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현·조공·굴욕외교? 이 한심한 ‘달팽이 뿔 위의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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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현·조공·굴욕외교? 이 한심한 ‘달팽이 뿔 위의 싸움’
  • 편집국장 강동수
  • 승인 2017.12.19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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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수 자투리 시사인문(24) 문 대통령 방중을 둘러싼 논란으로 되짚어본 조공외교의 역사

1.

문재인 대통령의 중국 국빈방문의 결과를 놓고 국제사회보다는 국내에서 뒷말이 무성하다. 문 대통령에 대한 중국 측의 ‘홀대론’이 일부 언론의 보도를 거치면서 증폭돼 논란이 되는가 하면, 한국 측이 중국에 지나친 저자세를 보였다 해서 ‘알현외교’니, ‘조공외교’니 하는 비아냥도 흘러나왔다.

‘홀대론’의 근거는 국외자가 보기엔 매우 사소한 것들이다. 이를테면, 국빈방문인데도 문 대통령의 베이징 도착 당일 시진핑 주석이 베이징을 비웠다거나, 공항 영접 나온 중국 측 인사의 격이 낮았다거나 하는 따위다. 여기에 더해 방중 기간 중 이른바 연속으로 ‘혼밥’을 먹었다거나, 그래서 대통령 내외가 베이징의 서민식당을 찾아가 보통사람들과 어우러져 아침 식사를 한 것조차 입길에 올랐다.

보수 언론들은 문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이 12월 14일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위한 4대 원칙’을 두고도 중국의 입장만 일방적으로 대변한 것이라고 깎아내렸다. 별다른 실익도 없이 중국의 페이스에 휘말렸다는 거다. 그러면서 중국에 대한 환상을 접고 한미동맹이나 강화하라고 훈수를 두기도 했다. 게다가 문 대통령을 근접 취재하려던 한국 기자들이 중국인 경호원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한 일도 좋은 공격 소재가 됐다. 옛날 제후국이 종주국을 찾아서 갖가지 진상품을 바치고 굽실거렸다는, 이른바 ‘조공’과 ‘알현’외교가 재현됐다고까지 비난했다.

일부 보수 언론의 흠집내기 식 보도가 이어지자 자유한국당 등 야당이 얼씨구나 하고 문 대통령 비난에 열을 올렸다. 특히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의 공격이 실로 눈부셨다.

비슷한 시기 일본을 방문해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회동을 한 홍 대표는 한국 기자들과 만나 “(문 대통령의 방중은) 국격을 훼손했다. 황제 취임식에 조공외교를 하러 간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정신석 자유한국당 전 원내대표도 같은 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삼전도의 굴욕이 떠오른다”며 “한국 외교의 대참사다. 대중 굴욕외교의 민낯을 보고 치가 떨려 잠을 잘 수 없었다”고 썼다.

청와대라고 가만있지는 않았다. 청와대는 양국 정상간 우의‧신뢰 구축과 교류 협력 복원‧발전의 신호탄 마련, 한반도 평화 기반 구축, 우호 관계 저변 확대 등을 이번 방중의 성과로 강조했다. 사드 배치에 따른 중국의 대한 경제 보복을 이번 방중으로 완전히 종식시키고 정상적인 교역 관계를 복원했다고도 주장했다. ‘대화’를 기조로 하는 북핵 문제 대처에도 원칙적인 합의를 이뤄냈다고도 밝혔다.

청와대는 문 대통령에 대한 ‘홀대론’에 대해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프레임‘이라며 국내 일부 언론과 야당의 공세에 서운함을 드러냈다. 김현철 경제보좌관은 “중국인 마음을 사기 위한 방법으로 베이징 현지 식당을 방문한 것”이라며 “사드에 따른 경제적 손실이 하루에 300억 원이다. 그 손실을 생각하면 이번에 중국을 방문한 것은 아주 잘한 일”이라고 강하게 반박했다.

늘 그래왔던 대로 이번에도 ‘보수 언론의 진보 정권 까기’-‘이를 받은 보수 야당의 논란 확대 재생산’-‘청와대와 정부의 반박’이라는 삼단 순환론이 되풀이됐다.

