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보복, 인권침해’ 박근혜 프레임 이제 내려놓아야...전직 대통령의 자기연민은 스스로 만든 ‘면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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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보복, 인권침해’ 박근혜 프레임 이제 내려놓아야...전직 대통령의 자기연민은 스스로 만든 ‘면죄부’
  • 편집위원 이처문
  • 승인 2017.10.23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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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위원 이처문
편집위원 이처문

1941년 7월 말.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가 수감돼 있던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 14호 막사에서 한 명의 탈주자가 발생했다. 독일인 간수는 그를 체포하지 못하자 연대책임을 물어 같은 막사의 수용자 10명에게 굶어 죽이는 아사형(餓死刑)을 내렸다.

그 중 프란치스코 가요브니체크라는 사람이 “이젠 내 아내와 자식들을 볼 수 없구나”하고 울부짖었다. 그 순간 명단에 포함되지도 않았던 콜베 신부가 말없이 간수 앞으로 나서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저 사람 대신 죽겠습니다.”

극심한 고통을 겪은 콜베 신부는 그해 8월 14일 독주사를 맞고 숨을 거둔다. 일면식도 없는 딱한 처지의 한 가장을 살리려고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은 자기희생에 고개를 숙이게 된다.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조은화, 허다윤 양의 장례식은 숨진 지 3년이 훌쩍 넘은 지난달에야 치러졌다. 그날 운구 행렬이 모교인 안산 단원고를 찾아 마지막 이별을 고할 때 은화 양의 어머니 이금희 씨는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딸에게 ‘선생님 말씀 잘 들어라. 친구들과 잘 지내라’고만 했지 사랑한다는 표현을 많이 못 했다. 엄마 아빠는 은화를 목숨보다도 더 사랑한다.”

다윤 양의 어머니 박은미 씨도 재학생들에게 “엄마 아빠 많이 안아드리고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달라”고 당부했다. 자식의 죽음이 억울하고 원통했겠지만 포용과 사랑만이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최근 사격장 인근에서 총탄에 맞아 숨진 육군 이모(22) 상병의 사망 원인이 유탄으로 확인되자, 이 상병의 아버지는 “빗나간 탄환을 쏜 병사 역시 누군가의 아들이다. 어느 병사가 쐈는지는 알고 싶지도 않고, 알려주지도 말라”고 했다.

사고 발생 후 도비탄(딱딱한 물체에 맞아 튕겨난 탄환) 논란이 불거져 억장이 무너졌던 이 상병의 아버지였다. 하지만 사인이 밝혀지자 총을 쏜 병사의 처지를 헤아려 관용을 베풀었다. ‘용서는 진실을 전제로 한다’는 말을 깨우쳐주는 대목이다.

이 같은 관용과 자기희생의 대척점에는 ‘자기연민’이 버티고 있다. 이런 심리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자신이 가장 불행하다고 여기기 때문.

자기연민에 빠진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심리 상태를 보인다고 한다. 예를 들면 ‘내 문제가 다른 사람의 문제보다 더 심각하다’, ‘내가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다’, ‘나의 상황은 불공평하다’, ‘세상이 내게 일부러 시련을 주는 것 같다’, ‘좋은 일은 다른 사람에게만 일어나고 나쁜 일은 내게만 일어난다’, ‘나는 한시도 편할 날이 없다.’

그래서 최고 권력자의 자기연민은 비극을 초래하게 마련이다. 최근 ‘정치보복’과 ‘인권침해’라는 프레임을 들고 나온 박근혜 전 대통령은 과연 어떤 심리상태일지 궁금하다. 국정 농단 가담자들의 범죄 사실이 굴비처럼 엮여 나오는데도 ‘정치보복’ 운운하며 재판을 보이콧하는 장면에서 할 말을 잊게 된다. 수감자 6명이 기거할 수 있는 넓이의 독방에서 매트리스까지 깔고 지내면서 ‘인권 침해’를 내세우는 것은 또 어떤가. 최근 법정에서 4분간 진행된 그의 법정 진술은 자기연민을 절절히 담고 있다.

