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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간 묻힌 ‘장자연 사건’의 진실은 이제 밝혀져야 한다

기사승인 2018.01.15  05: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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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편집국장 강동수

편집국장 강동수

연초부터 남북대화니, 개헌이니, 혹은 비트코인 파동이니 해서 굵직한 뉴스가 신문과 방송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다. 그 와중에 여론의 이목이 크게 쏠리지는 않지만 내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는 사안이 있다. 이른바 ‘장자연 리스트’에 대한 재조사 방침 말이다.

'장자연 사건'이란 지금으로부터 9년 전에 발생했던 사건이다. 2009년 3월 신인 여성 연기자였던 장자연 씨가 소속사 대표 등의 강요에 따라 유력 인사들의 술 시중을 들고 성 상납을 강요받았다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다. 그의 유서엔 ‘장자연 리스트’라고 해서 그 술자리에서 그에게 치근덕거렸다는 이른바 유력 인사들의 이름이 적시돼 있었던 거다. 그 리스트엔 유력 보수 일간지 사주와 연예기획사 대표, 방송국 PD, 기업인 등 20여 명이 포함돼 있어 사회적 충격이 적지 않았다. 장 씨는 이들에게 여러 차례 술자리와 성상납을 강요받는 한편 전 소속사 대표와 매니저로부터 폭행과 폭언, 협박을 받았다고 구체적인 정황을 상세히 써놓았었다.

내가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사건이 터졌을 당시 일간신문의 논설위원으로 일하면서 그 문제를 주제로 칼럼을 쓴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면서 9년 전 ‘이 끔찍한 위선과 관음증의 세상’이란 제목으로 내가 썼던 글을 다시 찾아 읽어 봤다. 대강 이런 내용이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연예계의 추악한 공생 관계가 일부나마 들춰지고 있다. 기업주 중엔 광고 출연이나 스폰서라는 이름의 뒷돈을 미끼로 여성 연예인들을 성적 향략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 뒷돈은 몇 억 원에서 몇 십 억 원에 이른다고 한다. 거기에 일부 방송사 제작진도 끼어든다고 한다. '소속사 대표님'들도 검은 거래를 강요한다니 요지경이 따로 없다.(……)이런 추문을 귀에 담는 것만으로도 참혹하다. 붉은 주단을 밟고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상을 받는 사람들의 세상, 황금 시간에 국민의 시선을 끌어당기던 드라마 세상의 바깥에 이런 추악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니. 화려하게 꾸며진 정원의 대리석을 자빠뜨려 지렁이와 벌레들이 바글바글 끓고 있는 걸 본 것처럼 스멀스멀해진다.

장자연 씨는 목숨을 끊기 전에 남긴 문건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힘없고 나약한 신인배우일 뿐입니다.' 대중에게 사랑받는 연기자로 입신할 꿈에 부푼 한 아리따운 처녀의 삶을 비극적인 자살로 끝맺게 한 '범인'은 과연 누구인가. (……) 쌓아올린 돈과 권력을 한 처녀의 꿈과 삶의 순결성을 짓밟는 데 악용한 사람들은 누구일까. 아마 멀쩡하게 생긴 사람들, 목에 힘을 주고 헛기침깨나 하는 사람들일 터이다. 낮에는 근엄한 얼굴로 공자 왈 맹자 왈 하던 사람들이 밤에 벌였을 타락한 방종, 그 이중적 위선을 용서하기 어렵다.(……) 장자연 사건의 진실은 파헤쳐져야 한다. 그녀를 죽음으로 내몬 사람들은 책임을 져야 한다. 도덕적 물의를 빚은 사람도 합당한 비판을 받아야 하겠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한 인간의 꿈을 돈과 권력으로 짓밟아 죽음에 이르게 한 우리 사회의 천박과 비열에 대한 뼈아픈 반성이어야 할 터이다. 장자연 씨를 죽게 한 그 리바이어던은 또 누구를 희생양으로 삼으려고 배회하고 있을까. 부끄럽고 두렵다."

인용이 다소 장황해졌지만 내 필력이 모자란 탓이었던지, ‘갑’들의 세상이 그만큼 강력해서였던지 그 이후 ‘장자연 사건’은 유야무야 덮이고 말았다.

경찰과 검찰이 수사하는 시늉을 했지만 진실을 규명하기 보다는 덮어버리는 데 급급했던 거다. 수사기관은 이름이 나돌았던 유력 일간지 회장을 비롯한 언론인, 재벌 기업인, 유력 광고주, 힘깨나 쓰는 대중문화계의 거물 등등에게 다들 ‘혐의 없음’이란 면죄부를 주는 것으로 끝냈다. 전 소속사 대표와 매니저만 폭행과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해 각각 징역 4월에 집행유예 1년,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이란 솜방망이 처벌을 내렸을 뿐이다. 당시에도 경찰과 검찰이 대한민국 1%의 ‘갑’들에게 굴복했다는 비난이 쏟아져 나왔지만 서서히 세간의 관심에서 잊혀진 사건이 되고 말았던 것.

