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들의 ‘아무 말 대잔치’와 언론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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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들의 ‘아무 말 대잔치’와 언론 보도
  • 편집위원 양혜승
  • 승인 2017.12.24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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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위원 양혜승
편집위원 양혜승

언제부턴가 ‘아무 말 대잔치’가 유행이다. KBS의 개그 프로그램인 <개그콘서트>에는 아예 동명의 코너마저 생겼다. 나무위키에서는 "트위터의 드립 문화를 일컫는 유행어이며 아무렇게나 말을 내뱉기 편한 트위터의 특성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고 그 유행 배경을 적고 있다. 위키백과에서는 "당황스러운 상황이 닥치거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아무 말이나 막 하는 모습을 비유적으로 일컫는 신조어"라고 설명하고 있다. 쉽게 말해, 아무 말 대잔치란 주제나 상황에 무관하게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막 던지는 것을 의미한다.

대중문화에서 어떤 현상의 유행이 정치사회적 현상과 무관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대중문화의 현상이 정치사회적 현상으로 옮아가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정치사회적 현상이 대중문화에 유입되는 경우도 있다. 어쩌면 최근 우리 대중문화에서 유행하는 아무 말 대잔치는 정치인들의 기이한 언행들이 그 원형이 아닌가 싶다. 존재감을 과시하기라도 하듯 아무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정치인들이 근래 들어 유독 많다.

독보적인 주자는 누가 뭐래도 자유한국당의 홍준표 대표다. 얼마 전 홍 대표는 “우리 문화예술계에 좌파 코드 연예인들이 대거 침투했다”는 ‘드립’을 선보인 바 있다. “좌파 코드 성향을 띠지 않은 영화는 천만 관객을 모을 수 없다”는 신선하고 창의적인 시각을 펼쳐 보이기도 했다. “시골에서 개량 한복을 입은 사람은 전부 좌파”라는 말은 아무 말 대잔치의 하이라이트가 아니었나 싶다.

물론 아무 말이나 막 던지는 정치인의 모습이 홍 대표에게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당황스러운 상황에서 아무 말 대잔치를 벌였던 사람으로는 박근혜 전 대통령만한 사람도 없다. 2012년 대선 토론회에서 박근혜 당시 대선 후보는 상대방의 모든 질문에 ‘깔끔한’ 답변을 내놓았다. 과학기술에 대한 공약이든 증세와 관련된 공약이든 구체적인 알맹이는 없이 그저 “그러니까 제가 대통령 하겠다는 거 아니겠어요?”라는 답변만 남발했다. 한 국가를 이끌어갈 운영 계획과 공약을 토론하는 자리에서, 그것도 온 국민이 지켜보는 상황에서 벌어진 촌극이었다. 지금까지도 두고두고 논점일탈의 사례로 언급되는, 그야말로 아무 말 대잔치였다. 그 대잔치가 결국은 몇 년 후 빚어질 국정 농단의 서곡이었는지도 모른다.

정치인들의 과장된 발언을 풍자한 미국의 카툰(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개그 프로그램의 아무 말은 사실 아무 말이 아니다. 아무 말처럼 느껴지게 만들기 위해 고심해서 만들어낸 유머 장치다. 그래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촌철살인과 같은 펀치라인, 즉 라임이나 중의적 표현을 활용하는 언어유희가 존재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치는 다르다. 개그는 개그이고 정치는 정치다. 개그가 정치가 될 수 없듯 정치가 개그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정치 현장이 과연 아무 말 대잔치나 벌이고 있어야 할 곳인가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인이 막말을 지껄이면 차라리 언론이 다루어주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일리 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런 주장에 반대한다. 오히려 언론은 정치인이 어떤 말을 내뱉는지 자세히 알려주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그 말이 아무 말인지 아닌지를 정확하게 파악해서 알려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 정치인이 그 말을 농담으로 한 것인지 진심으로 한 것인지도 정확히 파악해서 알려줄 필요가 있고, 많은 국민들이 그 이야기를 아무 말로 인식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도 파악해서 알려줄 필요가 있다.

정치인이 농담처럼 아무 말을 던지고 국민들이 농담처럼 아무 말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정치의 코미디화에 다름 아니다. 국민들은 정치인에게서 코미디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농담처럼 아무 말을 즐기는 정치인이라면 정치 현장에 머무르기보단 <개그콘서트>를 통해 연예계로 입문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국민들이 막말로 인식하는 아무 말을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내뱉는 정치인이라면 그건 간단치 않다. 갈수록 거칠어지는 정치권의 아무 말은 국민들의 정신 건강을 해친다. 불쾌하고 수치스럽기까지 하다. 정치인들의 아무 말이 고도로 계산된 전략이라는 해석도 있다. 일부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언어가 정말 정치 전략이라면 우리 정치의 저급성에 정말 답은 없다.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설파했다. 사람은 언어를 통해 생각하고 사고한다는 의미다. 아무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정치인이 국민들을 위해 제대로된 정치를 구현할 리 만무하다. 국민들의 눈높이에 따라가지 못하는 ‘아무 말주의자’는 우리 정치를 저급하게 만들지 말고 당장 정치를 그만두는 것이 마땅하다.

사족. ‘아무 말’은 내용의 저급함에만 있지 않다.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도 반말을 하는 정치인들이 있다. 기자는 국민을 대신해 질문하는 사람들이다. 말꼬리를 잘라먹으며 교묘하게 기자들을 하대하는 정치인이야말로 국민을 우습게 보는 사람에 다름 아니다. 그것도 ‘아무 말’의 일종임을 알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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