“주 4회씩 재판을 받은 지난 6개월은 참담하고 비통한 시간들이었다…정치적 외풍과 여론의 압력에도 오직 헌법과 양심에 따른 재판을 할 것이라는 재판부에 대한 믿음이 더는 의미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향후 재판은 재판부의 뜻에 맡기겠다...법치의 이름을 빌린 정치 보복은 저에게서 마침표가 찍어졌으면 한다.”

자신은 결백한데 정치보복의 희생양으로 박해를 받고 있기에 재판을 보이콧하겠다는 거다. 무죄 판결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정치 투쟁으로 전환한 듯하다. 배경이야 어떻든 납득하기 어려운 그의 왜곡된 ‘법치’는 오랜 세월 굳어진 자기연민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 같다.

에이미 모린은 <나는 상처받지 않기로 했다>에서 자기연민은 문제 해결에 대한 자신감이 모자랄 때 찾아 든다고 했다. 그래서 일부는 자기연민을 면죄부로 삼는다는 것이다.

자기연민은 역지사지(易地思之)와 거리가 멀다. 그래서 세월호 유족의 심정을 담아 그의 법정진술을 차용해보았다. 놀랍게도 문맥은 매끄럽게 이어졌다.

“수학여행 길에 올랐던 제 자식이 세월호에 갇혀 속절없이 물속으로 가라앉은 뒤 지난 3년은 참담하고 비통한 시간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세월호를 인양해서 어떻게 침몰했는지 밝혀내고, 자식들 주검이라도 수습할 수 있게 해달라고 호소했을 뿐 정부를 향해 그 어떤 부당한 요구도 한 적이 없습니다. 저희를 향한 서슬 퍼런 정치 권력의 감시와 압력에도 ‘국가는 국민의 생명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는 헌법 정신만 믿고 정부가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조사해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저희 유가족이 마치 반정부 집단이라도 되는 듯 손가락질하며 철저하게 외면했습니다. 이제 저희는 박근혜 정부에 대한 믿음조차 더는 의미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법치의 이름을 빌린 ‘국민 생명 경시’는 세월호 참사에서 마침표가 찍혔으면 합니다.”

박근혜 정부는 지난해 국민들이 치켜든 촛불 앞에서 무너졌지만, 이미 3년 전 세월호와 함께 침몰했다. 그런데도 집요한 권력은 바닥을 칠 때까지 진실을 감추려했다. 국민의 눈을 가린 채 겁박하고 감시하며 온갖 농단을 다 부렸다. 하지만 가려졌던 진실은 엉뚱하게도 청와대 캐비닛에서 잠자고 있었으니 이런 아이러니도 없다.

자기연민에서 한 발짝도 헤어나지 못하는 전직 대통령이 바야흐로 법정 투쟁 대신 정치 투쟁으로 선회했다. 타인의 비판은 아랑곳없이 ‘정치 보복’과 ‘인권 침해’라는 프레임을 내세워 지지 세력을 모으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어차피 재판에선 승산이 없으니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판을 한번 흔들어보자는 속셈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촛불을 통해 진실을 손에 든 국민들은 이미 20대 총선 때의 유권자가 아니다. ‘박근혜 프레임’은 식상한 메뉴여서 손님들을 끌어 모으기 어려울 것 같다. 국정 농단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뀐 작금의 ‘상황극’ 역시 연출자의 의도와는 달리 관객들의 외면 속에 곧 막을 내리지 않을까 싶다. 일각에서 피어나던 동정론도 연기처럼 사라질 것이다.

그는 국민이 유권자일 뿐 아니라 주권자임을 애써 외면하는 것 같다. 전직 국가지도자로서 상식 수준의 책임감이라도 보여 달라는데 그게 ‘정치 보복’이란다. 그래서 국민들의 인내도 이제 한계에 도달했다. 마침내 ‘박근혜 프레임’에서 해방될 때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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