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소원’ 통일, 이제 찬밥 신세 됐나...“통일은 대박”에서 “통일 꼭 해야 하나”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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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소원’ 통일, 이제 찬밥 신세 됐나...“통일은 대박”에서 “통일 꼭 해야 하나”까지
  • 편집위원 이처문
  • 승인 2017.11.20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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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위원 이처문
편집위원 이처문

분단 독일의 종지부를 찍었던 연극같은 장면을 기억하시는가. 1989년 11월 9일 동독 공산당 공보 담당 정치국원 귄터 샤보프스키가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는 체코슬로바키아와 헝가리에서 일어나는 동독인들의 대규모 이탈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동독인의 자유로운 해외 여행을 보장한다고 선언했다. 여권과 비자 발급도 최소한의 절차를 거쳐 신속하게 처리하겠다고 덧붙였다. 상상도 할 수 없던 발표였다. 술렁이던 기자들이 이런 조치가 언제부터 유효한지 묻자 샤보프스키는 “지금 즉시”라고 답했다. 그날 저녁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독일의 통일은 헬무트 콜 서독 총리의 주도면밀함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그 날도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콜 총리에게 “통일을 거론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조지 하버트 부시 대통령에겐 “과잉 반응을 하지 말라”는 전문도 보냈다. 미국의 행정부 안에서도 독일 통일은 시기상조이며, 분단 상태를 유지하는 게 더 낫다는 의견이 우세했다.

독일 통일의 일등 공신 전 헬무트 콜 서독 총리(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이 뿐만 아니었다. 통일 후 독일을 껄끄럽게 여기던 영국 총리 마거릿 대처는 1989년 11월 미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부시와 대화하던 중 갑자기 큰 지도를 펼치며 통일독일의 위험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이듬해 2월에는 부시와의 통화에서 “통일독일은 유럽의 일본이 될 것”이라며 “대규모 흑자를 내는 일본은 바다 건너 있지만 독일은 대륙의 한 가운데 있다. 일본보다 더 나쁜 경우”라고 우려를 표명했다.

하지만 콜은 부시와 고르바초프를 수시로 만나고 통화하면서 신뢰를 쌓아갔다. 콜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잔류하겠다며 부시를 설득했고, 중재에 나선 부시는 소련에 ‘최혜국 대우’를 제공하며 고르바초프의 마음을 돌려놓았다. 1990년 10월 3일 마침내 통일독일이 선포됐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날을 환호하는 독일 국민들(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익히 알려진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은 것은 우리에게 ‘통일’이라는 화두가 점점 진정성을 잃어가는 듯해서다. 물론 통일을 향한 이상과 현실의 간극이 크게 벌어진 탓도 있다. 우리만 죽어라 통일을 외치는데 주변국은 분단을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까지 감지된다.

지난주 미국을 방문했던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전해준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이 심상치 않다. 추 대표는 한미 동포 간담회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꼭 통일을 해야 하냐’고 우리 대통령에게 물었다”고 말했다. 트럼프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의 이야기를 뒤늦게 공개한 거다. 문 대통령은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트럼프는 “그 밖에 내가 도와줄 게 없느냐”고 물었다. 평창동계올림픽 홍보를 도와달라고 했고, 트럼프는 잘 알았다고 했다는 게 대화의 요지다.

‘우리의 소원’인 한반도 통일을 미국의 현직 대통령이 어떻게 인식하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미국이나 중국의 입장에선 군사적 완충지대인 한반도가 통일보다는 분단 상태를 유지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트럼프의 질문을 뜯어보면 “현실적으로 어려운 남북통일을 꼭 해야겠느냐”는 말로 들린다. 물론 통일에 대한 문 대통령의 의지를 확인하는 질문이었는지도 모르지만 뉘앙스는 그게 아닌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의 전 정부에서 느닷없이 “통일은 대박”이라며 거품을 물다가 하루아침에 개성공단을 폐쇄하고 북한과 등을 돌렸으니, 트럼프로선 당연한 질문이라고 여겼을 수도 있을 거다. 돌이켜보면 우리가 어느 순간부터 ‘통일’이라는 화두를 국내 정치용으로 자주 이용하면서 지나치게 가볍게 취급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꿈은 멀어도 아직 통일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은 식지 않았다. 지난 6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가 여론조사를 했더니 국민 10명 중 8명이 남북통일이 필요하다고 응답했단다. 지난 1일 문화일보의 여론조사에서는 응답자의 37.1%가 향후 남북통일을 추진할 때 주변국 중 가장 적극적으로 통일을 도울 가능성이 높은 국가로 미국을 꼽았다. ‘통일을 꼭 해야 하느냐’는 트럼프의 질문에 우리 국민들이 미리 답을 내놓은 셈이다.

DMZ 철조망. 옆에는 임진각 역 표지판이 서 있다(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우리의 소원은 통일~꿈에도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가 나온 게 70년 전이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도 27년이 지났다. 하지만 우리 주변엔 고르바초프의 소련이나 부시의 미국은 없다. 다만 우리의 통일을 경계하는 수많은 ‘마거릿 대처’가 있을 뿐이다. 더구나 국내에선 걸핏하면 ‘종북 좌파’ 딱지를 붙이는 야당의 철지난 이념 공세에 ‘통일’이라는 용어조차 찬밥 신세로 전락하지 않을까 슬며시 걱정도 된다.

결국 기댈 곳은 현명한 국민들과 헬무트 콜의 지혜가 아닌가 싶다. 통일은 소리 없이 온다지만 그나마 조금이라도 준비한 사람들에게만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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