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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돔 대신 비닐봉지’ 썼다는 청소년 성 이야기...한샘 성폭력 사건, 몰카 사건 등 우리 사회 성의식과 무관치 않다

기사승인 2017.11.04  00: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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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행인 정태철

발행인 정태철

2002년 연구년으로 미국에 체류할 때의 일이다. 미국 메이저 공중파 TV에서 고등학교 구내의 콘돔 자판기 설치 여부를 놓고 교육자들이 열띤 토론을 벌이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었다. 한쪽은 10대 임신을 막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조치라고 주장했고, 다른 한쪽은 교내 콘돔 자판기가 학생들의 무분별한 섹스를 조장한다며 절대 안 된다고 핏대를 올렸다. 도대체 미국이란 나라에서 10대 임신이 얼마나 심각하기에 이런 논쟁을 할까? 당시 나는 미국을 매우 한심하게 생각했다.

최근 한 언론에서 ‘콘돔 대신 비닐봉지’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인터넷 포털에 17세 여자 아이가 콘돔이 없어서 비닐봉지를 사용해서 성관계를 했는데 임신이 걱정된다는 글이 올라왔던 모양이다. 나도 부리나케 인터넷에 ‘청소년 콘돔’을 검색하니 “청소년인데요, 콘돔 구하기에 부담을 느끼고 있는데...편의점 가는 게 나을까요, 약국 가는 게 나을까요?”라는 질문을 비롯해서 콘돔 구매난을 하소연하는 질문들이 수두룩하게 올라와 있었다.

콘돔 이미지(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우리 자녀 세대들이 성에 눈을 일찍 뜨고 있는가보다. 질병관리본부의 2016년 ‘청소년 건강 행태 온라인 조사’ 결과에 따르면, 조사 대상 국내 중고등학생들의 첫 성관계 연령이 13.1세이며, 성관계 경험이 있는 비율은 조사 대상의 6.3%에 이른다고 한다.

아이들이 이렇게 성적으로 왕성하니 10대 임신을 걱정 안 할 수 없다. 여성가족부는 2011년 ‘청소년 유해 물건 고시’를 통해서 청소년의 일반형 콘돔 구입은 허용하되 돌출형 등 특수형 콘돔은 미성년자들에게 판매할 수 없게 했다고 한다.

그런데 편의점에서 청소년이 콘돔을 구하기는 주변의 시선이 만만치 않을 것이고, 온라인 사이트는 일반형과 특수형을 같이 판매하므로 성인 인증을 거치기 전에는 구매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고 한다. 언론에 소개된 그 아이들은 오죽 급했으면 비닐봉지를 사용했을까 하는 측은지심이 들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미국처럼 우리도 학교 매점에 콘돔 자판기를 두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자식 키우는 부모들의 걱정이 또 늘었다. 무엇보다도, 우리나라도 이제 미국처럼 아이 키우기에 ‘한심한’ 상황에 처한 나라 대열에 끼었구나 하는 자괴심이 들었다.

콘돔 자판기(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1970년대 대학생 시절에 나는 주간 잡지가 청소년에게 미치는 악영향을 다룬 어느 학술 세미나를 구경한 적이 있었다. 당시 주간 잡지들은 우리나라 '옐로우 저널리즘(황색언론, 선정적 언론)'의 효시라고 불릴 정도로 야했다. 이 자리에서 언론학자들이 ‘선데이서울’ 등 주간 잡지들이 음란하고 퇴폐적인 사진과 내용으로 청소년들의 정신 건강을 오염시킨다고 성토했다. 그러자, 패널로 참석한 한 주간지 책임자가 국내 청소년들이 성에 관한 정보를 어디에서 얻느냐는 설문 조사에서 주간 잡지가 항상 1위를 차지한다며, 자기들 주간지는 우리나라 청소년의 성교육을 책임지고 있다고 당당히 항변하는 ‘희극’이 벌어졌다.

그러나 요즘 아이들의 성에 대한 정보원은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당연히 1위를 차지할 것이다. 오늘날처럼 아이들이 포르노를 접하기 쉬운 시대는 없다. 성에 일찍 눈을 뜨면서도 성에 대한 생각이나 태도가 포르노 등 비정상적인 음란물에서 비롯될 가능성이 큰 게 문제다. 어느 지인은 자기 아이가 자기 방 컴퓨터에서 음란물을 몰래 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아이를 끌어안고 같이 죽자고 엉엉 울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한 아이가 아빠 주민등록번호로 성인 사이트의 성인 인증을 받으려 했더니 '이미 가입했음'이라는 글이 뜨더라는 유머가 나돌 정도로 성인물 인기는 윗물 아랫물을 가리지 않는다. 얼마 전 부산경찰청이 가짜 몰카 영상 배포 사이트를 만들고 가짜 몰카 영상들을 올려놨더니, 2주 사이에 무려 2만 6000명이 가짜 영상을 내려 받았다고 언론들이 보도했다. 이처럼 못 말리는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넘칠 것이고, 그 사이에서 청소년들은 '음란물의 풍요'를 누리고 있다.