그런데 논란이 엉뚱한 곳으로 비화됐다. 문 대통령의 방중을 ‘굴욕’ ‘조공’ ‘알현’이라고 맹공했던 홍준표 대표의 방일 비화(?)가 드러나면서부터다. 홍 대표가 아베 일본 총리와 만났을 때 악수를 나누면서 고개와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하는 장면이 유포되면서 정작 ‘알현’ 외교를 한 사람은 홍 대표 자신이 아니냐는 역공에 직면했던 것. 아베 자신은 높은 의자에 앉으면서 홍 대표를 납작하고 꺼지는 의자에 앉혀 홍 대표를 내려다보는 자세를 취하게 한 일본 측의 ‘꼼수’가 겹치면서 ‘알현’ 논란이 증폭됐던 것. 게다가 대통령이 중국과 ‘한반도 4대 원칙’을 논의하는 그 순간 일본에서 ‘한일 군사훈련 찬성’의 발언을 내놓은 것이야말로 조공 외교가 아니냐는 지적을 받았다.

일본을 방문 중인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왼쪽)가 14일 오후 일본 도쿄 총리 관저에서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를 만나 악수를 하고 있다. 이 사진은 자유한국당이 언론에 배포한 것으로 본지는 이를 협약에 의해 더 팩트로부터 제공받았다(사진: 더 팩트 제공).

글쎄, 여야가 원래 의견이 다른 법이고, 대통령의 행보에 비판을 가하는 것도 야당의 몫이긴 하다. 그러나 동북아 정세가 날카롭게 긴장하고, 한중일의 패권 경쟁 속에 각국이 국익 챙기기에 혈안이 된 지금, 외교 안보 문제를 놓고 ‘제 팔 제 흔들기’ 식으로 중구난방이어서야 곤란하지 않나. 게다가 본질 문제는 덮어놓고, ‘대통령의 혼밥’이나 ‘야당 대표의 폴더형 곡배’ 따위 지엽말단을 가지고 싸우는 꼴도 한심해 보인다.

대통령을 수행한 기자들이 중국 경호원에게 얻어맞은 사건도, 엄중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게 본질은 아니다. 중국 측의 과잉 경호가 있었다면 그건 그것대로 떼어내서 비판하고 중국에 항의할 일이지 그걸 싸잡아서 ‘굴욕’, ‘조공’이라며 정부 공격의 소재로 써먹는 행태 역시 유치하지 않나. 어쨌거나 이게 한국 정치의 현 주소라니 한숨이 나올 밖에.

 

2.

문 대통령의 방중이 ‘조공외교’ ‘알현외교’라는 주장이 야당에서 계속 제기되고 있으니 우선 그 말의 뿌리부터 살펴보고 이야기를 계속하기로 하자.

우선 ‘조공(朝貢)’이란 말부터. ‘조공’은 문자대로 풀이하면 ‘천자의 조정에 공물을 바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전 근대 동아시아의 국제 관계에서, 중국 주변에 있는 나라들이 정기적으로 중국에 사절을 파견하여 예물을 헌상하던 행위를 일컫는 것인데, 하지만 그 말이 가진 역사적 실체는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다.

조공은 중국 고대 주(周)나라 때 제후가 정기적으로 방물(方物)을 휴대하고 직접 천자를 배알해, 신하의 예를 행하고 군신지의(君臣之義)를 밝혔던 가장 기본적인 충성 맹세 행위였다. 이를 통해 천자는 일종의 정치적인 지배 수단으로서 여러 제후들을 통제하고 지배했던 것. 그 뒤 이 제도는 한족(漢族) 중심의 중화사상에 기반해 주변 이민족을 위무, 포섭하는 외교 정책이 됐던 것. 그러나 이런 조공 관계란 주위의 이민족을 직접 통치하거나 지배하는 실질적인 행위가 아니라 중국을 동아시아의 맹주로 인정한다는 다분히 요식적인 절차였던 것. 중국의 입장에서도 주변국에 대해 형식적 종속 관계을 맺어 이민족의 침입을 막는, 상호불가침의 공존 관계를 수립하는 외교적 효과가 있었다.

주변 국가들로선 중국에 밉보여서 좋을 것은 없으니 겉으로는 굽실거리면서 중국의 체면을 지켜주고 국가의 안전을 담보받자는 일종의 ‘실리외교’라는 게 정답에 가까울 것이다. 다시 말해, ‘조공 관계’란 건 고대와 중세를 관통한 동북아 특유의 국제질서의 한 형식이었던 것. 요즘으로 따지면, 유엔이 실질적으론 별다른 힘은 없지만, 겉으론 최고의 국제기구으로 쳐줘서 ‘유엔 결의안’이란 이름 아래 강대국이 약소국을 통제하는 시스템과 크게 다를 바 없다고나 할까.

