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현장실습생의 죽음, 노동의 소외...비극은 또 다른 형태로 되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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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현장실습생의 죽음, 노동의 소외...비극은 또 다른 형태로 되풀이 된다
  • 편집위원 이처문
  • 승인 2017.11.27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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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위원 이처문
편집위원 이처문

수년 전 아들이 대학을 다닐 때 숯불고기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다. 어느 날 아들의 손목에 화상 자국 같은 게 보여 자초지종을 물었다. 하지만 아들은 “괜찮아요. 늘 있는 일인데요”라며 대수롭지 않은 듯 답했다. 식당에서 숯불을 피워 나르던 중 덴 듯했다. “돈을 벌면 얼마나 번다고, 차라리 그 시간에 공부나 하지”라며 잔소리를 퍼부었다. 그래도 아들은 듣는 둥 마는 둥 밤일을 멈추지 않았다.

어떤 날엔 함께 아르바이트하는 고교생을 집에 데리고 와 함께 자기도 했다. 늦은 밤 집이 멀어 그랬던 것이다. 한편으론 기특하기도 했고, 한편으론 안쓰럽기도 했다. 아들은 짧은 기간의 아르바이트로 100만 원 남짓한 돈을 모아 교정 치료하는데 보탰다.

하지만 아들의 아르바이트는 얼마 전 제주의 음료공장에서 현장실습 도중 숨진 고교생의 열악한 근무에 비하면 호사에 가깝다. 숨진 고교생은 월 평균 60시간 이상의 연장 근무를 했다고 하니 현장실습 아니라 노동 착취에 가깝다.

현장실습은 경험 지식을 전수받기 위한 과정이지만 실상은 저임금 노동자로 활용하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는 것 같다. 서양의 도제(徒弟)와 같은 철저한 기술 전수도 아니고, 그렇다고 제대로 임금을 보전해주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일각에선 현장실습 제도 자체를 폐지해야 한다고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도제 교육은 14~15세기 서양에서 발달했던 직업 교육 시스템이다. 10세가 넘으면 상업, 공업, 기술 등의 분야에서 뛰어난 장인(匠人)의 개인 집에 다니면서 도제로 봉사하면서 학습을 시작한다. 직업 교육은 물론 인격 교육도 병행한다. 5~7년 간 엄격한 훈련을 거친 뒤 일정한 작품 제작에 합격해야 비로소 장인이 된다. 도제는 대부분의 교육이 직장에서 이뤄진다는 점에서 학교 교육과 다르다. 또 교사와 학생의 관계가 아닌 주인과 도제의 관계로 진행된다. 교육 콘텐츠나 도제 기관, 임금 등은 계약에 의해 이뤄진다.

1914년 한 제화점의 도제인 주인과 소년(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15세에 피렌체의 유명한 미술가 안드레아 델 베오키오의 작업실에서 도제로 견습 생활을 시작했다. 회화와 조각 등을 배웠던 그는 곧 실력을 인정받아 1472년 피렌체의 화가 길드(Guild, 동업자조합)에 가입하게 된다. 레오나르도 역시 젊은 시절 생활이 궁핍해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만약 레오나르도가 오늘날 우리나라의 현장실습 제도를 경험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실력 연마에 아무런 도움도 안 되니 당장 폐지하라고 하지 않았을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자화상(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이 잉여가치를 창출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면서 노동의 소외가 나타난다는 게 칼 마르크스의 시각이다. 노동은 노동자가 기계 등 생산 수단을 활용해 생산물을 만들어 내는 합목적적 활동이다. 하지만 이런 노동을 자본주의적인 가치 증식의 관점에서 본다면, 생산 수단은 노동의 가치를 흡수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여기서는 노동자가 아닌 생산 수단이 중심이 된다. 이를테면 음료 공장의 기계가 노동자를 지배하는 왜곡이 발생하는 것이다.

찰리 채플린의 <모던 차임즈>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기계 부품에 불과한 인간을 풍자한 영화(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숨진 현장실습생도 기계에 얽매여 밥 먹듯 야근을 하다 변을 당했다. 기계는 잠시라도 멈추면 안 된다. 기계가 돌아가는 한 노동자는 쉬지 않고 이를 지켜야 한다. 이게 소외된 노동의 운명이다.

