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FF 특별대담] 시대의 방랑자 '스즈키 세이준' 감독의 발자취 더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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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FF 특별대담] 시대의 방랑자 '스즈키 세이준' 감독의 발자취 더듬기
  • 취재기자 김예지
  • 승인 2017.10.18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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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달시 파켓과 토니 레인즈가 말하는 일본 B급 영화의 대부 '스즈키 세이준' / 김예지 기자

17일 오후 2시 40분부터 부산 해운대구 우동 영화의전당 소극장에서 감독의 특별대담이 열렸다. 미국인 영화평론가 달시 파켓(Darcy Paquet)이 진행하고, 영국 평론가 토니 레인즈(Tony Rayns)가 스즈키 감독의 작품과 생전 그와의 일화들을 이야기했다.

故 스즈키 세이준 감독의 특별대담이 17일 영화의 전당 소극장에서 열리고 있다. 패널로는 미국의 영화평론가 달시 파켓과 영국의 영화평론가 토니 레인즈가 참석해 이야기를 나눴다(사진: 영상기자 성민선).

스즈키 세이준 감독의 본명은 스즈키 세이타로다. 1950년대 후반에 개명했고, 그는 ‘스즈키 세이준’이라는 새 이름으로 인기를 얻었다. 일본 B급 영화의 대부라고도 불리는 스즈키 감독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의 동경을 담았다. 전쟁 후의 동경은 폐허가 됐고,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궁핍을 겪었다.

동경대 입시에 실패해 직업도, 돈도, 기술도 없었던 그는 영화사 입사 시험을 쳤다. 당시 일본의 대형 제작사들은 사람을 뽑을 때 시험을 쳤다. 성적에 따라 영화 조연출과 스크립트 쓰는 일을 맡겼는데, 잘 쓴 스크립트는 영화로 제작하기도 했다는 것. 스즈키 감독은 1950년대 대형 영화 제작사인 쇼치쿠에서 조연출로 영화를 시작했다. 쇼치쿠는 주로 감정적이고, 여성 관객에 집중한 영화를 제작했다. 평론가 토니 레인즈는 "굉장히 보수적인 분위기였기 때문에, 스즈키 감독이 그곳에서 일하는 걸 즐기진 않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스즈키 감독의 영화 스타일이 변화하게 된 계기는 그가 ‘닛카쓰' 영화제작사로 회사를 옮기면서부터다. 토니 레인즈는 “당시 닛카쓰 영화사가 많은 인력을 모집했고, 스즈키 또한 새로운 장소를 찾아간 것”이라며 “어떻게 보면 그가 자유를 찾아 떠난 격”이라고 설명했다.

스즈키 감독은 단기간에 감독이 됐다. 그가 닛카쓰로 이직하며, 직접 메가폰을 잡고 연출을 맡게 됐기 때문. 스즈키 감독은 B급 영화감독으로 7년에 거쳐 25편, 그러니까 1년에 최소 3편에서 최대 5편으로 다작을 하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다져나갔다. 그는 이 경험을 통해 배우를 어떤 식으로 다뤄야 하는지 등의 연출가로서의 기술을 터득했다. 당시 일본의 영화 제작 환경은 모든 영화 스텝이 한 회사와 계약해서 일하는 구조였다. 이는 배우 역시 같았는데, 한 회사의 작품에 같은 배우가 반복해서 출연하는 식이었다고 한다.

평론가가 평론가에게. 달시 파켓이 토니 레인즈에게 질문하고 있다(사진: 영상기자 성민선).

진행자 달시 파켓은 스즈키 세이준의 감독으로서의 역사는 "그가 '어떻게 B급 영화감독에서 벗어났는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말했다. 1963년 그는 감독으로서 영화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기존 작품보다 몇 단계 더 우수한 작품들'을 만들어 내기 시작한 것.

토니 레인즈는 스즈키 감독에게 여러 번 변화의 계기에 대해 질문했었다고 과거를 회상했다. "다수의 영화인이 닛카쓰 영화사로 이동하면서 같은 목표가 생겼다. 감독들이 서로 경쟁하면서 각자가 추구하는 다양한 방향의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 '목표'이자 차별성 있는 작품에 대한 '열망'이 생긴 것"이라고 당시 스즈키 감독의 말을 전했다. 

그는 또 "10년 전 런던에서도 똑같은 질문을 던졌는데, 이번에는 전보다 더 솔직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이 닛카쓰로 이적 후 4편의 B급 영화를 만들고는 바로 A급 큰 영화를 만든 것. 당시 질투에 휩싸였던 스즈키 감독은 자신의 재능이 더 낫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노력했다더라"라고 말했다.

