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고리 원전 5, 6호기의 재개 결정 공론조사...숙의 민주주의는 이미지가 아닌 본질의 숙성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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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리 원전 5, 6호기의 재개 결정 공론조사...숙의 민주주의는 이미지가 아닌 본질의 숙성이 필요하다
  • 발행인 정태철
  • 승인 2017.10.20 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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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 정태철

"정부·육조와, 각 관사와 서울 안의 전함(前銜) 각 품관과, 각도의 감사·수령 및 품관으로부터 여염(閭閻)의 세민(細民)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부(可否)를 물어서 아뢰게 하라." 이 말은 1430년에 세종이 세금 거두는 방식의 변경을 놓고 백성들 의견을 물으라는 지시사항이다. 세종실록 47권에 있다. 세계적으로 여론조사의 효시는 세종이 아닐까 추측된다. 

관련 문헌에 따르면, 여론조사는 원래 미국의 광고회사들이 시장조사할 목적으로 1910년대에 개발되었다. 이게 정치적인 여론조사로 발전한 것은 1936년 경 여론조사 공급회사를 설립한 ‘조지 갤럽’이란 사람에 의해서다. 그후 여론조사는 사람들이 특정 정치적 이슈에 대해 갖고 있는 속마음을 알아내는 ‘신비한 기술’로 여겨지면서 급성장했다.

그런데 1948년 미국 민주당의 현직 대통령 트루먼과 공화당의 듀이 후보가 격돌한 대통령 선거전에서 여론조사가 대형사고를 쳤다. 여론조사 회사들이 모두 듀이 후보의 압도적인 우세를 점쳤기에, ‘시카고 데일리 트리뷴’은 투표 당일 늦은 밤까지 투표 결과가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듀이가 트루먼을 이겼다(Dewey Defeats Truman)”는 제목으로 미리 신문을 인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선거 다음날 아침, 신문이 배포된 직후에 드러난 선거 결과는 트루먼의 승리였고, 진짜 패배자는 여론조사가 됐다. 아래 사진은 자신이 패배했다는 신문 기사를 들고 활짝 웃는 트루먼 대통령 당선자의 모습이다. 이는 여론조사의 부정확성을 상징하는 역사적 사진으로 유명해졌다.

대통령에 당선된 트루먼이 자신이 패했다고 오보한 신문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이 사진은 여론조사의 부정확성을 상징하는 역사적 사진이다(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그후 여론조사가 수백, 수천 명의 표본으로 수천 만 명을 대표한다는 게 말이 되냐는 의문이 일었다. 그러나 적은 수로 다수의 생각을 예측할 수 있도록 조사 대상 샘플을 실제 성별, 연령별, 거주지별 비율과 유사하게 뽑는 통계학적 방법이 개발되면서 표본의 대표성 문제는 많이 극복되었다. 그 다음에는 여론조사에서 묻는 설문의 문제가 제기됐다. 복잡한 이슈를 묻는 설문을 YES나 NO로 간단히 답하라는 것이 문제이며, 설문에 편견이 들어간다거나, 설문의 워딩(wording), 즉 말의 표현 방식에 따른 문제도 제기됐다. 이런 설문 문제들은 아직도 뚜렷하게 해결된 것은 없다. 다만 여론조사를 미디어 등에 발표할 때는 일반인의 오해를 줄이도록 여론조사의 주체, 방법, 시기, 설문 내용, 표본 수, 신뢰수준, 표준오차 범위 등을 다 같이 제시하라는 가이드라인이 권고될 뿐이다.

여론조사 비판론자들은 여론조사의 과학성이 아니라 여론조사의 ‘본질’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 중 하나가 여론조사는 일종의 ‘인공적인 선거’이고, 실제 ‘진짜 선거’는 아니라는 것이다. 여론조사는 그게 아무리 과학적이라 해도 진짜 선거를 대체할 수 없다. 조지 갤럽도 여론조사는 어디까지나 정책 결정의 보조 수단임을 강조했다. 조사 결과로 중요한 정책 결정 자료로 삼는 게 있는데, 그게 바로 센서스(census)다. 센서스는 전 국민 투표와 꼭 같이 국민 전체, 가가호호 모두를 조사한다는 점에서 여론조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여론조사 수치는 '통계치'라고 부르며, 실제 수치인 '모수치(母數値)'와 염연히 구분한다. 통계치와 모수치의 차이가 바로 표준오차다. 통계치에 표준오차를 더하고 뺀 범위도 모수치와 100% 맞는 게 아니다. 95% 맞을 확률, 즉 5% 틀릴 확률이 있다는 게 바로 신뢰수준이다. 그래서 통계학적으로도 여론조사 수치는 모수치로 대체될 수 없다.  

조지 갤럽은 또한 “여론조사의 한계와 단점은 의도되지 않은 ‘불길한 예언’”이라고 했다. 이는 여론조사 결과를 정책 결정에 적용했을 때의 문제를 지적한 말이다. 여론조사는 조사 이슈에 대한 사람들의 평균 생각이지, 그게 해당 이슈의 본질적인 판단은 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우리는 한 배우의 스크린을 통한 얼굴과 이미지만을 보고 청순하다거나 멋지다고 좋아한다. 이것은 우리가 배우의 이미지를 좋아하는 것이지 배우의 본질(실체)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여론조사란 문제의 사안에 대해서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이미지’에 불과한 것이지 문제의 ‘본질’은 아닌 것이다. 옛날에 미국의 명배우 게리 쿠퍼 팬들은 그를 대통령에 출마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었다. 그 이유는 그가 영화에서 대통령 역을 훌륭하게 연기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미지와 본질을 실제 정치에서 착각해서는 안 될 일이다.

