도 들렸다. 그들의 속마음을 들여다 볼 수는 없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 하나 “지금 현재 대한민국 국민들이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가 보수 정권의 공”이라는 자유한국당의 어거지 주장에 수긍하지는 않을 것이다.

논설주간 강성보 reporter1@civicnews.com

<저작권자 © CIVICnews / 시빅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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