토니 레인즈 평론가가 질문에 답하고 있다(사진: 영상기자 성민선).

스즈키 세이준 회고전에 등장한 작품은 1960년대 만들어진 영화들이 많다. 달시 파켓은 "<육체의 문>이란 영화를 회고전에 넣은 이유는 무엇이냐"고 물었다. 토니 레인즈는 "스즈키 감독이 닛카쓰를 위해 만든 13개의 영화가 있지만, 1964년에 만들어진 <육체의 문>은 감독의 변화를 담고 있는 영화"라며 가장 큰 변화는 "기존에 회사가 준 시나리오가 아닌, 감독 자신이 다무라 다이지로의 동명 소설을 보고 직접 선택한 작품이란 점"이라고 답했다. <육체의 문>은 판타지적 요소 아래 당시 동경의 현실적인 모습을 그리고 있다.

토니 레인즈는 "일본의 가부키 극장은 노동자 계급을 위한 극장으로 시카케라는 장치를 사용했다"며 "여기서 영감을 얻은 스즈키 감독이 갑자기 강한 색감을 주는 등의 방법을 영화에 접목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1966년의 <동경 방랑자>와 같은 영화에서는 감독의 판타지적 상상력이 정점을 찍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대담을 듣는 시민과 기자들의 모습(사진: 영상기자 성민선).

스즈키 세이준 감독의 회고전은 지난 5월 타계한 故 김지석 프로그래머가 추진한 프로그램이다. 김지석 프로그래머가 꼭 넣어야 한다고 말했던 작품은 1967년 <살인의 낙인>이다. 토니 레인즈는 영화와 관련해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며, "<살인의 낙인>은 B급 영화 한 편이 부족해져 스즈키 감독이 밤을 새워 하룻밤만에 대본을 만들고, 두 달만에 찍은 작품"이라며 "제작 후 닛카쓰 회사와의 큰 문제가 생겨 소송에까지 휘말렸다"고 말했다.

닛카쓰의 사장인 호리 큐사쿠는 회사 잔고를 조작했는데, 모든 책임을 질 희생자를 찾고 있었다. 그는 스즈키 감독을 경영난의 희생양으로 삼았고, 그의 작품이 "이상하고, 값어치를 못한다"고 폄하했다. 또한, 정식 통보가 아닌 영화 완성 8개월 후 더 이상 월급을 주지 않겠다는 편지를 보내 스즈키 감독을 해고했다. 감독은 몇 년여에 거친 긴 법정 싸움 끝에 승소를 거뒀다.

<살인의 낙인>은 밥 냄새를 맡으면 성적으로 흥분하는 야쿠자의 모습 등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보여 후대 감독들이 오마쥬하기도 했다. 이 영화를 통해 스즈키는 '장르 영화감독'이라는 이름을 공고히 했다.

영화평론가 달시 파켓이 기자의 요청에 손을 흔들고 있다. 토니 레인즈의 멋쩍은 미소가 보인다(사진: 영상기자 성민선).

실제로 '스즈키 세이준'은 어떤 사람이었냐는 달시 파켓의 질문에 "내가 본 그는 외소한 체격에 유머 감각 있고 자신의 재능에 확신이 가득한 사람"이라고 답했다. 토니 레인즈는 또 "스즈키 감독에게는 수필 작가인 스즈키 켄지라는 동생이 있다. 켄지는 자신의 글에서 '우리는 하나의 공통점을 가졌는데, 20대에 외부의 시선들로부터 자유롭고자 한 것'이라 썼다"며 "굉장히 젊은 시선을 갖고, 굉장히 소년 같은 감독이었다"고 평했다.

토니 레인즈는 스즈키 감독의 <겡카 엘레지>를 최고의 작품으로 꼽았다. 그는 "굉장히 폭력적인 성향의 남성이 어떻게 파시즘에 빠졌는지를 담은 작품"이라며 "1930년대 일본은 군사 정부 아래 파시즘에 빠졌다. 일본이 이웃 나라를 왜 침략했는지, 젊은 일본 군인들이 왜 극악무도한 일을 벌였는지에 대한 고민을 담았다. 코미디 영화지만 스즈키 감독이 파시즘을 진지하게 들여다본 모습이 녹아있다"라고 말했다.

한편, 스즈키 세이준 감독은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으로 선정됐고, 토니 레인즈는 '지석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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