서부 영화에 주로 출연한 명배우 게리 쿠퍼. 그의 팬들은 그가 영화에서 대통령 역을 잘 수행했으므로 대통령 후보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그런데 우리는 정당의 선거 후보를 여론조사로 실제 단일화하거나 결정하는 경우들이 있었다. 위험한 일이다. 참고 자료를 얻기 위해 실시한 조사 결과로 진짜 의사 결정을 내린 것이기 때문이다. 남이 보면 객관적인 여론조사로 절차를 진행했다는 이미지를 보여 줄 수는 있겠지만 과연 선출된 후보가 본질적으로 적격자인지는 다른 잣대가 판단해 주어야 한다. 미국의 역사학자 다니엘 부어스틴은 여론은 ‘의견에 대한 가상의 증거’일 뿐이라고 했다. 그 사안에 대해서 의사 결정을 내리는 근거는 오로지 그게 사회에 미치는 영향의 '실체' 내지는 본질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정부는 신고리 원전 5, 6호기 공사 중단이냐 재개냐의 문제를 공론화위원회에서 주도하는 공론조사로 결정내리자고 했다. 이 사안이 국민투표로 결정할 사안은 아닐 듯하고 그렇다고 우리가 죽 논의한 것처럼 문제 많은 단순 여론조사 한 방으로 결정하기에는 부담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공론조사 방식이었을 것이다. 공론조사란 일정한 시민 대표들을 뽑아서 토론을 거쳐 최종 투표로 정책을 결정하는 방식이다. 이는 숙의(熟議) 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의 일종인데, 투표라는 단순 다수결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대의 민주주의의 단점을 토론과 논의라는 공론화 과정으로 보완한다는 의사결정 방식이다. 대의 민주주의에 직접 민주주의의 방식을 접목한 제도로 보인다.

엄청난 논란 속에 500명의 시민참여단이 구성됐고, 여러 차례의 전국 순회 토론회와 TV 토론회 등이 있은 다음, 최종 투표에 의해 신고리 원전 5, 6호기 공사 재개가 찬성 59.5%, 반대 40.5%로 결론이 났다.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은 “(이번) 공론화 과정은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국민이 의견 차이가 있는 이슈에 어떻게 갈등을 만들지 않고 서로 승복하고 존중할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고 말했다고 언론이 보도했다. 

사실 이번 공론화위원회는 출발부터 순탄치 않았다. 일부에서는 출발 당시에 공론화 위원회나 공론화 과정의 법적 근거가 없고 시민참여단이란 비전문가들에게 국가 에너지 정책 결정을 맡기는 게 위험하다는 비판이 있었다. 이를 의식한 듯이, 신고리 5, 6호기 공론화위원회 김지형 위원장은 위원회 출범 당시에 “탄생부터 축복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절차적 정의를 지키겠다”고 말한 바 있다. 마치 원전 문제의 본질을 다루는 데는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대외적으로는 절차를 잘 지켜냈다는 말을 듣고 싶다는 뜻처럼 들렸다. 

문제는 공론화 절차가 아니라 공론화의 방법이다. 원전은 과학이다. 일반인들의 생각으로 결정될 사안이 아니다. 원전 공사 재개 문제는 그 사안의 찬반 관계자와 전문가들이 충분히 토론을 통해 결정할 문제다. 합리적이고, 다각적이고, 충분하게 토론을 한다는 게 공론화이며 숙의 민주주의라는 것이지, 원전 관계자들의 토론을 듣고 이에 대해서 시민참여단이란 일종의 일반인 심판들의 찬반 공론조사를 하는 건 내내 한계가 있는 여론조사의 범주에 속한다. 굳이 공론조사라는 이름으로 겉을 포장해서는 안될 듯하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인종차별 발언에 항의하기 위해 미국 국가가 울릴 때 운동 선수들의 무릅꿇기가 번지고 있다(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브랙시트를 두고 으르렁거리는 영국 내 갈등이나 영국과 EU와의 불협화음도 그렇고, 트럼프 인종차별을 두고 무릎꿇기 항의를 벌이고 있는 미국도 그렇고, 카탈루냐의 독립 여부를 두고 벌이는 스페인의 내홍도 그렇고, 지구상 민주주의 선진국들도 첨예한 국가적 갈등을 유발하는 사안에 대한 의사결정은 갈팡질팡하고 있다. 이번 우리의 원전 문제 공론조사는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이미지를 보이는 데는 나름 효과가 있을 듯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원전에 대한 안전성, 에너지로서의 장기적 플랜, 원전 산업의 미래 경쟁력이란 본질이다. 원전의 본질이 정치적 입김 없이 전문가들에 의해 얼마나 공론화 과정에서 충분히 논의되었느냐 하는 게 공론화의 본질이지, 시민들의 인기투표와 유사한 공론조사와 그 결과가 마치 본질처럼 얘기되는 것은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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