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공론화’와 ‘숙의 민주주의’는 있었는가: 신고리 5, 6호기 및 탈원전에 대한 언론 보도를 짚어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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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공론화’와 ‘숙의 민주주의’는 있었는가: 신고리 5, 6호기 및 탈원전에 대한 언론 보도를 짚어보며
  • 편집위원 양혜승
  • 승인 2017.10.30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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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위원 양혜승
편집위원 양혜승

중단되었던 신고리 원자력발전소 5‧6호기 공사가 다시 진행될 태세다. 물론 이와는 별개로 원자력 발전의 비중을 줄이기 위한 탈원전 정책 또한 가속도가 붙을 듯하다.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의 최종 권고안이 발표되고 이를 정부가 받아들이면서 귀결된 방향이다.

이번 결정을 두고 평가가 엇갈린다. 일단 숙의 민주주의의 실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을 들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이들이 있다. 공론화위원회는 약 3개월에 걸쳐 67회의 회의와 간담회를 진행했다. 공론화위원회가 선정한 시민참여단은 33일간의 숙의 과정을 거쳐 최종 권고안의 토대를 제공했다. 시민참여단이 공론조사에 참여하고 이를 정책에 반영하는 일은 그간 우리 사회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부정적인 평가도 만만치 않다. 이번 사안의 성격이 중대하고 복잡했음에도 불구하고 논의의 기간이 너무 짧았다는 평이 있다. 위원회와 시민참여단 구성의 공정성과 대표성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작지 않았다. 게다가 이번 결정의 내용 또한 새로운 갈등의 불씨를 담고 있다. 신고리 5·6호기 공사는 재개하되 탈원전 정책을 추진한다는 일견 모순적인 결정 때문이다.

정치권과 언론을 막론하고 이번 결정 과정에서 대두된 프레임은 ‘공론화’와 ‘숙의 민주주의’였다. 하지만 이번 결정의 내용과는 별개로 짚어볼 일이 있다. 과연 이번 결정 과정에서 진정한 의미의 ‘공론화’와 ‘숙의 민주주의’가 있었는지.

원전 문제는 지역별로 체감의 정도가 엄연히 다르다. 세계 최대의 원전 밀집 지역인 고리와 신고리의 30Km 반경 이내에는 부산·울산·경남 400만 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이 지역의 주민들이 원전 문제를 체감하는 강도가 수도권과 같을 수 없다. “주민이 배제된 공론화는 숙의 민주주의를 가장한 대국민 사기극”이라는 일각의 주장이 나오는 것도 그런 이유다. 공론화위원회에 따르면, 시민참여단의 지역별 분포는 전국의 인구 비례와 최대한 가깝도록 설계했다고 한다. 이번 결정의 내용과는 별개로 무거운 숙제가 남았다. 지역별로 체감의 정도가 다른 사안을 전국적인 차원에서 함께 결정하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 것인지.

무엇보다도 말 그대로의 ‘공론화(公論化)’가 실현되었는지도 생각해볼 일이다. ‘공론’은 사전적으로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여럿이 모여 의논하는 것’이란 뜻도 있는가 하면, ‘어떤 문제에 대해 국민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일정한 의견’, 즉 ‘여론’이라는 뜻도 있다. 500명에 가까운 시민참여단은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원전 건설을 재개해야 하는 이유와 중단해야 하는 이유를 읽고, 듣고, 토론했다. 특히 마지막 3일 합숙 기간에는 분임 토의와 숙고의 과정을 거쳤다. 따라서 첫 번째 의미의 공론은 분명 있었다. 하지만 두 번째 의미의 공론이 과연 존재했는지는 의문이다. 시민참여단만의 공론화, 혹은 그들만의 숙의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 격리된 공론과 숙의를 과대 포장한 것은 아닐까. 정말 생각해볼 일이다. 과연 우리 사회에 민감한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이번과 같은 격리된 숙의를 실시할 것인지도.

가장 큰 아쉬움은 언론에 있다. 이번 결정 과정에서 언론이 과연 어떤 역할을 했는지 진지하게 되돌아볼 일이다. 일부 언론사는 정부가 공론화위원회를 꾸리는 것 자체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비전문가들이 이런 중요한 사안을 결정한다는 것이 근본적으로 잘못 되었다고 비판했다. 그러다보니, 이 사안을 둘러싼 다양하고 합리적인 견해들을 제시하고 각 견해가 갖는 사회적 의미와 전망을 차분하게 제시하는 공론장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문재인 정부가 탈원전 문제를 정치화했다며 비난하는 언론사도 있었지만, 어쩌면 이번 사안을 정치적인 사안으로 몰고 간 것이 이들 언론사이기도 하다.

차라리 이런 언론사들은 나은 편에 속하는지도 모르겠다. 많은 언론사는 이도저도 아닌 ‘중계 저널리즘’에 머물러 있었다. 이번 사안이 우리 사회에 어떤 가치를 놓고 벌어지는 갈등인지, 이 가치의 핵심이 무엇인지 제대로 짚어내지 못한 채 공론화위원회의 활동 자체를 중계하는 데에만 급급했다. 언론이 제대로 된 팩트를 잘 알려주는 것조차 부족하진 않았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과연 우리나라에 원자력발전소가 몇 군데에 분포하고 있으며, 몇 기의 원자로가 있는지 알고 있는 국민들이 얼마나 될지조차 궁금하다.

알랭 드 보통은 <뉴스의 시대>라는 책에서 지금의 사회를 뉴스의 홍수 시대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이런 시대에 저널리스트가 해야 할 일은 우리 주변에서 발생하고 있는 사건들을 무미건조하게 전달하는 것에 있지 않으며, 사회의 구성원들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해야 하는지 돕는 것에 있다고 주장한다. 언론의 역할이 가치중립적인 정보전달자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때로는 사회 속에서 적극적인 가치 창출자 혹은 가치 제안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모든 언론사가 동일한 가치를 지향할 수는 없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된다. 오히려 다양한 언론이 다양한 가치들을 제시하고 그것들이 충돌하고 갈등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숙의 민주주의를 위한 전제 조건이다. 답을 미리 정해놓고 정치적으로 몰고 가는 일부 언론사들, 혹은 아무런 목소리조차 내지 않는 언론사들. 이런 언론과 함께라면 어떤 공론화든 숙의 민주주의든 결코 가능하지 않다. 숙의 민주주의의 출발점은 공론장으로 제대로 기능하는 언론의 존재에 있다. 그 공론장이 있어야 합리적 식견을 가진 시민들도 생겨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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