게다가 조공을 바치는 나라에겐 중국이 주는 ‘보너스’도 있었다. 주변국이 공물을 바치면 중국은 의례 하사(下賜) ·상사(賞賜)라는 명목의 답례물을 내려주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게 공물보다 훨씬 더 가치가 높았던 것. 나중엔 이게 확대돼 국가 사이의 공식적인 물물교환을 의미하는 관무역(官貿易), 또는 공무역(公貿易)의 성격까지 지니게 됐다. 주변국으로선 중국에 충성을 맹세하는 말잔치를 하면 짭짤한 보상이 주어진 셈이다. 그래서 주변 국가들이 중국에 조공을 바치겠다고 먼저 나서고, 오히려 중국이 이를 고사하는 사례까지 나타나곤 했다.

그래서 19세기 이전까지는 만주·몽고·서장(西藏)·안남(安南) 및 중앙아시아 등지의 모든 나라가 빠짐없이 중국에 조공을 하곤 했다. 고대로부터 일본도 조공을 했고, 심지어는 19세기에 이르러 영국·프랑스 등 유럽 나라가 중국에 통상을 요구할 때도 이 형식을 취해야 했다. 우리만 해도 삼국시대부터 중국의 역대 왕조에 조공외교를 해왔는데 강요에서라기보다는 ‘주고받기’ 형식을 통해 보다 많은 선진문물을 수용하려는 적극적인 것이어서 조공사를 자주 보내 필요한 물화를 먼저 요구하기도 했던 것.

송나라 시절 조공을 바치러 가는 외국 사신도(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이른바 ‘알현(謁見)’도 마찬가지. 천자를 배알하는 것이니 중국은 당연히 ‘군신의 예’를 엄격히 지킬 것을 요구했다. 주변국으로서야 왕이 직접 중국의 수도로 들어가 중국의 황제에게 절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절을 시켜서 하는 것이니 굳이 거부할 이유도 없었다. 그저 국서에나 ‘신(臣)’이라는 표현을 넣어 최상급의 겸양어를 쓰기만 하면 됐다. 하기야 예외도 없지는 않았다. 고려 말 몽고에 항복한 고려가 ‘조(祖)’나 ‘종(宗)’ 같은 중국식 왕호를 빼앗기고 세자 시절 볼모가 돼 원(元)의 수도 대도(大都, 베이징의 당대 명칭)에 머무르기도 했고, 병자호란 때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 태종 홍타이지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부딪는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의 예를 올리긴 했다.

이왕 ‘삼궤구고두례’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마디만 더 해보자. 청 왕조는 외국의 사절에게 어떤 경우에도 이 예를 양보한 적이 없다. 어떤 나라의 외교 사절이 와도 황제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대게 했던 거다.

1793년 대영제국의 외교관 조지 매카트니(George Macartney)가 건륭제를 알현할 때 중국은 그에게 삼궤구고두례를 행할 것을 요구했다. 나름대로 세계를 제패한 나라의 사절이라는 자부심을 가진 매카트니는 이 동양식 예법을 거절했다. 그래서 타협 끝에 황제의 옆에 영국 왕 조지 3세의 초상화를 걸어놓고 이 예식을 행했다고. 1816년 영국의 윌리엄 애머스트(William Amherst)도 삼궤구고두례를 요구 받았지만 이를 거부해 결국 청 황제를 알현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참 후인 1873년 일본제국의 특명전권대사 소에지마 다네오미가 동치제를 알현할 때 청나라 예부에서 삼궤구고두례를 요구하였지만 이를 거절해 이 예법을 생락하고 황제를 입례하긴 했다. 그때는 중국이 이미 ‘종이호랑이’ 신세가 된 이후였지만.

 

3.

우리나라가 중국 역대 왕조에 조공사절을 보낸 역사는 장구하다.