이 사건이 다시 떠오르게 된 건 얼마 전 법무부·검찰 개혁위원회 산하 검찰과거사위원회가 과거 적폐 청산 차원에서 재조사 대상에 포함시킬 것을 검토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JTBC <뉴스룸>이 2009년 당시 수사 기록을 입수해 보도한 것도 여론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에 일조했다. 수사 기록 곳곳에 술 접대 강요와 폭행 등의 정황이 뚜렷했고, 무엇보다 성추행 강요, 강요 방조죄에 대한 장자연 씨 본인과 동료들의 진술과 정황들이 분명했음에도 검찰이 이를 인정하지 않고 무혐의 처리했다는 것이 보도의 요지였다. 이후 여러 방송의 탐사 고발 프로그램의 홈페이지에 이 사건을 다시 재조명해 달라는 네티즌들의 요청이 쏟아지고 있다는 후문이다.

‘장자연 사건’이 9년이나 지난 지금 떠오르게 된 것은 말할 나위도 없이 이 사건이 한국 사회의 여러 고질적 병폐와 치부들을 세상에 드러낸 사건이기 때문이다. 일부 매니지먼트 업계의 근절되지 않는 갑을 관계의 밑바닥을 보여주었고, 연예인과 여성의 인권 문제를 환기시키기도 했던 거다. 더 큰 문제는 이른바 한국 사회의 엘리트들이 얼마나 도덕적으로 타락했고 위선적인가를 극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라는 점에 있다. 자사의 지면엔 온갖 사회의 비리를 고발하고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자고 목소리를 높였던 언론사의 사주가 밤엔 연기자로서의 성장을 꿈꾸는 꽃다운 여성을 성적 노리개로 삼았다는 게 아니었던가. 게다가, 서민들에겐 ‘저승사자’ 같은 경찰과 검찰은 이런 보이지 않는 권력에 유착하고 굴복해 사건을 덮는 데 급급했던 거다.

한때 유력 언론사 사주를 ‘밤의 대통령’으로 불렀던 시절이 있었다. 막강한 의제 설정력과 여론 전파력을 가진 메이저 언론을 가진 그들은 사실상 대통령이 부럽지 않은 권력을 누렸다는 이야기다. 도덕적으로 일탈한 일부 재벌 기업인은 말할 나위도 없고. 2015년 개봉돼 흥행 대박이 났던 영화 <내부자들>의 세상이 결코 영화적 과장이 아닌 거다. 입에 올리기도 민망한 노릇이지만, 재벌 기업 회장과 언론인, 그리고 유력 국회의원들이 요정에 모여 접대 여성들과 나체 술파티를 연다는 영화의 한 장면이 ‘장자연 사건’과 무엇이 다른가.

글쎄, 검찰과거사위원회가 이 사건을 다시 들여다 볼 것을 검토 중이라니 일단 지켜봐야겠지만 반드시 철저하게 재조사해야 할 거다. 이번엔 우물쭈물하지 말고 제대로 진실을 파헤쳐야 할 거다. 지난 정권의 뇌물 수수 사건이나 권력 남용 사건을 수사해 제대로 처벌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이미 죽은 권력에 매질을 가하는 건 쉬울 수도 있다. ‘장자연 사건’의 당사자들은 아직 한국 사회 곳곳에 숨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그래서 이 사건에 대한 재조사와 진상 규명이 중요하다는 거다.

그게 ‘정치 검찰’로 비난받았던 검찰이 얼마나 환골탈태할 수 있느냐를 재는 리트머스 시험지이기도 한 거다. 아마 이 사건을 다시 들쳐보면 ‘화려하게 꾸며진 정원의 대리석 밑 숨은 맨땅에 지렁이와 벌레들이 바글바글 끓고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처럼’ 한국 사회의 온갖 병리가 다 드러날 거다. 과연 검찰이 제 치부를 제대로 까발릴 용기, 그리고 한국 사회의 숨은 권력과 맞설 기개가 있는지 한편으론 의문이기도 하지만, 이왕 다시 들여다보기로 했다면 제대로 조사해야 할 거다. 재조사가 실시된다면 정치권도 이번엔 방해하지 말고 조용히 협조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장자연 씨는 자살이 아니라 사회적 타살을 당한 게 아닌가. 술자리에 나가려 하지 않는다고 소속사 대표에게 끌려가 매를 맞고, 협박을 받았다는 거다. 우리 사회 일부 권력 엘리트들이 아무리 도덕적으로 타락했기로서니, 그리고 우리 자신이 그런 타락에 둔감해졌기로서니 이런 일을 용인해선 미래가 없다. 꽃다운 나이의 여성을 향락의 제물로 삼고, 끝내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도 모자라 9년이 지나도록 진실의 은폐에만 급급했다면 이 세상을 함께 사는 우리 자신이 너무 부끄럽지 않은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 여성 연예인의 억울함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그 안타까움을 기억하는 많은 국민들을 위해서라도 검찰과거사위원회는 장자연 사건의 재조사에 나서야 할 것이다. 제대로 해낸다면 정치 검찰, 권력 유착과 같은 이미지를 벗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거다.

9년 전 “어머니의 제삿날인데도 제사에 참석도 못하고 술 접대 자리에 불려나간 장자연 씨가 너무 서러워서 울더라”는 전 매니저의 진술은 지금 떠올려도 가슴이 먹먹하다. 어머니의 제삿날을 맞은 여성을 술자리에 불러내 성 추행의 대상으로 삼은 자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편집국장 강동수 reporter1@civicnews.com

<저작권자 © CIVICnews / 시빅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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