우리 헌법이 보장하는 ‘노동의 권리’는 사회적 기본권이기 때문에 국가는 노동의 권리를 실현할 수 있는 법령을 적극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고용정책 기본법’, ‘직업안정법’, ‘근로자직업능력 개발법’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또 노동의 권리를 실효적으로 보장하려면 국가는 사회적, 경제적 수단을 통해 고용 증진에 노력해야 한다. ‘근로기준법’이 근로자의 인간다운 존엄성을 보장할 수 있도록 계약 기준의 최저선을 규정해놓을 것도 같은 맥락이다.

2007년 8월 헌법재판소가 ‘근로의 권리’에 관한 의미있는 판결을 했다. “근로의 권리가 ‘일할 자리에 관한 권리’만이 아니라 ‘일할 환경에 관한 권리’도 함께 내포하고 있는 바, 후자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침해를 방어하기 위한 자유권적 기본권의 성격도 갖고 있어 건강한 작업 환경, 일에 대한 정당한 보수, 합리적인 근로 조건의 보장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 등을 포함한다”는 판결이다.

하지만 이 같은 법 정신과는 달리 IMF 이후 우리의 노동자는 기업을 위해 희생돼야 하는 존재로 전락했다. 평생 직장 개념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누군가 잔업을 할 때면 함께 도와주고, 자기의 실적이 눈앞에 보여도 어려운 처지의 동료에게 양보하던 그런 직장은 더는 없다. 나눔과 공감, 희생과 양보의 문화는 이미 박물관으로 떠났다. 사회적 욕망의 구조에서 잉태된 기업문화는 IMF 시절에서 머물고 있다.

문제는 사고가 날 때에만 호들갑을 떨다가 금세 시들해진다는 데 있다. 지난 1월에도 전주의 고객센터에서 현장실습을 하던 여고생이 실적에 대한 압박감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이 있었다. 당시 ‘현장실습의 문제점과 대책’ 토론회까지 열렸지만 10개월 뒤 다시 10대 젊은이가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였던 프레모 레비가 “한 번 일어났던 일은 얼마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했던 말이 진리가 아닌가 싶다.

무능한 정부가 남긴 짐은 국민 개개인에게 전가됐다. IMF 이후 우리에겐 ‘나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생존법이 뼛속깊이 박혔다. 공동체에 의존하다가는 언제 또 생활의 터전을 잃을지 모른다는 공포에 휘둘려왔다. 개인은 안정적 직업을 찾아 나섰고, 젊은이들은 너도나도 공무원을 꿈꾼다. 기업들은 생존을 앞세워 상시적인 구조조정에 몰두해 있다.

야비함과 무책임이 원칙과 정상(正常)을 압도해온 시대의 그림자 아래에서 내일은 또 어떤 ‘현장실습생’이라는 이름의 피해자가 나올지 불안하다. 잠깐의 호들갑이 지나가면 “우리 자식만 당하지 않으면 된다”는 약삭빠름이 또 고개를 들 것이기 때문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한 마디를 되씹어야 할 때인 것 같다.

움베르토 에코(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역사는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되풀이하지 않는다. 때로는 다른 형태의 비극으로 거듭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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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아 2017-11-28 14:08:02
사장이 함부로 밥먹듯 야근을 못시키게 하려면 모두 돈내나 어플을 사용해서 야근수당은 물론 주휴수당, 초과근무수당, 등을 다 받아내는 수밖에 없다. 자기 돈을 버리면서 까지 사람을 함부로 야근을 막 시키는 사장은 없을테니까 돈내나는 사용만하면 근무한 정보가 알아서 저장되고 저장된 정보를 가지고 무료로 대형 로펌의 변호사까지 선임해서 깔끔하게 받아주는 어플이다 이것만 사람들이 자주 사용해준다면 사장들도 야근을 생각하면서 시킬 것이고, 점차 야근의 문화는 사라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