대중 조공 관계는 대개 4세기 이후 삼국시대부터 성립된 것으로 본다. ‘삼국사기’엔 고구려 대무신왕이 후한으로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치니 광무제(光武帝)가 왕호를 회복시켜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당시 대중국 관계는 정식의 조공·책봉의 관계가 아니라 단순한 입조(入朝)에 불과했던 것. 고구려가 후일 수·당 양 왕조에 맞서 치열하게 전쟁을 벌였던 것으로 따지면 중국의 속국이라 할 수는 결코 없는 일이다. 이는 백제와 신라도 마찬가지였다. 고구려·백제·신라는 중국 남북조(南北朝)의 동진·송·남제·양·진·수 등과 300여 회 이상 사절의 왕래 교환을 한 것으로 나타난다.

통일신라와 당나라의 관계도 마찬가지. 신라가 당에 ‘신하의 나라’를 자처해 당의 군사를 끌어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했지만, 당이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고 하자 맞싸워 당의 세력을 쫒아낸 것을 보면, 신라의 대당 조공관계 역시 전략적 차원의 국익 확보를 위한 것에 불과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어쨌거나 삼국 통일의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생긴 당과의 적대 관계가 해소되자 686년 신라와 당의 국교가 회복됐다. 이 시기에 당과의 문화 교류는 매우 빈번하고 유학생의 수도 상당해 840년에는 105명의 학생과 질자(質子, 강대국에 보낸 일종의 볼모)가 일시에 귀국했다는 기록도 있다.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역사적 자료가 있다. 당의 수도였던 시안(西安)에 있는 ‘장회태자이현묘(章懷太子李賢墓)’ 벽화에 그려진 외국 사절 가운데 조우관(鳥羽冠)을 쓴 신라 사절로 추정되는 인물이 등장한다. 2009년 김형오 국회의장 일행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중국이 시안(西安)의 ‘섬서성 역사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이 그림을 공개한 적도 있다. 중국 둔황 막고굴(莫高窟) 벽화 속에서도 이련 조우관을 쓴 인물을 여럿 나온다.

사마르칸트 지역의 벽화. 오른쪽 인물 둘이 조우관을 쓴 것이 보인다(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고려와 송나라의 관계도 신라와 당나라의 관계의 연장이었다. 그러나 요(遼)·금(金)을 거쳐 원대(元代)에 들어서면 이제까지의 의례적인 상호 관계에서 압제에 의한 지배성이 강한 종속적인 성격으로 변질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조공 관계는 제도적으로 정비됐다. 조선과 명나라 사이의 본격적인 국교(조공·책봉관계) 성립은 1401년(태종 1)부터. 조선시대의 조공사절은 동지(冬至)·정조(正朝)·성절(聖節)·천추(千秋) 등 정기적인 사행과 사은(謝恩)·주청(奏請)·진하(進賀)·진위(陳慰)·진향(進香)과 압마(押馬)·주문(奏聞) 등의 임시 사행이 있었다고. 동지와 정조는 각각 동지와 새해에, 성절과 천추사는 각각 황제와 황태자의 생신에 보낸 축하사절단이다. 사신 일행은 정사(正使)·부사(副使)·서장관(書狀官)을 비롯해 40명에 이르렀는데, 이들이 가지고 간 조공품 이외에도 다양한 사무역(私貿易)이 행해졌고 이것이 조선의 최대 무역 루트였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베이징에 도착하면 사행은 미리 연습을 행한 후에 황제를 알현했고 준비해간 조공품인 세폐와 방물은 예부를 통하여 황제에게 헌상했다. 황제는 국왕에 대한 회사를 비롯해 사행의 정관 전원과 수행원 중 30인에게 하사품을 주었다고.

다시 말해 한중 조공관계는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 관계에 있어 보편적인 외교규범에 의한 외교 행위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조공 행위 자체를 종속적 또는 예속적인 것만으로는 볼 수는 없고 중국과의 정치·경제·문화 교류를 위한 형식이자 절차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해야 할 터이다.

 

4.

나는 개인적으로 문재인 대통령의 방중 과정에서 한국에 대한 중국의 의도적인 홀대가 전혀 없었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사드 배치 등으로 한국이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흐르자 의도적으로 한국에 대해 군기잡기를 시도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쉽게 말하면,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왕서방이 먹는다’더라고 한국이 경제적 이익은 한중교역에서 챙기고, 자기네가 싫어하는 일은 미국이 시키는 대로 한다는 섭섭함이 ‘경제 보복’으로 나타났다면, 이번에 그걸 풀어주는 대신 본때는 한번 보이고 넘어가자는 기류가 중국 조야에 형성됐을 수도 있다는 거다.