청소년들이 포르노를 많이 보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이는 매스컴 학자들의 단골 연구 주제이기도 하다. 성적 영상물 자극이 성적인 대리만족을 줄 수 있어 실제 생활에서 성적 충동이 줄어든다는 이론이 있지만, 지지하는 학자는 적다. 반대로 성적 영상물은 실제 생활에서 성적인 행위를 충동질하는 암시(cue)나 계기가 된다는 모방이론, 또는 사회교육 이론이 더 설득력이 있다. 더 심각한 포르노의 부작용은 여성을 성에 굶주리거나 남자의 성적 도구로 보는 부정적인 성관념 조성이라고 한다. 이런 성에 대한 태도가 누적되면 성폭행 등 성범죄에 대한 무감각 내지는 사소화(trivialization, 대수롭지 않게 보는 경향)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성장 과정에서 성에 대한 잘못된 지식이 입력되면, 이게 자라서도 버릇이 되고 습관이 되어 하나의 그릇된 성의식, 성에 대한 태도로 굳어진다.  

잘못된 성의식이 얼마나 인류 역사에 뿌리 깊은지를 보여주는 사건들이 지금도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다. 최근 미국 유명 배우인 케빈 스페이시, 더스틴 호프만 등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는 할리우드 피해자들의 증언이 나오기 시작하더니, ‘나도 당했다’고 과거의 성추행 사건을 지금이라도 밝혀서 바로잡자는 ‘미투(me too)’ 캠페인이 전 세계 체육계, 정치계 등으로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유교적 전통이 오래 지배했던 우리나라는 이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다. 2011년 1500여 건이었던 몰카 범죄가 2016년에는 5100여 건으로 는 것을 비롯해서, 여교사의 초등학생과의 성관계 사건, 이영학의 변태적 성추행 살인사건, 조덕제의 여배우 성추행 사건, 가장 최근의 한샘 회사의 성폭력 사건 등 클래스가 다른 충격적인 사건이 연이어 터지고 있다. 직장 내 성희롱을 다룬 <부암동 복수자들>, <이번 생은 처음이라> 등의 드라마가 요즘 성행하는 것만 보아도 우리 사회에는 성희롱을 사소화하는 경향이 강한 듯하다. 이쯤되면 우리나라가 '성희롱 천국'이라 불릴 정도로 성희롱은 시간과 공간을 가리지 않고 발생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번지고 있는 미투 캠페인(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전문가들은 성교육을 통해서 이이들에게 성에 대한 올바른 지식, 이성에 대한 존경심, 피임 요령, 피임 도구 구입 방법, 에이즈나 자궁경부암 같은 성 접촉에 의한 질병 등을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고 지적한다. 정보 전달을 위한 성교육도 중요하지만, 성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갖게 하는 게 더 중요하다. 낙태죄에 대한 국민 청원이 이어지고 있는 점도 무언가 성에 대한 정보가 젊은 세대들에게 부족하고 잘못되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와 연결된다.

미국에서 공부하던 시절, 같은 박사 과정 미국 친구가 아들을 낳았다고 동료 학생들에게 시가를 돌리며 싱글벙글 했다. 미국은 아들을 낳으면 친구들에게 시가를 돌리는 풍습이 있다. 딸을 낳았을 때는 달리 무엇을 돌리는 풍습이 없다. 내가 이를 보고 그 미국 친구에게 미국에 무슨 남아선호 사상이 있느냐고 놀렸더니, 그 친구는 미국에서 여자아이를 키우는 일은 ‘매우 신경 쓰이는 일’이라 미국 사람들도 남자아이를 더 선호하는 편이라고 했다. 그 친구의 말은 그만큼 30년 전 미국 사회에서 청소년 성폭력, 10대 임신 등이 난무하는 현실을 반증한 것이었다. 대개 성 관련 문제의 가해자는 남자고 피해자는 여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조선시대 농경사회의 남아선호 사상 때문이 아니라 미국처럼 여성 위험 사회 때문에 때 아닌 남아선호 사상이 알게 모르게 번지면, 이것처럼 한심한 일은 없을 듯하다.

발행인 정태철 reporter1@civic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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