어쨌든 그걸 가지고 한국 내부에서 국내용으로 치고받는 풍경은 눈꼴사납다. 국가간 주권을 가지고 평등한 외교관계를 수립한다는 현대 사회에서 한국과 중국과의 관계를 ‘조공’이니 ‘알현’이니 하는 전근대적, 자학적 단어를 동원해 생채기 내는 것은 온당한 짓이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글쎄, 그러잖아도 중화주의에 물들어 주변국을 낮춰 보는 중국 앞에서 우리끼리 알현이니 뭐니 지지고 볶는다면 중국의 안하무인 태도를 더 살려주는 꼴밖에 더 되겠나.

따지고 보면, ‘사드’ 배치를 결정한 건 박근혜 정권이다. 그 후과로 중국이 몽니를 부리자 문재인 정권이 뒷수습을 맡은 게 아닌가. 경제적 국익을 위해 설거지에 나선 후임 대통령이 설사 다소의 체면 손상을 무릅쓰고 ‘홀대’를 감수했다손 치더라도 자유한국당 등이 ‘조공’이니 ‘알현’이니 하고 까대는 건 적반하장이자 후안무치가 아닐까. 싸울 땐 싸우더라도 외교 문제에 대한 비판엔 야당도 신중해야 할 터다.

옛 이야기 두어 개로 글을 마치겠다.

조(趙)나라가 연(燕)나라를 치려하자 때 마침 연나라에 와 있던 소진(蘇秦)의 아우 소대(蘇代)는 연나라 왕의 부탁을 받고 조나라의 혜문왕(惠文王)을 찾아가 이렇게 설득했다.

“이번에 제가 이곳에 오는 도중에 역수(易水)를 건너오게 되었습니다. 마침 민물조개가 강변에 나와 입을 벌리고 햇볕을 쪼이고 있는데, 황새란 놈이 지나가다 조갯살을 쪼아 먹으려 하자 조개는 깜짝 놀라 입을 오므렸습니다. 그래서 황새는 주둥이를 물리고 말았습니다. 황새는 생각하기를 오늘 내일 비만 오지 않으면 바짝 말라 죽은 조개가 될 것이다 하였고, 조개는 조개대로 오늘 내일 입만 벌려 주지 않으면 죽은 황새가 될 것이다 생각하여 서로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마침 어부가 이 광경을 보고 황새와 조개를 한꺼번에 망태 속에 넣고 말았습니다. 지금 조나라가 연나라를 치려고 하는데 두 나라가 오래 버티어 백성들이 지치게 되면 강한 진나라가 어부가 될 것을 저는 염려합니다." 소대의 이 비유를 들은 혜문왕은 과연 옳은 말이라 하여 연나라 공격 계획을 중지했다. ‘어부지리(漁夫之利)’의 고사다.

또 있다.

기원전 4세기 전국 시대의 이야기다. 위(魏)나라 혜왕(惠王)과 제(齊)나라 위왕(威王)이 우호조약을 체결했다. 그런데 제(齊)나라가 일방적으로 조약을 어기자, 화가 난 혜왕이 위에 대한 보복을 대신들과 논의했으나 그 의견이 분분했다. 이에 혜왕은 재상 혜자가 추천한 대진인(戴晉人)에게 의견을 물었다. 대진인은 이렇게 말했다. “전하, 달팽이라는 미물을 잘 아시지요. 그 달팽이의 왼쪽 뿔에 어떤 나라가 있고, 오른쪽 뿔에 또 다른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 두 나라는 영토 싸움을 되풀이하고 있었는데, 죽은 자만 해도 수만을 헤아리고 15일에 걸친 격전 후에야 겨우 군대를 철수했을 정도라고 합니다.” “농담도 작작 하시오.” “결코 농담이 아닙니다. 우주의 무궁함에 비한다면, 달팽이 뿔 위에서 거들먹거리는 임금들과 전하의 분노가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이게 ‘와각지쟁(蝸角之爭)’의 출전이다.

글쎄, 지방선거도 좋고, 차기 대권도 좋다. 정치를 하다보면 말싸움도 있을 수 있고, 상대방에 대한 공격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최소한의 품격은 지켜야 할 게 아닌가. 대통령의 정상외교를 두고 벌어지는 수준 이하의 말싸움, 치고받기는 보기 민망하다. 그야말로 ‘달팽이 뿔 위의 싸움’ 아닌가. 다들 정신 차릴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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